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샤인, 말아톤, 대장금 재방영 잡담

  • 핀체튼
  •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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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샤인]을 봤는데 예상했던 대로, 미니시리즈로 만들었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냉정하게 말해서 제게 이 영화는 이스트반 자보가 레이프 파인즈에게 바치는 러브레터처럼 보였습니다. 이 배우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모럴 딜레마에 빠진 고상한 귀족 남자의 장엄한 몰락 과정이 세 시간 러닝타임 내내 화려하게 펼쳐지거든요. 게다가 파인즈는 여기서 무려 3대에 걸친 아버지와 아들을 연기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금지된 욕망을 쫓으며 서서히 드러나는 위선, 자기기만, 약속된 수치심, 거기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상실과 패배에 대한 두려움, 공포가 화려한 장식의 레이스처럼 주렁주렁 달려 스크린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어요. 이 사람의 팬이시라면 정말 엄청나게 황홀한 세 시간을 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계 대전을 축으로 한 20세기 유럽의 정치적 격변사는 조넨샤인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 행한 끊임없는 용인과 타협, 위선과 기만의 역사와 맞물려 있는데, 닐 조던이 [애수]에서 그랬듯, 이스트반 자보 역시 이 거대한 멜러드라마를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이야기 구조 속에 부벼 넣고, 지나치게 속도감 있는 전개로 밀어 부치다보니 '어려운 이름을 가진' 그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단순한 기능과 부족한 대사를 가진 일차원적 캐릭터로 머물게하고 만데다가, 나중에 가서는 이야기 진행 자체에도 무신경해지는 것 같더군요. 그래도 힘있는 어조에 화려한 장식을 가진 장엄한 멜러드라마의 매력은 유지하고 있는 편이라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지만. 그러고보면 차라리 웨스트엔드 무대에 레이프 파인즈의 일인극 모노드라마로 올렸어도 좋을 것 같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여전히 놀라울 수 있다면, 제니퍼 일리와 로즈마리 해리스가 함께 연기한 발레리 조넨샤인이라는 캐릭터 때문일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발레리 조넨샤인을 연기한 그 두 모녀 배우 때문이겠지요. 사실, [선샤인]의 심장(heart)은 이 두 사람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거에요. 통속적인 대하 멜러드라마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절대 감상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그 태생적 우아함을 햇살처럼 강렬하게 뿜어대고 있는 이들 모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조넨샤인' 가문의 진정한 몰락은 이 사람들이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의 죽음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고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말아톤]에서 극중 조승우가 연기한 자폐아의 이름은 '윤초원'입니다. 오늘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왕꽃선녀님]에서 무속인으로 나오는 주인공 여성(이다해) 캐릭터의 극중 이름이더군요. :-| 뭐 그냥 재미있는 우연일테고, 그 영화에서 조승우의 이름이 '초원'인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 별 문제될 건 없겠죠. 제가 읽은 시나리오가 최종본인지는 모르겠는데 우선 든 생각은, 마라톤을 하는 자폐아와 아들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엄마에 관해서 대단히 새롭다거나 흥미로운 전개를 보여주거나 하고 있지는 않지만, 보편적인 의미에서 굉장히 잘 쓰여졌고, 강렬한 정서적 힘이 넘치는 좋은 이야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자폐아 가족에 대한 묘사가 스테레오타입의 의심에서 이만큼 벗어나 있진 않아도 그 사람들의 감정들은 여전히 진실해 보이기 때문에 별로 트집잡고 싶진 않았고요. 여기서 김미숙, 조승우 커플은 거의 이상적으로 캐스팅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고보니 두 사람이 닮기도 닮았어요.






어제부터 MBC드라마넷에서 [대장금] 재방영을 시작했습니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 오전/오후 11시에 방영하는 모양이에요. 덕분에 실제 방영시 놓쳤던 1, 2회를 어제오늘 챙겨봤습니다. 어둡고 잔인한 음모와 계략, 거창하고 장엄한 복수와 성공의 드라마를 완벽하게 예고하며 마무리짓는 오늘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디킨즈가 봤어도 흥미로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일부턴 홀홀단신 남겨진 어린 장금의 궁궐입성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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