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는데 듀나님 리뷰를 읽고 갑자기 다이아나 윈 존스의 소설들을 뒤적거려보았습니다. 결국 오늘 오후에 도서관에서 어린이 섹션에 가서 꼬마들과 함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낮은 책상에 앉아 읽어보다 빌려왔어요. 지금 한 반 쯤 읽었는데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재미있게 썼네요. 요즘 우울한 뉴스도 많은데 좀 잊어버리고 잠시 즐겼죠.
2. 이번 주 일요일에 드디어 새 미스 마플 시리즈, '서재의 시체' 편이 방송된다고 하더군요. 예고편을 봤는데 제랄딘 매큐언의 마플양은 언뜻봐도 서늘했습니다. 밴트리 부인 역의 조안나 럼리는 AbFab의 팻시를 그냥 갖다 놓은 것 같았어요. 오늘 아침 라디오에 나와서 프로그램 홍보 겸 인터뷰를 했는데
여기를 누르시면 리얼 오디오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자근 자근 조그만 목소리로 말하는 이 할머니, 그러니까 더 무서워요...사실 마녀 역할을 하면 참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마플양도 뭐 일종의 마녀네요.
3. 문명의 베일은 정말 얄팍한 것 같아요. 아주 쉽게 시시 때때로 맨얼굴이 드러나는 야만성을 일상에서 보게 되는데, 요번 밀양 성폭력 사건은 정말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해줍니다. 분노는 넘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잘 들리질 않네요.
이번 사건의 가해자들, 하늘에서 떨어진 악마들이 아니고 10대 남자애들, 누군가의 어찌보면 평범한 아들들이잖아요. 기본적으로 여자를 너무나 우습게 알고 짓밟은 이 사건의 가해자들, 그 어린 나이에 그다지도 비뚤어진 사고와 폭력성을 대체 어디서 배웠겠어요? 이 사건을 싸이코들의 단발성 일탈행위로 보기엔 한국 사회의 심한 성차별 구조와 비뚤어진 성의식, 거칠고 폭력적인 문화하고 너무나 깊숙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또래 집단에 휩쓸려서, 망보다가, 별 생각없이 등등의 이유로 관련되어 경찰서에 무릎을 꿇고 있는 수십명의 애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누구네 아들이나 이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납니다.
3-1. 인터넷에 가해자 신상 공개하는 린치를 정당화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답답해요. 법치국가라니. 문명사회에선 그런 식의 폭력대신 합리적인 시스템을 발달시켜야죠. 법이 맘에 안들면 시위를 할 수도 있죠.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고로 신상명세나 블로그, 사진 공개해서 혼 좀 내는게 어떠냐...횟불 들고 쇠스랑과 총들고 가서 린치하는 거하고, 제대로 처벌하자고 캠페인 하는 거 하고 같습니까? 시스템좀 제대로 바꾸어서 사적인 폭력이 난무하지 않는 사회로 진입했으면 좋겠습니다.
3-2. 그리고 가해자 여자친구 사진도 돌아다닌다면서요? 그들이 2차 가해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게 참 짜증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여자들이 비난 받는 양상도 꽤 불쾌해요. 여자 중에도 목젖을 가진, 가부장 권력의 부역자들이 수두룩한 이유가 뭐겠어요? 노예근성? 아버지의 언어를 체화한 명예 남자들? 동성애 혐오증세를 보이는 동성애자처럼, 골름처럼, 자기 부정의 분열증세를 보이네요. 억압이 심한 사회에서 더 잘 관찰되는, 여자들안의 성차별적인 남자의 목소리, 참 불행한 일이죠.
저항해도 비난, 부역해도 비난. 부역도 적당히 봐가면서 정해진 틀안에서 해야죠. 가부장적 공동체에서 그야말로 '찍어낸' 남자들을 감싸고 돌면, 그 옹호한 여자들이 더 욕을 먹는데. 숫자로는 인구 절반인데 권력없이 소수자이다 보니 참 여러가지로 더럽군요.
3-3. 법이 바뀌어야 한다, 성폭력 처벌을 강화하고, 법이 남성편향에서 보다 중립적으로, 어린이/미성년 보호를 철저하게 하는 쪽으로 바뀌면 좋겠죠. 이왕에 있는 법이나 제대로 적용하면 좋을텐데, 현재로선 법 집행 기관의 성별이 남자라서요...
4. 제 기억으론 97년에도 충청도 어디선가 시골 마을 남자 14명이 할머니랑 단 둘이 사는 11살먹은 고아 소녀(사회복지가 전무한 나라다 보니 소녀가장,이라고도 하죠)를 꽤 장기간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을 거에요. 저는 그사건이 너무 끔찍해서 기억하거든요. 마을 사람들의 묵인하에 벌어진 이 끔찍한 일은 피해자가 극약을 마시고 자살기도를 하면서 알려졌던 것 같아요. 그래도 (여자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마을 체면을 구겼다 내지는 (피해자의) 행실이 나쁜 줄은 알았지만 그정도인 줄은 몰랐다, 지가 야하게 입고 다니며 꼬리를 쳤다(11살짜리가!) 등등. 그 피해자 어린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그때 그 남자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늘 그렇듯이 어느 마을 누구인지 다 알 수 있게 피해자 신원을 드러내고, 몇차례까지 운운하며 선정적으로 보도해대면서도 제대로된 어젠다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혹은 안하는 언론이니까 그때 뿐이었어요. 재판조차 제대로 보도된 걸 기억할 수 없네요. 그때도 사건이 보도되자 사람들은 그마을 남자들을 다 죽여라, 잘라버려야 한다고 외쳤죠. 그리고는 그대로에요...그리고 또 이런 일이 나고, 또 일어나고...
사실 이런 극단적인, 그러나 결코 아주 드물다고도 못할 성폭력사건들은 보통 별 생각없이 가부장 사회의 남성권력을 누리고 있는 남자들도 얼마든지 동의하고 같이 분개할 수 있는 일이죠. 저는 이게 도마뱀 꼬리 자르기란 생각이 드는 겁니다. 자기네가 봐서도 좀 심하다 싶은 건 거리낌없이 비난하고, 그리고 그냥 계속 하던 대로 살면 되니까요.
이런 일이 있으면 분노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게 시스템을 바꾸는 여성 운동, 그리고 총체적인 자기 반성으로 이어지는 일이 따라오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네요.
5. 그러고 보니 티비에서 본 어린이 학대에 관련된 The NSPCC (Nation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Children)의 공익광고 하나가 생각납니다. '복화술사'란 제목이었죠. 7,8살 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일상을 보여주는데, 주인공은 슬픈 얼굴을 한 여자애 인형입니다. 그리고 얘 옆엔 남자 어른이 하나 딱 붙어 앉아 조종을 하고 있죠. 반 아이들은 말도 잘 못하고 혼자 노는 인형 아이를 놀려댑니다. 엄마는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아이한테 괜찮냐고 묻고, 인형은 남자 어른 목소리로 'I'm fine'하고 대답하죠. 분위기가 꽤 섬뜩한데, 학대받은 어린이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Abused children can't speak up) 메시지가 맨 나중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