오늘 부로 이 회사에서의 1년 반동안의 근무가 끝납니다. 작업을 마치며, 어떤 분들께는 사과를 드리기 위해 그리고 많은 분들께는 뒤늦은 양해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비난을 감수하고 이 게시물을 올립니다. 사실은 저의 얄팍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작정인 거겠지만요.
전 지금 2개의 모니터가 놓여있는 책상에 앉아서 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모니터엔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창들이 띄워져 있고요. 이 창들은 대부분 이곳 'DJUNA의 영화낙서판' 사이트의 게시판 방문자들과 엔키노, 씨네21, 무비스트 사이트의 회원들에 대한 자료입니다. 하루 10시간정도 여러분들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것. 여러분들의 게시물과 자료, 미니홈피와 블로그를 철저하게 모니터링하는 것이 바로 제 직업이었던 셈이죠.
저에게 할당된 인원은 대략 300여명 정도였습니다. 주로 영화분야의 한 게시판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포스팅을 하는 분들이 제 대상이었는데요. 작성자들의 글을 분석하고, 홈피나 자료의 사진을 관찰하는 것이 일의 시작이고, 일단 사진과 글, 방문자 추적을 통해 나이와 성별, 직업, 성격 그리고 선호하는 컬러, 스타일, 브랜드, 쇼핑장소, 헤어스타일, 악세사리, 화장품, 제품 교환주기, 문화참여 지수, 외국어 사용빈도, 미디어 노출정도, 소비형태에 이르기까지 총 53개에 이르는 체크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크리스트를 바탕으로 연령과 직업, 성과 교육수준, 경제적 여건, 가족구조와 주거지역 등의 항목으로 세분화되고, 나아가 라이프 스타일과 사회적 경향분석, 7가지의 성격분석(맹목형, 선도형, 경험형, 체면형, 실속형, 표출형, 내재형), 제품 구입시 구매패턴과 주기 등에 따라 각 해당 모델로 분류되어지며, 또한 각 모델에 따른 제품구매행동 요인 등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이 작업에 아직 익숙치 않은 저로썬 녹록한 일은 아니었지요.
모니터링 중에 흥미가는 대상분들의 경우 1:1 방식으로 직접 접촉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마 이곳에도 제가 메일이나 쪽지, 메신저로 몇가지 질문을 드린다던가 했던 분들이 몇분 계실 거에요. 심리상태를 파악하고, 이전의 조사결과를 확인하고 대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 보고서의 오차범위를 조금이나마 줄여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작업은 분기별로 이루어졌는데, 3개월 정도의 조사과정으로 수집되고 취합된 여러분의 데이터는 SoPhis Cat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10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고객의 대부분은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 광고기획 등의 종사자들인 걸로 알고 있는데, 보통 1년에 5천만원에서 7천만원대의 가격으로 거래된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이 같은 보고서를 만들어내는 곳은 대략 5∼6개 업체정도라는데, 제가 일하는 여기가 나름대로는 업계 선두라고 들었고요. 벤처이면서도 웬만한 중소기업 부럽지 않은 매출을 안정적으로 꾸려가는 걸 보면 제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곳들에서 이 보고서가 이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2000년 이후 시장에 진입한 상품이나 브랜드, 혹은 서비스의 경우 이런 류의 보고서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제품들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장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게, 이제는 일기예보처럼 소위 트랜드라는 것도 예측 가능하다는 말인데... 사실 제가 볼 땐 오히려, 조작되고 가공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더군요. 고객 기업에서 언론매체로 유출된 보고서가 그들의 구미에 맞게 재가공 되어 시장을 좌우하는 소위 트랜드로 만들어져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했던 아주 간단한 작업이... 6개월이 지나 실제로 잡지나 케이블등에서 눈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날 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더군요.
아무튼, 오늘이면 전 이 회사를 떠나게 됩니다. 그동안 웹 상에서 드러나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게 썩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아무리 밥벌이라지만 알리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수집한다는 점에서 마음 한구석의 께름칙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좀 죄송한 마음이 들기까지 하고요. 이런 정보 수집은 이미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지만 어떻게 보면 일종의 사생활 침해였기도 했고...
그래서 제가 했던 일을,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나마 자세히 밝힘으로써, 여러분들게 사과를 드리고 이해를 구하려고 합니다. 제 글이 그런 저의 마음을 얼마나 담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여러분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성된 보고서들을 여러분들께도 제공해 드리려고 해요. 사정상 전문을 공개하기는 힘들고... 제 계정에 올려놓은 요약본을 아래 링크해 놓겠습니다. 회사측의 허가는 받지 않았지만 뭐, 언론사 기자들에게도 무료로 공개되는 수준의 자료이니 괜찮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