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멜론 우먼'을 디비디로 봤습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만든 티가 팍팍 나지만 영화로선 '고 피시'보다 훨씬 잘 만들었던데요.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면서 감독을 꿈꾸는 흑인 레즈비언 셰릴이 자기 얘기를 하면서 영화 속의 영화로 가짜 30년대 흑인 여배우를 등장시켜 현재와 과거를 엮은 것도 좋았구요. 여전히 심각한 인종과 섹슈엘리티의 문제를 다루면서 칙칙하지 않고 상큼한 코메디를 만들어낸 작가/감독 셰릴 더니의 재능과 에너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근사한 다리와 영리하고도 선한 눈매도요. 워터멜론 우먼은 잘 만든 초저예산 영화가 얼마나 재밌고 신선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죠.
기네비아 터너는 여기서 '고 피시'보다 베드신이 더 과감해졌더군요. 이사람은 귀여우면서 살짝 얄미운 인상을 주는데, 얄궂게 올라간 입꼬리와 약간의 조소로 반짝거리는 눈 때문인 것 같아요. 듀나님이
리뷰에서 '고 피시'에서 일라이로 나왔던 브로디가 정말 노래 못부른다고 하셨는데, 과연 끝내주게 못 부르더군요. 하지만 그 다음에 나선 셰릴의 그날 데이트 상대는 정말 괴로운 지경이었습니다. 화면 없이 소리만 들으면 사랑니 뽑을 때 지르는 비명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중간 중간 다큐멘타리인 척하면서 '워터멜론 우먼이 누군지 아느냐'고 길거리 인터뷰를 하는 장면의 갖가지 대답들도 꽤 재밌었고, 카밀 파글리아가 카메오로 나와 자기 패로디를 하면서 매미와 자기 할머니, 수박에 대해 떠드는 장면에선 낄낄 웃게 되더군요. 파글리아는 항상 하이 볼티지로 충전되어 있는 것 같아요. 헛소리와 그럴듯한 소리를 막 섞어서 오바로 수다를 떨어대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매미를 풍부하고 생명 넘치는 여성성의 상징, 자기 생각을 말하는 열혈의 살아있는 인물로 봐야한다고 하면서 자기 할머니가 평생 부엌을 떠나지 않았지만 대단히 강력하고 개성있는 인물이었다는 거에요. 수박이 이탤리 국기 색깔이고, 자기 할머니도 이탈리아 사람이고, 기타등등 기타등등.
이 가짜 인터뷰는 자기가 자길 약간 조롱한 농담이긴 하지만, 소위 '포스트' 페미니즘의 맛보기도 약간 있습니다. 가부장과 성계급에 기초한 억압의 구조를 인식하고 세상을 많이 바꾸어 놓은, 안티 도메스틱, 안티맨 경향을 보인 2세대 페미니즘이 놓친 부분을 짚어주는 거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매미가 노예이며 뚱뚱한 흑인 여자 배우가 뚱뚱한 흑인 하녀로 타입카스트된 걸 빼고 보면 파글리아의 풍성한 여성성에 대한 축복이 매우 말이 됩니다. 그리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허리를 17인치로 조여대면서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 노릇을 해 주는 백인 상류층 여자하고, 먹을 거 다 먹고 할 말 다 하고 자기 노동으로 사는 흑인 노예 여자하고, 대체 누가 더 노예적인 삶인지 따지고 보면 모호하기도 하지요.
문제는 이 입장이 2세대 페미니즘의 어깨에 서 있으면서도 그 유산을 부정하는데 있겠죠. 그럼으로써 탈정치화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탈정치화 경향은 보수역류의 시기와 맞아떨어져 결과적으론 대단히 정치적으로 무심하거나 보수적인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누구 말 마따나 '남자한테 설겆이 못시켜서 환장한' 여자들이(신통찮게 생긴 프랑스 남자인 우엘벡, 시키는대로 설겆이 다 하고도 모로코 남자한테 여자를 빼앗긴게 되게 분했나봐요.) 여자를 가부장의 피억압자, 희생자로만 보는 분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사노동의 축복, 미시권력 관계의 전복적 측면을 강조한 건 좋은데, 한발만 잘못 디뎌도 건전한 가부장의 현모양처 예찬으로 돌아가는 것도 시간문제거든요. 촌스런 2세대 페미니즘 얘기만 하는 것보다야 포스트 페미니즘적인 발랄하고 세련된 이론을 펼치는 건 훨씬 재밌긴 해요. 근데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세상의 여자들이 아직 페미니즘의 성과를 밟고 서서 포스트 입장에서 놀려먹고 놀 처지가 못되는게 안타깝죠.
전에 명예살인에 대한 코멘트에서 어떤 분이 아랍권의 가부장은 강하지 않다, 여자들 목소리와 권한이 크다고 하셨죠. 저는 그게 가부장이 강하지 않다는 증거가 아니라 공/사적 영역의 철저한 분리와 여성을 오로지 사적 영역에 제한한 결과라고, 결혼해서 아들 낳은 여자들 목소리는 크다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구조적인 측면을 전제로 한다면 강한 아랍 여자들에 대한 코멘트의 관찰은 아주 적합한 것이기도 합니다. 강력한 엄마들 덕에 그 동네를 비롯한 가부장제 강한 곳엔 어김없이 마마보이들이 드글거리지요. 가부장제를 단순한 억압/피억압으로만 보면 정말 놓치는게 많을 겁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심한 제약 속에 여자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 인생을 만들고 살아남은 생존자이기도 하죠. 똑같은 인간인데 여자라고 개인적 잠재력을 펼칠 기회를 박탈 당하면, 그런 역경 속에서 생존하는데 어떻게 안 강해질 수가 있겠어요. 구조적인 제약을 그냥 어쩔수 없어 짜증나는 어떤 장애물 정도로 그대로 두고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한 사람들이니까요. 몇 분 나오는 카메오인 파글리아에 대한 언급이 너무 길어졌군요....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30년대 별로 안 유명한 흑인 여배우의 발자취를 추적함과 동시에 현재를 사는 흑인 감독 지망생의 셰릴의 삶에서 부딪치는 인종간 편견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흑인이고 백인이고간에 미스테리의 워터멜론 우먼 페이 리처즈에 관련된 사람들은 다들 인종간 레즈비언 관계를 펄펄 뛰며 부정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페이를 알던 흑인들은 그사람의 백인 여자감독과의 관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셰릴의 흑인 레즈비언 친구 타마라는 셰릴이 백인 중산층 다이아나(터너)와 사귀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보이죠. 니 피부색이 부끄러운 거야? 백인이 되고 싶어? 라면서요. 셰릴은 내가 누구랑 놀던 그게 대체 누가 상관할 일이냐고 대꾸하지요.
제약을 넘어서 자기 자신 이고 싶은 사람들은, 여자건 남자건, 어느 인종이던, 동성애던 이성애던 이 영화를 박하사탕처럼 싸하게 즐기실 수 있을 거에요. 그만큼 워터멜론 우먼은 보편적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디비디 표지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The sort of film Spike Lee would make if he were both smarter and a dyke.'
* 제가 본 디비디엔 예고편 중에 미샤 바튼이 나오는 'Lost and Delirious'가 있더군요. 미샤 바튼은 예쁘긴 한데, 뭘 봐도 식스 센스의 토하는 여자애 유령 얼굴이 자꾸 겹쳐서 감상에 방해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