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인 짝사랑에 빠진 남자 이야기

  • dmajor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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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는...

서현이를 소개하면 새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에 태어난 아가씨입니다. 소시적에 '1999년생'이라는 SF순정만화를 재미있게 읽었었습니다만, 실제로는 1999년생이라고 해서 초능력자인 돌연변이가 많다던지 하지는 않더군요. 서현이는 아빠를 닮아서 운동신경 제로에 겁도 많습니다.


다만, 엄마와 외할머니가 열심히 말을 걸고 동화책도 읽어 준 덕에 말은 아주 빠른 편이었고 표현력도 좋은 편입니다. 기저귀를 차던 시절 맨처음 좋아한 노래가 핑클의 ''Now"여서 저희 부부는 차를 운전할 때마다 서현이가 "와오 틀어줘"하면 "came into my life(yeh~), make me fly again(yeh~), 늘 바래왔던 상상처럼, 와-오"를 백만번씩 들어야 했습니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진다는 시몬느 보봐르의 말이 무색해질 만큼 서현이는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키우려는 엄마아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위 여성적인 것에 주로 관심을 보이는 편입니다. 바비인형, 공주님이 나오는 동화, 예쁜 옷, 치마, 소꼽놀이 등등...

남자친구가 한둘이 아닌 것 같은데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냉정한 아가씨입니다.



2. 거짓말

서현이가 기저귀를 떼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게 되고 난 이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맘때쯤 서현이는 밤에 재우려고 하면 더 놀고 싶어서 칭얼거리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밤 10시가 되고 11시가 되도록 잠은 안 자고 뒤척거리다가 갑자기 똥이 마렵다고 하고는 변기(어른 양변기에 애들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든 애들용 변기뚜껑을 올려 놓고 앉혀 놓았었습니다)에 앉아 30분이고 1시간이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딴청을 부리다가는 한참 후에 "똥 안 쌀래"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서현이가 잠자기 싫으니까 자꾸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짜증도 많이 났죠.


그러던 어느날 밤 서현이는 또 똥이 마렵다며 칭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동안 애를 재우려 애쓰느라 짜증이 많이 난 엄마 대신 제가 서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서 안아서 변기에 앉혔습니다. 그리고는 서현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 없이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고, 서현이는 노래만 흥얼거리며 발을 동동거리고 놀고만 있는 듯했습니다.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저는 점점 지치고 짜증나기 시작해서 자꾸만 서현이를 채근했습니다. "이제 똥 나올 것 같아?""아~니""그럼 들어가서 코- 잘까?""싫어"...


.....어언 1시간이 되어갈 즈음 제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서현아. 이제 자자" "싫어! 아빠, 나 똥 매렵단 말야!!" "그러지 말고 우리 자고 내일 놀자." "싫어, 안 잘꺼야." .....
결국 "똥 마려우면 여기서 너 혼자 싸!" 저는 서현이를 안아서 화장실 타일 바닥에 내려 놓은 채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내심 서현이가 왜 이리 고집이 셀까.. 생각하며 화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애들은 다 자기 싫어하기 마련인데 괜히 화를 낸 것 같아 후회가 되어서 화장실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아... 글쎄 서현이는 화장실 타일 바닥 위에서 엉덩이를 내밀고 힘이 들어 바들바들 떨리는 두 다리로 엉거주춤하게 선 채 그 조그만 이마를 한껏 찡그리고 힘을 주고 있었고, 서현이의 엉덩이에는 딱딱한 고구마같은 똥 덩어리가 매달린 채 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전, 그 순간 미친사람 마냥 달려가 서현이를 꼭 껴안고 서현이 배를,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쓸어 주면서 자꾸만 되뇌었습니다. "서현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미안해. 우리 서현이 힘들었지..." 눈에선 주책 없이 자꾸만 눈물이 흘렀습니다.


겨우 똥덩어리가 떨어지자 비로소 서현이는 찡그린 얼굴을 펴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활짝 웃었습니다. 아빠가 왜 애기처럼 울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갸우뚱거리는 것 같더군요.
"아빠, 고구마 똥이다. 토끼 똥 아니고. 그치?"


.....바보천치 아빠는 서현이가 아직 거짓말이라는 것 자체를 할 줄도 모르는 나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인지능력 발달단계에서 커다란 도약일 것입니다. 어려운 어른들 말로 세계를 대자적(對自的)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는 때에서야 사실을 재구성하여 거짓말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습니다. 전 그날 밤 마음 먹었습니다. 평생 다시는 서현이 말을 의심하지 말아야지.... 서현이가 말하는 것은 말하는 그대로 다 믿어 주어야지.


그 후 서현이는 두 돌이 지나고, 세 돌이 지나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에 투영-또 재미 없는 어른들 말로-할 줄도 알게 되어, "아빠, 나 이제 서현이 아니야. 나 예린이 누나야. 예린이 누나라고 불러. 그리고 나 다섯 살 아니고 일곱 살이야"라며 제가 작명법 책 3회독 끝에 끙끙대며 지은 상서로울 서, 햇발 현 두 글자를 부정하곤 합니다만, 그래도 아직 서현이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 없습니다. 평생 한 번도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저한테만은요.



3. 다녀오세요.


서현이는 도도한 공주님입니다. 그런 공주님께 엄마가 아빠 출근할 때는 예쁘게 허리를 굽히고 "아빠, 다녀오세요." 인사하도록 열심히 가르쳤지만, 공주님은 '방귀대장 뿡뿡이' 보시느라 바쁠 때에는 나가는 아빠를 거들떠 보지도 않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엄마와 출근길의 아빠는 무엇이었는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즈음 몇 가지 사소하게 서운한 것이 있었는데 말 안하고 참고 있었던 밴댕이속 아빠는 평소답지 않게 위대한 대한민국의 가부장인 양 폼을 잡으며 화를 내 버렸습니다. ....


사실 엄마와 아빠는 서현이를 낳기 전 굳게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로 다투더라도 절대로 아이들 앞에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지 말자. 정 싸울 일이 있으면 애들 다 재우고 다른 방에 가서 싸우자 였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평소 이른 치매증세(?)로 인하여 엄마한테 핀잔만 받던 처지를 벗어날 꼬투리라도 잡은 양 약속은 깔아 뭉갠 채 군기라도 잡으려는 듯이 소리를 고래고래 쳤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서현이에게는 그것은 서현이의 작은 세계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서로 부딪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위의 약속이 그날 전까지는 잘 지켜지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아빠는 약삭빠르게도 서현이를 야단치는 악역은 다 엄마한테 떠넘기고 좋은 역만 하고 있었기에 서현이는 아빠가 화를 내며 소리치는 모습 자체를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현이는 자기나름의 방법으로 충격에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의 서현이는 "아빠, 아빠.." 그러더니 아빠를 마구 문쪽으로 밀어 내면서 허리를 연신 꾸벅 숙이며 "다녀 오세요" "다녀 오세요"를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서현이는 엄마 아빠를 나름대로 뜯어 말리고 싶었던 걸까요? 아빠가 몬스터같이 무서워서 빨리 내보내버리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평소와 아무 다름 없는 아침인 양 현실도피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Whatever, 아빠는 엄마와의 약속도 못 지킨 주제에 또 서현이한테 사과할 일, 그리고 자기자신과 약속할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4. 열경기

환절기마다 감기에 잘 걸리는 서현이가 또 감기인지 온 몸이 따끈따끈했습니다. 열이 39도를 넘어가기에 홀랑 벗겨놓고 물찜질을 하고 해열제를 먹이고 했지만 열이 잘 내리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에야 열이 좀 내렸기에 엄마가 안방에서 재워 놓았습니다. 그새 아빠는 한숨 돌리고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엄마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빠를 찾았습니다. "오빠, 서현이가 이상해. 어떡하지?" 벌써 엄마의 큰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혼비백산한 모습이었습니다. 애가 눈에 촛점이 없고 말을 아무리 시켜도 말을 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저 역시 겁이 덜컥 났지만 워낙 애엄마가 혼이 나갈 정도로 겁에 질려 있기에 침착해야 한다고 이를 악물고 최선의 대처방법이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우선 저는 이비인후과 의사인 친구에게, 아내는 소아과 의사이신 서현이 외숙모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고 체온을 다시 재보니 무려 40도를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먹여놓은 해열제도 아무 효과가 없었고, 고열이 지속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했습니다(심각할 경우 뇌신경에 장애를 야기할 수 있고, 귀가 멀 수도 있다죠).


무조건 아이를 안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응급실 의사선생님은 경과를 물으시더니 39도, 40도 고열이 30분 이상 계속되고 있다는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평정을 잃고 있는 저희 부부를 배려하셔서 말을 아끼시고 있었지만, 안 좋은 결과가 이미 발생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까지 감출 수 있을 만큼 연기력이 뛰어나지는 못하셨습니다.


서현이는 여전히 그 큰 눈망울에 총기를 잃은 채 인형처럼 멍하고만 있었습니다. 귀에 대고 소리를 질러도 반응이 없고, 들리지 않는 듯 했고, 몸을 마사지하고, 꼬집고 때려도 아무 반응이 없이 가끔 목이 타는 듯 입맛만 다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내 앞에서 겉으론 침착하게 굴고 있었지만 그런 서현이의 모습을 보며 저 역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습니다. 머리 속에 온갖 망상이 오가지만 애써 안 좋은 가능성은 모두 무시하려 자기암시를 걸었습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별 거 아닐거야.


병원에서의 처치방법도 물찜질일 뿐이더군요. 서현이 옷을 모두 벗기고 더운 물로 온몸을 열이 내려갈 때까지 계속 찜질하게 했습니다.(혹시라도 저희처럼 무지한 채로 아이의 열경기를 경험하게 되는 분들께 조언드립니다. 아이의 눈이 풀린 모습이 너무나 두렵겠지만 침착하게 아이의 열이 내릴때까지 더운 물로 물찜질을 하는게 우선입니다. 고열인 상태로 병원으로 이동하는 시간의 지체 자체가 아이에게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저희는 1초라도 쉬면 큰 일이라도 날 것 같아 떨리는 손으로 수건을 쥐어짜며 서현이 온몸을 끝도 없이 닦고 또 닦았습니다.


저는 사실 한 번도 신앙을 가져 본 일이 없습니다. 사춘기에는 제법 무신론자연하기도 했습니다. 신이란
나약한 존재인 인간들이 도피할 곳을 찾아 만든 우상들일 뿐이야.. 어쩌구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저는 너무나 상투적인 스토리지만, 누구일지 모를 절대자에게 하염 없이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서현이에게 아무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제 손바닥이 한 뼘이라도 더 서현이 몸에 밀착되어야 저의 어떤 작은 힘이라도 서현이에게 전달될까봐 서현이의 온몸을 주무르고 또 주물렀습니다.


열은 오래 지나지 않아 내려갔지만, 서현이는 상당히 오랜시간 동안 여전히 혼자만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불안에 떠는 저희들은 바쁘신 의사선생님을 붙잡고 몇번이고 몇번이고 어떻게 된 것인지 되물었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은 열이 내렸으니 이제 별 일 없을 것이다. 열이 내려도 지금까지 상당시간 이런 고열을 앓은 것 자체가 아이에게는 마라톤을 뛴 것 이상으로 엄청나게 힘들고 지치는 일이다. 지금 아이는 너무나 지쳐 있을 뿐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푹 자게 해라 였습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난 서현이는 거짓말처럼 눈을 깜박이며 엄마, 아빠를 찾았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서현이가 태어난 순간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호두껍질 속 엄지공주의 세계같은 혼자만의 세계에서 걸어나와 엄마아빠에게 돌아와 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후유증도 없이 말짱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열경기에 대해 미리 사전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응급실에까지 오지도 않고 집에서 미리 그런 고열상태가 지속되지 않게 밤을 새면서라도 물찜질을 했을텐데...


서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제 머리속에 떠오른 유명한 불교우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옛날 인도의 한 임금님이 사냥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임금님은 숲으로 사냥을 갔는데 예쁜 아기사슴을 발견하고는 활을 쏴서 명중시켰습니다. 그런데 활을 맞지도 않은 어미사슴이 죽은 아기사슴 옆에서 슬피 울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어 버렸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임금님은 부하를 시켜 어미사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조각조각 잘라져 있었습니다. 이후, 임금님은 모녀 사슴을 고이 묻어주고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위 단장(斷腸)의 슬픔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우화입니다. 저는 이 우화를 초등학교 때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뜻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그 날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5. p.s.

주절주절 주책없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별 이야기를 다 쓰고 말았습니다.


글머리에 절망적인 짝사랑에 빠진 남자 이야기라고 썼었는데, 글을 쓰다보니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서현이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항상 엄마아빠에게 넘치는 사랑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구요. 부모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둥, 자식은 평생 부모 은혜를 다 갚지 못한다는 둥 하는 말들은 다 엉터리입니다.

이미 넘치도록 받았는 걸요.


오히려 게으르고 바보같고 이기적인 아빠가 자꾸만 서현이에게 미안해야 할 일을 하곤 할 뿐이죠. 서현이는 언제나 아빠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 늦기만 하고요.


그래도 궁한 변명이라도 해 둡니다. 아빠가 열심히 일해서 서현이가 앞으로 살아갈 이 세상이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살기 좋아질 수 있다면, 게으른 아빠지만 열심히 일할께. 약속을 아주 잘 지키지는 못하는 아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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