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결정 이후 이게 검열이냐 아니냐, 아무리 공인이라지만 영화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것이냐 등등 말이 많은데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얘기가 안 되는 것 같네요.
박지만씨가 문제삼는 박통의 엽색행각, 엔카 애호 묘사가 사실이냐 여부 말입니다. 명예훼손을 판단하는데 사실 여부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중 하나입니다(형법상 사자의 명예훼손은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 한정돼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에 해당될 수 있지만 위법성 조각사유의 두 가지 요건, 즉 해당 내용이 1.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며 2. 사실이거나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정황이 충분히 존재했다는 요건상 역시 사실 여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박통의 소행사 대행사나 술만 마시면 일본군가가 18번이었다, 뭐 이런 얘기들이 결코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는 겁니다. 10여년전 신동아 같은 잡지를 보면 수시로 다뤄지던 내용이지요. 박선호의 법정 진술부터 잡다한 관계자들의 증언까지 소스도 다양하고요. 동아일보사에서 펴낸 남산의 부장들 같은 비화류 책에도 많이 나오구요. 그래서 박지만이 가처분신청을 냈을 때 솔직히 뜨악했었지요. "아니 뭐 10몇년 전부터 다 알려진 얘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저렇게 열낼 것까지야... 그때 신문, 잡지, 책 나올때는 뭐하고?"
(이런 내용이 생소하신 분을 위한 신동아 기사입니다. -> http://kr.dcinside2.imagesearch.yahoo.com/zb40/zboard.php?id=news&page=1&sn1=&divpage=18&banner=&sn=off&ss=on&sc=on&keyword=박선호&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67675 )
그래서 재판이 진행되면 오히려 지만씨가 난처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예상을 했더랬지요. 엽색행각 등의 사실 여부를 재판부가 가리려면 결국 그때 얘기를 자꾸 끄집어낼 수 밖에 없으니까 지만씨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지요.
그런데 우리 재판부, 여기서 엄청난 회피신공을 발동합니다. 영화 전체 내용을 "예술적 창작물이자 패러디->고로 사실여부 등등 따질 것 없음"으로 괄호쳐 버리고서 "다만 현실과 혼동될 우려가 있으니까 다큐 장면은 삭제하쇼". 정말 대단합니다. 사실여부 규명이라는(물론 본안소송이 아니고 가처분 단계에서 제대로 밝히기는 무리가 있습니다만) 가장 골치아픈 숙제를 피해버리는 동시에 가장 첨예한 문제적 장면들에 손을 대는 무리수도 두지 않으면서 지만씨의 가오는 살려주는, 법원 입장에서는 가장 속 편한 '묘수'지요.
그러나 지난 행정수도이전 헌재 결정때도 한 번 썼지만 이런 식으로 법원이 법 정신에 충실하지 않고 '가장 무난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자꾸 잔머리를 굴리는 모습은 정말 민망합니다.
p.s. 그러고보니 이 사건에서 삭제 결정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정작 사실 여부에 대해 입을 열지 않기는 마찬가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