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동영상 몇 개, 몇가지 이야기.

  • 김영주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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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4/05 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여자 싱글 2위 김연아 규정 프로그램.

김연아양은 열 두살 때부터 봤는데요, 그때 이미 실전에서 트리플 러츠 콤비네이션 점프를

뛰었습니다. 출신 국가별로 베이직 마크가 달라지는 동네이다 보니 시작부터 참 불리한데,

기대 이상으로 좋은 데뷔를 했어요. 재미있는 건, 국내 언론에서는 예선전에 해당하는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 우승을 본선인 그랑프리 파이널 준우승보다 더 높게

치더라는거에요. 어찌나...

여자 선수들은 워낙 성장기를 지나봐야 알 수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이 정도 재능을 가진 소녀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기뻐요. 금메달 따오면 지원해줄게. 마인드의 국내 스포츠계에서

어떤 방해를 하던 간에-_- 잘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래 경기에서는 작은 실수들이 몇 번

있습니다만, 그래도 잘해줬어요. 평소에도 표정이 별로 없고 말 수 적은 소녀인데 이렇게 국제 대회

경험들을 쌓아가면서 관중들과 소통하는 것도 배워나가겠죠. 수학을 제일 좋아한다는데, 학교 공부도

계속 해나갈 수 있길. 연습 때문에 학교를 잘 못나가고, 친구들도 못만난다는 기사의 영문본을

해외 피겨 포럼 사람들이 돌려보면서 너무 슬픈 이야기라고 하는데 제가 다 부끄럽더군요. ㅠ.ㅠ




2. 04/05 유럽 선수권 여자 싱글 규정 프로그램 1위 이리나 슬루츠카야

사실 이리나 슬루츠카야는 미쉘 콴과 비교했을 때 완벽하게 깔끔한 경기를 하는 선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콴과 그녀가 다른 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라도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해나간다는 점이겠죠.

콴의 모토가 완전무결한 우아함이라면, 슬루츠카야는 스케일이 크고 박력이 넘칩니다. 그러면서도

애교가 있죠. : )

저는 두 선수를 다 좋아하는데, 콴을 여왕님으로 숭배;한다면, 슬루츠카야는 같은 여성으로서

자랑스럽고, 사랑합니다. 이 사람은 79년생이에요. 우리 나이로는 올해로 스물 여섯이죠.

상대적으로 나이에 대한 압박이 덜한 남자 선수들도 슬슬 은퇴를 고려하는 나이입니다. 게다가

결혼을 했고, 게다가 몇가지 심각한 지병에 시달렸습니다. 그중에는 이유를 찾지 못한 혈관

관련 질환도 있었고요. 지난 시즌 세계선수권에서 이 언니가 만약의 사태를 우려한 주치의의 참관 하에

경기를 마쳤을 때 피겨 팬들은 더 이상 이 사람의 모습을 링크 위에서 보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세계 정상급 대회에서는 못볼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정확하게 일년 후, 04/05 시즌 그랑프리 시리즈 중국 대회에서 이 사람은 반응 없기로 유명한

중국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면서 완벽한 복귀전을 치뤘습니다.

이 사람의 불안한 스파이럴은 여전히 민망해요. 하지만 저는 이 사람의 경기를 보는게 참 좋습니다.

최근 급상승하는 일본 여자 선수들의 스타일을 맘에 안들어하는 제 친구가 이 언니의 경기에

열광하면서 그러더군요.

"이게 피겨 스케이팅이야, 일본 여자애들이 하는 인형 놀이 같은 게 아니라!!"

약간 편협하지만, 저도 슬쩍 동의합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을 때 혼자 힘으로 일어선 사람의

강인함은 참 눈부셔요. : )



3. 04/05 유럽 선수권 남자 싱글 1위 예브게니 플루셴코 자유 프로그램.

확인할 내용이 있어서 방금 플루셴코의 이름으로 검색을 했다가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찾았습니다.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을 앞두고 주요 경기에 대해 정리해놓은 짧은 프리뷰인데요.

살짝 첨부해볼게요.

예브게니 플루셴코/알렉세이 야구딘 남자 피겨스케이팅, 러시아  

하나의 금메달을 좇는 두명의 러시아 세계선수권자.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그게 전부다.
세차례나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알렉세이 야구딘(21)은 언제나 스케이팅에 온 정열을 쏟으며 은반 위
를 달린다. 그가 미친 듯이 달리거나 맹렬하게 뛰어오르는 모습에 관중은 숨소리를 죽인다. 현 세계선
수권자인 예브게니 플루셴코(19)는 러시아의 발레, 프랑스의 전위예술, 미국의 펑키적 요소가 뒤섞인
인물이다.

그의 점프는 ‘흐름, 우아한 곡선, 섹시한 엉덩이 흔들기’ 같은 묘사가 어울릴 정도로 부드럽다. 관
중은 그의 이런 동작에 정신을 빼앗긴 채 때때로 놀라움에 머리를 가로저을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은
결국 심판이 누구냐, 그들이 러시아의 과거를 그리워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판가름날 것이
다.


모두 최고의 접전을 예상했던 경기였지만 결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예선에 해당하는 규정 종목 경기가 끝났을 때 이미 승부가 결정나 버렸죠.

그 경기에서 예브게니 플루셴코는 가장 중요한 4회전 점프에서 넘어졌습니다. 피겨 팬들은

플루셴코가 규정 종목 4회전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넘어진 건 몇 년만에 처음이라고 난리였고요.

알렉세이 야구딘은 올림픽 챔피언이 되었고 영광스럽게 은퇴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은 몇 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고관절 부상이 굉장히 심했어요.)

그 때 걔 나이가 겨우 열 아홉이었어요. 그게 뭐? 라고 하신다면, 여자 싱글이 아니라

남자 싱글이라니까요~ 하는 수 밖에요.

숙명의(!) 상대 야구딘이 은퇴한 후 플루셴코는 유일한 절대 강자로 남았습니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도 함께 남았군요.) 지금 스물 두 살인 플루셴코는 6번의 내셔널 챔피언, 4번 유럽 챔피언,

3번의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갖고 있고요, 다음 달 상트 페쩨르에서 열리는 세계 선수권에서

천지개벽하지 않는 한 네 번째 월드 타이틀을 차지하게 되겠죠. 보통이면 영광이었을 올림픽

은메달이 이 사람에게는 살짝 약점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제 문제의 올림픽까지는

꼭 1년이 남았습니다. 이번 시즌 플루셴코의 경기를 보고 있으면, 그리고 다른 러시아 내셔널

선수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우리가 러시아 출신 피겨 올림픽 챔피언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라는 어느 러시아 기자의 탄식이 실감이 갑니다. 피겨 스케이팅은 러시아에서

여전히 특별한 사랑을 받는 종목이지만, 구 소련의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이 무너진 후로

피겨 스케이팅 왕국 러시아도 함께 몰락하기 시작했죠. 러시아의 훌륭한 코치들은 지금

미국이나 캐나다, 일본 선수들 옆에 앉아 있습니다. 고국에서는 더 이상 일자리를 찾을 수

없으니까요. 지금 체조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음 올림픽부터는 피겨 스케이팅에서도 보게 되겠지요.

얼마 전 2004년 러시아 내셔널 남자 싱글 경기를 모두 보았는데요. 두 가지 점에서 놀라웠습니다.

최하위부터 1위까지 모든 선수의 프리 경기를 티비로 생중계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아무리 점프에서 결점이 많은 선수라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움직임들을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선천적인 것처럼요. 성에가 낀 듯 뿌연 느낌의 화면과, 이국적인 크리스마스 장식,

남자 코멘터 한 사람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는 러시아어 해설까지...

몰락한 왕국의 아름다움이랄까요. 정말로 매혹적이었어요.

헉. 잡담이 너무 길어졌군요. 아래는 어제 있었던 유럽 선수권 프리 스케이팅 경기입니다.

플루셴코로서는 나쁘지는 않은, 그러나 흡족하지 않은 경기였어요. 애초 기권했던 그랑프리 파이널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면서 2주간의 스케쥴이 망가졌고 그 여파가 컸다고 하네요.

이번 유럽 선수권에서 플루셴코의 점수는 그의 개인 최고 기록(이면서 세계 최고 기록)보다 24점이

낮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2위를 차지한 프랑스 선수가 이번 유럽 선수권에서 얻은 점수가

지금까지의 개인 최고 기록보다 23점이 높았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이기는군요.

결론은, 부디 이번 올림픽 남자 싱글에서만큼은 이변이 없기를. 하지만 플루셴코가 러시아가 낳은

마지막 제왕은 아니기를, 뭐 그런거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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