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작가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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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을 위하여 추천 4
by 산하 | 2005-01-29 오전 11:08:41

언젠가 한 작가가 아래 사진을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적이 있습니다. "2002, 리얼코리아"라고 쓰여 있죠? 이 사진을 보고 문득 '영감'이 치밀어 사무실 칠판에 노래 가사를 프린트해 붙여 놓은 적이 있습니다. 제목은 "리얼코리아 작가들에게 바침" 이었죠. 노찾사의 '사계' (거북이의 사계 아닙니다)를 노가바한 것이었는데....


빨간꽃 노란꽃 꽃밭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여의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방송은 돌아오네 돌아오네


섭외에 촬영에 가끔가다 특집에
에어콘도 꺼져버린 뜨거운 여름
소금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방송은 돌아오네 돌아오네


8층엔 모니터가 밝게 빛나고~~~~오~~~ (우리 사무실 8층)


찬바람 소슬바람 산너머 부는 바람
간밤에 나레이션 몇 장 적어 날리고
아이템 찾을 일이 쌓이고 또 쌓여도
방송은 돌아오네 돌아오네


흰눈이 온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오늘 촬영 빵꾸날까 새하얀 얼굴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방송은 돌아오네 돌아오네


'방송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에겐 시덥잖은 내용일 겝니다만 작가들 중 어떤 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까지 맞아맞아.. 이 가사를 읊었답니다. 1주일이 하루처럼 지나가는 데일리 프로그램의 칼날같은 스케줄, 밤 새서 나레이션 적어 날리고 나면 다른 PD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타나 내일 촬영 아이템 달라고 손 벌리는 뭐같은 상황의 연속, 촬영 겨우 보내 놓으면 아이템이 허접하다, 출연자 섭외를 어떻게 한 거냐는 전화 올까 핸드폰 들기가 두렵고, 갔다 와서는 우두커니 PD 편집 끝나기만 기다리며 시계 보는 일도 무섭습니다.

방송이 좋아 방송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프리랜서라는 허울좋은 타이틀을 근거로, 그녀들(대부분 여자이므로)은 살인적인 노동량과 CP (책임 PD)의 말 한 마디에 노트북 걷고 사물 챙겨 사무실에서 철수해야 하는 불안한 처지를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아닌 경우도 가끔은 있습니다만) 실제로 모방송사에선 작가 한 명이 과로로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던 일도 있다지요.


4년간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던 프로그램 '리얼코리아'를 떠나 새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기존 프로그램의 종료와 새 프로그램의 런칭 사이에는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어느 주말 저녁, 모처럼 처남 집에 놀러가서 처남이랑 술 한 잔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낯익은 핸드폰 번호, 작가의 것이었습니다. 주말 저녁, 날 찾을 일 없는 작가의 전화라...... 약간은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뜻밖에도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나온 것은 괴이한 여곡성이었습니다.



흑흑.. 으흑흑흑... 어흐흑... 가는 귀가 조금 먼 편이라 평소 수화기 볼륨을 있는대로 높여 두고 있는 터라, 그 여곡성은 그대로 아내와 처남 귀에까지 흘러들어가고,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의아반 의심반 눈꼬리가 올라갑니다.



아냐 아냐.. 손사래를 치면서 제가 화급히 캐묻습니다. 미진 미진 무슨 일이야? 말을 해 봐.. 울지 말고! 무슨 일이야?
울음을 그치지 않던 작가 미진은 급기야 내가 무슨 일이냐니까 하는 짜증섞인 질문을 던지고서야 아닌밤중 처녀 울음의 연유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선배..... 나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리얼코리아 끝나면?"



이 한마디로 저는 단박에 그녀가 서러운 이유를 알아 버렸습니다. 그녀는 얼마 전 기존의 작가 하나가 그만둔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른 프로그램에 있던 것을 제가 강권하다시피 끌고 온 사람입니다. 물론 자기도 싫은데 오진 않았습니다만.



그런데 리얼코리아라는 프로그램이 종료되고 새 프로그램이 기획되는 단계에서 몇 명의 작가들은 순조로이 위치이동되는 반면, 그녀는 배제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역량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팀장의 판단 때문이었죠. 즉, 그녀는 리얼코리아라는 프로그램이 끝나면 자동적으로 '아웃'되게 된 겁니다.



문제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는 데 있었습니다. 뚜렷한 언질을 주지 않은채 일단 유야무야 넘어가다가 가능한 나중에 그 사실을 밝히자는 것이 팀장의 생각이었죠. 어쨌건 리얼코리아가 막을 내리기 전까지는 작가가 필요한 것이고, 괜히 미리 알려 줬다가 제 살길 찾겠다고 휙 떠나 버리면 한 두달 땜빵을 어디서 구하겠느냐는 것이었죠.



처음에 저는 반발했습니다. 이른바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말이죠. 지금은 우리가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고, 프로그램 개편 다 끝날 시점에 밝히면 그때 작가 미진은 낙동강 오리알 될 거 아니냐고..... 그걸 어찌 손놓고 보겠느냐고 항변을 했지만, 팀장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그럼 니가 한 달만 딱 하고 그만 둘 작가 구해 와 봐."


입 다물고 시무룩하게 앉은 제게 팀장은 계속 쏘아부칩니다.

"상도덕도 좋고 뭐도 좋은데..... PD는 프로그램을 생각해야 되는 거야. 나도 좋아서 그러겠니? 내가 미진이 물 먹일 일 있어? 걔 자르고 싶겠어? 아냐. 하지만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팀을 고려할 때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 그게 방송판이야. 짬밥 먹었으면 짬밥 값을 해라. 냉정한 거야. 미진이가 지금은 섭할지 몰라도 결국엔 이해하게 될 거야. "



저도 PD인지라 팀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압니다. PD들은 대개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기자들은 경쟁하면서도 지들끼리 뭉친다지만 PD들은 경쟁을 거치면서 수류탄 파편들이 됩니다. 자기 일하는데 티끌만한 누가 된다면 그거 피하려고 별별 수를 다 쓰는 쫌생이들이며 그 피해를 감수하기 싫어하는 겁쟁이들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자기 프로그램을 위해서 필요한 이들의 능력을 빼먹기 위해서는 간 쓸개에 십이지장까지 빼내줄 용의가 충만하지만, 프로그램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황당한 '안면몰수'도 감행하는 이들입니다. 결국 저도 PD였습니다.



저는 입을 다물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그녀를 대할 때 죄스러움에 코가 석 자 빠질 것이 걱정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넌지시 흘려 줬다가 벌어질 사태를 상상하기 싫었던 탓입니다. 즉 '프로그램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해 잠깐의 비겁함을 감수하기로 했고, 나 스스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로 최면을 걸기로 한 것입니다.



"선배.... 선배 원래 그러지 않았잖아. 작가들 편 들어 줬잖아. 전에 차장님 계실 때 차장님하고 싸우기도 했잖아."


미진의 울먹임이 계속됩니다.

1년쯤 전, 작가들이 작가료 문제를 제기할 때 차장님한테 "지금 이 돈 받고 일하는 작가 있으면 구해 와 보시라니까요."라며 언성을 조금 높인 적이 있었습니다. '싸웠다'는 건 턱없이 부끄러운 얘기고 나직한 항의 정도는 되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녀가 본 모습이었지만 그 직후에 저는 깨갱거리면서 퇴각했지요. 차장님이 이렇게 소리쳤거든요.


"새끼야 그럼 니 월급에서 까!"



작가들이 동시에 그만둘 수도 있다는 '집단행동설'이 나돌면서 저를 비롯한 PD들은 '개별 파괴 공작'에 들어갔습니다.


"아무개하고 당신이 상황이 같아? 괜히 들뜨지 말고 일해."
"아무개는 그냥 일하겠다고 하더만.. 당신들은 프리랜서잖아. 개인 플레이어라구. 무슨 노무 의리를 찾아?"



저의 속내야 분명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작가들에게 지급된 돈은 너무할 정도로 빈약한 액수였고 그를 호소하는 작가들에게 십분 공감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이익'을 위해서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그 이익들의 맨 아래에 깔려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내 이익을 위해서 저는 그 공감을 깔아뭉개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찝찝함을 잊을 자일리톨껌으로 역시 혼자만의 '명분'을 세워야 했지요.



"프로그램이 당장 개판 나면 어떡해.그건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우리가 사정이 이러저러해서 방송이 개판입니다. 시청자가 알아 주나?"



통화가 끝나고 몹시도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그녀에게 미안했고 1년 전의 작가들에게 면구스러웠습니다. 마음은 그랬습니다. 하지만 제 몸은 꿈에도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음을 재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체념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말은 쉬우나 발은 어렵다..... 옛날 어떤 선배가 했던 말입니다. 말 한 마디 내뱉기는 쉽지만 한 발 한 발 떼어 나가는 것은 어렵다는 뜻이겠지만 요즘 저는 그 말에 숨겨진 뜻 하나를 찾을 듯도 합니다. 때로 '말'은 왜 내가 발을 뗄 수가 없었는지까지도 편리하게,아주 쉽게 설명하거든요. 그래서 발 떼기를 더욱 어렵게 만들거든요.



일단은 그 생각부터 지워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행동은 정당했다." 미진을 만나서 최소한의 변명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거기서 한 마디라도 "그런데 말이야..."로 시작되는 말이 나온다면 이미 제 발모가지를 굵은 칡넝쿨로 칭칭 감고 있는 제 스스로의 모습을 감상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방송사 자회사의 미조직 노동자이나 그나마 정규직 노동자인 저는 저보다 처지가 나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매일같이 끼어 살고 있습니다. 제가 출근하는 방송사의 건물 벽에는 '산별노조 가입!'을 외치는 방송사 정규직 노조의 벽보가 주먹만한 글씨로 나붙어 있습니다. 그 얼마나 기다렸나~~ 하는 왕년의 노동해방가 가사도 보이고 산별노조 가입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외침도 들립니다. 저는 거기에 100% 동의합니다. 산별노조는 마땅히 건설되어야 할 일이며, 지금까지 멀쩡한 노조들이 왜 거기에 가입하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산별노조든 무엇이든, 그로 인해 열릴 새로운 시대를 만끽할 사람이 얼마나 많아질까를 생각하면 제 고개는 외로 꼬입니다. 방송사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을 때부터 비정규직 계약직의 활용을 즐겨 해 왔고, 프리랜서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 비정한 속내를 드러내는 데 아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방송사(社)만이 아니라 노(勞)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조가 강력하기로 소문난 모 방송사의 어떤 외주제작 PD는 그가 담당하는 외주제작사 PD들에게 삼진아웃제를 도입했다고 합니다. 즉 시청률이 세 번 이상 꼴찌를 하거나 자신의 기준미달이면 잘라 버리겠다는 것이지요. 그런 시스템으로 시청률이 잘 나와 준다면 그는 인사고과를 잘 받을 것이고 능력있는 외주담당 PD로 인정받을 테지요. 그런데 만약 그 방송사 사장이 3회 이상 시청률이 안나오는 PD는 무조건 퇴사하라는 식으로 나온다면 아마 그는 서슴지 않고 머리띠를 동여맬 겁니다. 비인간적 시청률 억압 철폐하라고 말이지요.


"대기업 임금이 올라야 그나마 노동자 평균 임금이 유지된다"는 말에 일부 공감합니다. 그리고 대기업 노조의 힘이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배들이 피와 땀으로 이룬 것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적으로 삼고 그들의 힘을 빼앗아 버리면 춤을 추면서 좋아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어설픈 지각이 환멸로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방송사 노조부터라도, '공정방송과 언론자유'같은 거창한 목표 외에 방송사내에 수없이 존재하는 비정규직, 계약직의 노고부터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사회적 약자라고는 부르기 어렵게 된 대기업 노조들 역시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무릇 성(城)이란 외부로부터의 방비용으로 지어지지만, 내부 과시와 통제용으로도 활용되는 법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백성들에게 그 성은 더 이상 고마운 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 자체로서의 기능도 상실하게 마련이지요. 기아자동차 박홍귀 노조위원장의 설명을 듣다가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4년 7월 단체협약을 체결하면서 공공연한 사실인 입사청탁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장기근속자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등의 조건을 명문화"했다는 겁니다. 이건 도대체 무슨 해괴한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작위같지도 않은 노동귀족의 작위마저 세습하겠다는 소리입니까. 장기근속자 자녀 우선 채용이 "입사 청탁 관행 근절"의 방안이라니오. 부정입학 방지를 위해서 교직원 자녀를 채용하겠다는 소리하고 똑같은 얘기 아닙니까. 이러고도 노동귀족 얘기 피해 갈 수 있겠습니까.


대기업 노동자들의 힘은 그들이 가졌지만 그들이 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난 세월 수십년 노동운동에 등골을 내놓았던 사람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며, 그들이 파업할 때 배를 곯으면서도 그 파업이 자신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속을 다독였던 이들의 한맺힘의 눈덩이입니다. "대기업 노조가 무력화하면 지금까지 쌓아오고 쟁취해 왔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다"는 말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그게 왕년의 '파이론' 즉 파이를 키워야 다 같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사기에 근접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아마도 저 뿐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진보'란 그래서 어려운가 봅니다. 백면서생부터 대통령까지 모든 사람에게 말입니다. 나귀 타면 말 타고 싶고,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고, 경마 잡히면 차양 드리우고 싶은데, 말 탄 뒤엔 나귀 생각 안나고, 경마 잡히면 어떻게 말을 혼자 탔는지 모르고, 차양을 드리운 다음엔 도대체 저 따가운 햇살 어떻게 맞고 다녔는지 까먹는 것이 사람이니 말입니다. 진보란, 결국 그를 깨우쳐 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와중의 행동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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