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간의 숙취를 제외하곤 무사히 연말연시를 넘겼군요. 너무 큰 재난이 일어나서 연말연시 행사론 쯔나미 피해자 돕기가 제일 두드러진 것 같아요. 심지어 뮤직 채널에선 오지와 샤론 오스본이 나와서 모금을 호소하더군요.
12월 31에 런던 시내에 갔었는데, 레스터 스퀘어 한 복판에서 백파이프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킬트를 입고 전통 복장을 한 블랙워치 악대가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모두 얼굴이 가무잡잡한 인도 계열들이었습니다. 그 주변에선 역시나 인도계열 사람들이 동전을 짤랑 거리면서 해일 피해자 돕기 모금을 하고 있었구요.
그쪽 이민자들 사이에선 정말 열렬히 구호와 모금 활동을 하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스리랑카 출신 이민자들 중엔 일가친척 50명을 모두 잃은 사람도 있다는군요. 하지만 꼭 이민자들이 아니더라도 영국 대중들은 현재까지 7천 6백만 파운드를 민간차원에서 모아주었습니다. 현재도 모금은 계속되고 있고, 길거리 헌금이나 우편으로 돈을 보낸 사람들, 자잘한 자선단체 기부는 제외한 액수라서 실제론 더 될겁니다. 이 추세로 가면 민간에서만 1억 파운드(약 2천억원)까지 모일 것 같다고 하네요. 영국 정부는 5천만 파운드를 지원하기로 했고요.
비비씨 보도를 보니까 한국정부도 5천만 달러를 보내기로 했다면서요? 보니까 잘 사는 나라들 중엔 일본이 제일 많이 내 놓았더군요.
http://news.bbc.co.uk/1/hi/world/asia-pacific/4145259.stm
2. 범죄조직에선 재난을 틈타 한 몫을 잡으려고 한다는데, 고아가 된 피해지역 아이들을 인신매매하는 인간들도 있다더군요....참 인간들 가지가지에요. 그리고 이 틈에 다시 태국 등지로 놀러가는 간 크고 약삭빠른 사람들도 있구요. 여러모로 싸고 한적한 걸 즐기러 가는 모양인데, 게다 여행가는게 재난 당한 국가들을 돕는 거라는 소리까지. 그저 올해 만이라도 그 돈으로 그냥 성금이나 보내는 게 어떨지.
3. 친구네와 그 집 꼬마들과 함께 1월 1일엔 '마더 구스' 판토를 보러갔습니다. 늘 그렇듯이 요란하고 재밌는 악마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착한 요정이 등장하고, 주인공 잭은 여자 배우가, 여주인공인 마더 구스는 면도자죽이 시퍼렇고 몸집이 큰 아저씨가 맡아 노래와 춤으로 유치한 즐거움을 주었죠. 애들은 정말 좋아하더군요.
4. 지난 몇 주에 걸쳐 비비씨 디지털 채널에서 데니스 포터(Dennis Potter) 특집을 보내주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티비 미니시리즈를 썼던 작가인데, 티비가 이렇게 날카롭고 깊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더군요. 이사람의 작품은 어둡고, 영리하며 기괴하고 우울한 이야기가 많은데, The Singing Detective, Pennies from Heaven에선 이런 이야기들이 가장 얄팍하고 대중적인 음악들과 립싱크로 결합한 게 특징입니다. 봅 호스킨스가 너무나 현실적이고 가장 진부해 보이는 침실에서 파자마를 입은채 갑자기 30년대 여자 가수 노래에 립싱크를 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세요.
Pennies from Heaven
http://www.bfi.org.uk/features/tv/100/list/prog.php3?id=21
마이클 갬본 주연의 Singing Detective도 대단하지만 저는 Brimstone and Treacle을 보고 그 촌스런 70년대식 카메라 트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을 뒤흔들어 놓도록 불편하게 하는 어둡기 짝이 없는 코메디에 매료되었습니다. 마이클 키친을 비롯한 배우들도 정말 대단하구요. 대사는 날카롭고 인물은 깊이가 있습니다. 드라마는 키에르케고르의 말로 시작합니다. 'There resides infinitely more good in the demonic than in the trivial man.'
교통사고로 뇌손상을 입은 딸과 그 부모가 사는 집에 악마가 나타나서 온갖 달콤한 말로 부모의 신뢰를 얻은 후에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을 하얗게 뜨고 침을 흘려대는 딸을 강간하는 얘기라니. (Talk to Her 생각이 났어요.) 근데 이 악마는 매우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붙임성 좋은 젊은이에다 교양이 넘치고, 심지어 기독교적인 기도도 잘 지껄이거든요. 악의 유혹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에 대한 에세이같은 이 드라마는 깊숙히 반역적입니다. 사람들이 견고하다고 믿고 있는 도덕률을 마구 흔들어대죠. 70년대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비비씨에서 11년동안 방송 금지를 당했다가 87년에야 방영이 되었답니다.
데니스 포터의 작품은 헐리우드로 건너가 영화화 되었는데, 별로 성공하진 못한 모양입니다. 1935년생인 어둡고 좀 억눌린 영국 남자의 상상력은 대중적으로 사랑받기엔 괴상하고 침침하긴 하죠.
이사람의 7,80년대 작품엔 제가 중년이나 노년의 얼굴로만 알고 있던 배우들의 젊고 팽팽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봅 호스킨스나 이안 홈, 마이클 키친, 마이클 갬본이 주름이 없던 시절에도 대단히 연기를 깊이 있게 잘 했다는 걸 보았죠.
5. '티핑 더 벨벳'을 디비디로 다시 봤습니다. 역시 유쾌해요. 저는 장미꽃이 날아다니고 딜도가 등장하는 1,2부가, 낸이 착하지만 좀 칙칙한 사회주의자들 틈에서 현실적으로 성장하는 3부보다 훨씬 재밌습니다. 시각적으로도 예쁜데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요란해서요. 볼수록 낸은 꽤나 뻔뻔한 인물입니다. 정말 끝내주게 실컷 놀다 갈 데 없으니까 플로렌스네 밀고 들어와서 눌러앉는 걸 보세요. 얼굴가죽이 보통 두꺼운 게 아닙니다.
6. 콩나물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7. 에릭 로메르의 '영국 여인과 공작' 파웰/프레스버거의 '분홍신'을 도서관에서 빌려왔습니다. 주말에 보려고 놓아두었지만 기대감에 흐뭇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