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에는 동생의 영향이 컷습니다. 설날 저녁때, 제사 지내느라 피곤한 몸을 눕히고 잠을 청하고 있는데 침대 머리맡에서 동생녀석이 강력하게 권유하는 통에 그래! 보러가자! 하고 일어났죠. (솔직히 박지만씨가 고소만 안했어도 이 영화를 볼 생각은 안했을 겁니다.--;;)
보고 난 후의 감상은, 한 마디로....최고! 였습니다. 정말이지 무진장 웃고 또 웃었습니다. 웃겨서 웃었냐고요...예...진짜 웃깁디다. 무슨 조직같은 대한민국 정부에 보스같은 대통령과 중정부장, 조폭이나 다름없는 중정요원들....참 험하고 코미디 같은 역사, 그런데 웃기면서도 어찌나 가슴 시리고 서글프고...참 그렇던지--;;
1. 박정희 장례식
제가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요란한 기억들 중에 저 양반이 있습니다. 그 기억의 한 토막은 저 양반이 불의의 사고로, 영화의 표현을 빌리면, 참 뜬금없게 총맞아 죽은것에 대한 전 국가적인 슬픔...같은 거죠. 집단의 이미지랄까...티비에는 몇 일동안이나 검은 리본을 두른 대통령 아저씨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그 앞에는 소복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또 울고 그랬었죠. 티비에서 그걸 보다가 어머니께 왜 저기 가서 울지 않느냐고 물었던 기억도 납니다. 제 언니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나라 망하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
어찌됐든 본의 아니게 유신의 마지막 세대가 된 저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박대통령에 대한 추억어린 얘기들을 듣고 자랐습니다. 제 초등시절은 박대통령과 반공글짓기, 반공도서읽기 - 주로 만화(정말 신나게 읽었죠.^^), 반공독후감 쓰기, 반공웅변대회하기, 반공 포스터 그리기....그리고 매일 오후 5시만 되면 기립하여 국기에 대해 경례하기...(근데, 이건 원래 군인들이 하는 것이더군요. 매일 해뜰 무렵과 해질무렵에--;;)... 참, 문화생활 한 번 풍부하게 받으며 자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2. 피카소 빨갱이 소동
제가 이 소위 ‘반공’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잊기 곤란한 기억이 또 있다면, 바로 ‘피카소’에 대한 것입니다. 역시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미술시간에 제가 크레파스를 꺼냈는데, 친구녀석이 흘낏 보더니, 이럽디다. “야, 피카소 빨갱이래. 울 삼촌이 그랬어. 그래서 앞으로 피카소는 미술상표로 쓰지 못한대.” 코흘리게 애들도 아는 세계적인 예술가에게 이 무슨 웃기는 소린가 싶어 그냥 흘려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더군요. --;; 아무튼 고구려 연구하면 빨갱이 소리 듣는다는 얘기와 함께 거짓말 같은 반공코미디라고 생각했는데....진짜였습니다. --;; (북한은 고구려를 정통으로, 남한은 신라는 정통으로 잇는 사관을 갖고 서로 진짜라고 주장하며 정통성 갖고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여왔답니다. 좀 웃기는 얘기긴 한데...그러고 보니 왜 우리 교과서가 신라 본인도 인정한 적 없는 ‘삼국통일’을 주장하며 빠득빠득 통일신라 어쩌구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솔직히 누가 봐도 남에는 신라, 북에는 발해가 있으니 그건 ‘남북조 시대’, 아님 ‘남북국 시대’ 아닙니까...벌써 조선시대 안정복 선생도 그렇게 주장했었고...김부식 선생이야, 자기네 집안 높이려고 삼국사기에 그렇게 쓴 것이지...--+)
아무튼, 영화에서는 이 어처구니 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중앙정보부의 지하실, 고문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무슨 전시장 진열대처럼 나열되고 그 중 어떤 양복쟁이는 이 악질 빨갱이 피카소의 그림 한 점을, 소품 하나 가진 죄로 갖은 매질을 당하고 있죠.
그러더니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자 중정의 요원들이 당구를 치며 우리의 국보 - 국가보안법 -를 갖고 간첩만들기에 대한 농담따먹기를 합니다. 제일교포를 소재로 한 그 시니컬한 농담은 어처구니 없는 건 고사하고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어떻게 사기를 치고 어떻게 협박하고 어떻게 잡아 죽여왔는지 적나라하게 읊조리더군요. (입으로는 킬킬거렸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제일교포인 저로서는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더이다.)
3. 내가 기억하는 김재규, 주과장, 민대령
격동 50년이라는 MBC 라디오 드라마가 있습니다. 매일 낮 11시 40분에서 12시까지 20분간 하는 일일 정치드라마인데, 무지 재밌습니다. (뭐 얼마나 사실성에 입각했는지는 별개로 하고.) 시작한지 십 몇 년은 된 것 같은 장수 드라마 입니다. 박정희의 5.16쿠데타로 첫 테이프를 끊더니, 계속 인기를 얻자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비화들은 몽땅 늘어놓는 것 같더군요. (제목도 바뀐 겁니다. 원래는 격동 30년 이었지요.) 아무튼 굉장히 즐겨듣는 드라마인데, - 부모님이 광팬이어서 - 저는 문제의 이 양반들을 여기서 처음 만났습니다.
전에 MBC 다큐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서도 다룬 바 있지만, 이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김재규와 그때 그 궁정동의 하룻밤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숭고한 ‘혁명의 밤’이었습니다. 물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그의 동료들인 민대령, 주과장은 모두 혁명투사고 비운의 순교자들이었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라는 그 비장한 대사를 여기서 처음 들었습니다. 결연하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형장으로 사라져간 그들의 운명을 슬퍼하며 진짜 마음 아프게 보냈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물론 드라마 얘길 곧이 곧대로 믿을 정도로 저는 순진한 사람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유효합니다. 다만, 뭔놈의 거사를 그렇게 대책없이, 무대뽀로 했는지 아직도 많이 원망스럽습니다만. 전두환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정말 성공했으려나? 그의 말대로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으려나? 하는 일말의 미련이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그 때 어느 누구도, 문제의 중정부장을 두고 ‘독재정부를 지키는 기관의 장으로서는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좀 이상한 평을 내린 CIA도, 유신체제나 박정희의 운명이 이렇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겁니다. 유신이라는 체제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하룻밤 총성으로 나라를 엎을 생각을 하다니!
어떤 면에서는 또 그런 생각도 듭니다. 왜 중정부장은 남산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갔을까? 왜 자기가 유사시에 부릴 수 있는 휘하병력을 마련해 놓지 않았을까? 정말 전두환같이 독자적으로 군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장성급 인물들이 자기를 노릴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까? 박정희가 죽으면 정말 모든게 끝나고 그 사람들이 순순히 권력을 내주리라 생각한 것일까?....하다보니 이런 생각까지 듭디다. 이 모든 게 김재규가 차기 권력을 노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고. 만약에 중정부장이 권력찬탈을 꾀했다면 실제 군사력을 동원했을 테고 뭐...내전은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김일성이 쳐들어오는 건 둘째 치고 남한군 끼리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을거고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지도 모른다.....뭐 그런 생각도 들데요. 실제 영화에서도 중정부장은 “어떻게 우리 애들끼리 싸우는 걸 보겠냐.”고 말하고 있고.
뭐, 결국 진실은 알 수 없겠지만.
주과장 역의 한석규는 예의 그 성질 사납고 신경질적인 면은 여전하더군요.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풍선껌을 쩍쩍 씹어대는 무슨 시정잡배같은 그 모양새는 영락없는 ‘조폭’이더이다. 그것도 보통 조폭도 아닌 매춘업소에 여자들을 공급해주는 ‘보도사업자’...--;;
주과장의 고민이 바로 거기에 있죠. 해병대 출신의 어엿한 대한민국 군인인 그는 중앙정보부 고위급 요원으로 현재는 의전과장 자리까지 올라앉아 있지만, 정작 하는 일은 나랏님의 침실에 예쁜 여자들을 공급하는 ‘채홍사’ 가 주 업무입니다.--;; 솔직히 돌만도 하죠. --;; “그 분이 내 딸을 좋다고 찾으시는데....”어쩌구 하는 엽기적인 어머니 앞에서 ‘이런 미친년...’어쩌구 하는 욕설에는 자기의 요상한 처지에 대한 극단적인 신경질이 찐하게 베어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진짜 무지 웃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 너무 웃기더이다.--;;)
주과장은 왜 부장의 거사에 가담했을까? 실제 재판에서 그는 부장과 같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랬다고 했는데, 진짜는 긍지높은 사나이였던 자기를 싸구려 매춘업자로 만든 ‘할아버지’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한석규 연기는 괜찮았습니다. 부장의 백윤식과 함께 묘하게 어울리더군요. 도대체 코미디하고는 전혀 매치가 안될 것 같은 이 영화가 코미디가 된 건 배우들 공이 큰 것 같더이다. (민대령에 대해서는 그냥 우직하고 충성스런 사람이었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만 케릭터는 정말 멋지구리 합니다.)
4. 한 시대가 저문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굿바이 레닌>을 보면서 독일의 통일에 괜히 가슴 설레이다가 사라져 가는 한 시대가 어찌 이리 날 슬프게 하누...하고 괜히 궁상떨고 있는데, 동생이 큰 소리로 외치는 군요. “그때 그 사람은? 그 시대가 그렇게 끝난 게 정말 기쁘지 않아?” 물론이지! 그 시대는 그때 그렇게 끝나서 너무 기쁘다.! 두 말하면 잔소리! 유신이 그렇게 끝났으니 망정이지. 박정희가 계속 살아서 부산이고 마산이고 총질하고 탱크로 밀어대고....했다면....--;; (근데 전두환이라는 강력한 테클이....--+)
영화 보는 내내 그 시니컬한 유머에 킬킬 거리고 웃었지만, 정말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확실히 정치 코미디라는 장르는 비틀린 부당한 체제를 비웃는 데는 효과적이긴 하지만, 누군가의 비참한 죽음을 묘사하는데는 좀 잔인한 구석이 있더군요. 대통령의 참혹한 죽음과 김재규와 그의 동료들의 비참한 최후를 이미 알고 있는 터라 케릭터들에게 정이 가면 갈수록 마음이 불편해지고 우울해졌습니다. 대통령은 사악한 권력자라기 보다는 외롭고 소박한 아저씨고 젊은 아가씨랑 노는 모습도 꽤나 순진하게 보이더이다. (원래 이런 장면 되게 싫어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전혀 혐오감이 안느껴지데요. 감독님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음. --;;) 김재규가 육군 헌병대 취조실에 갇혀서 자기 나이 반도 안되는 젊은 헌병들에게 마구 맞는 광경을 볼 때는 그만 극장밖으로 나갔으면 하는 충동을 느낄 정도 였으니...아버지에게 이 영화 같이 보러 가자고 했더니 ‘사람들 비참하게 죽는 것 보고 싶지 않다.’고 싫다 하시네요.
영화 마지막의 나레이션이 많은 사람들을 열받게 하고 있습니다. 어느 평론가 양반은 감독에게 ‘악마같다’고 욕을 하는 정도니. 그 어조가 양쪽을 모두 비웃으며 역사에 대해 냉정한 것 같아 보여도 무책임한 처사같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곤란하긴 하죠. 제 동생도 그 나레이션의 비웃는 듯한 어조가 몹시 불편한가 봅니다. 영화를 무지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영 불편한 듯 툴툴거리는군요. 저는 뭐 아무래도 좋다....입니다만.
기억에 남는 대사들.
“...그러니까, 그건 조심하라고, 괜히 잠자리에서 오바질 하다가 역사에 남는 미친년 되지 말고...”.....--;;
“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그러게, 이제 그만 아프다고 하고 쉬세요. 부장님, 이 정권 오래 못가요.”
“ 다까끼 마사오!”
“ 총! 총 어디갔어!”.....--;;; (정말이지 최고의 장면!..^^)
아무튼 강추! 입니다. 여러분들 꼭 보시길.
그래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실제역사에 대해서 말입니다.) 김재규와 동료들이 몽땅 교수대에 매달린 것처럼 전두환과 노태우도 목을 매달았어야 하는데...아니, 사형판결 받았는데, 왜 집행을 못한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