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 ginger
  • 02-19
  • 1,357 회
  • 0 건
어제 NME(New Musical Express) 시상식 방송을 봤습니다. 신랄하고 반권위적이며 음악 깨나 좀 듣는다는 인간들이 읽는 음악 잡지 NME, 그 독자들이 투표해서 주는 상 답게 이 사람들 상패는 '손가락'입니다. 뭐, 뮤즈, 프란츠 퍼디난드, 더 리버틴즈 등 요즘 잘 나가는 밴드들이 줄줄 나왔고 '숀 어브 더 데드'의 두 주인공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가 셜록 홈즈와 왓슨 처럼 드레싱 가운을 입고 나와서 사회를 봤습니다. 공연을 빼고는 언론에 거의 안 나오는 콜드 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이 잠깐 비디오로 출연해서 'NME 영화상'을 주었는데 이 인간도 영국식 신랄한 농담을 잘 하더군요..수상작은 '숀 어브 더 데드'였습니다...



다들 술 마시다 담배 물고 올라와서 상 받는 분위기 였는데, 뮤즈는 여기서도 역시 베스트 라이브 밴드 상을 받았죠. 매튜 벨라미가 짤막하게 '팬들한테 감사'하고 내려갔어요.

공로상에 해당하는 '신같은 천재'(Godlike Genius) 상은 '뉴 오더'가 받았습니다. 조이 디비전 시절 이래로 항상 시대를 앞서서 좋은 음악을 만들어냈고 아직도 종종 활동하고 있는 아자씨들이 나와서 마지막 공연을 했습니다.

폴 매카트니, 오아시스를 포함해서 영국에서 좀 진지하게 음악한다는 인간들은 거의 다 얼굴을 비춘 이 시상식은 공연도 좋았고, 장난스럽고 재밌었는데.....어쩌면 그리도 모조리 죄다 줄줄이 다 남자랍니까. 록계는 아직도 남자판이에요.

-----------------

정형근의 소위 '묵주'건 보도를 읽었을 때 처음 느낀 점은 취재진이 이렇게 마구 들이닥쳐 문 두들겨 대면서 '나와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거였습니다. 아무리 정형근이 인간같지 않아도 말이에요. 외국에선 정치인의 사생활 보도를 얼마든지 한다고들 하지만 저질에 지독하기로 소문난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들도 저렇게까지 막 하는 건 못 봤거든요. 전 수상 존 메이저도 자기 내각의 여자 장관과 연인 관계였지만 그 여자가 세세한 내막을 자기 책에다 쓰기 전까지는 떠들썩하게 보도된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게 수상직 유지하고도 아무 상관이 없었고요. 스캔들의 당사자가 언론에 나와 떠드는 소위 'kiss and tell'이 아닌 다음에야 보도 못하죠.


지금은 물러난 노동당 내각의 내무성 장관, 데이빗 블렁켓이란 사람, 유부녀랑 공공연한 애인 사이인 거는 아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아줌마는 킴벌리 퀸이라고, 꽤 영향력있고 줄이 막강한, 미국 출신 언론인이고, 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몇 년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 사람들의 사생활의 일부가 언론에 노출되고 몇 주간 영국이 떠들썩해진 건, 둘 사이가 틀어지면서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였죠.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인 이 여자가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고 싶어하고 남편한테 돌아가려고 했는데, 블렁켓이 첫째 아들과 지금 임신 중인 아기의 아버지가 자기라고, 권리를 인정받고 싶다고 주장하면서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법정에서 강제 DNA 테스트까지 받게 생긴 상황을 원치 않은 킴벌리 퀸은, 정말 온힘을 다해 싸우기 시작했죠. 블렁켓이 내무성 장관직을 남용했다는 혐의, 즉 요르단 출신인 자기 애 유모의 비자를 빨리 발행해 주라는 압력을 가한 것 같다는 이메일을 언론에 흘린 거에요.

블렁켓은 절대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강직을 자랑해 왔던 정치인한테 큰 타격이었습니다. 첨엔 블레어도 감쌌어요. 일단 직권 남용 혐의는 조사하겠지만 조사결과 별 일 없다고 나올거란 건 뻔한 일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매일같이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싸우면서 여론이 안 좋아졌고 사퇴 압력은 안팎으로 거세졌지요.

이 모든 것은 블렁켓한테 애에 대한 친권주장을 포기하란 압력이었습니다. 애를 계속 보겠다고 나서지만 않는다면 퀸 쪽에선 언론을 더이상 뒤집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겠다는 메시지가 뚜렷했지요.'애냐, 정치생명이냐'를 강요받다가 블렁켓은 내무성 하급 공무원 하나가 이민국에 비자에 관련해서 전화 한 통화를 했다는 게 밝혀지자 깨끗이 사임했습니다. 가면서도 '이다음에라도 아이들한테 아버지가 커리어보다는 사랑을 택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고 퇴임 기자회견을 했지요. 이래서 막강한 정치인 하나가 침몰했습니다.

이 사건은 정치인의 사생활에 대한 보도와, 친아버지의 권리에 대한 열띤 논쟁을 불렀죠. 언론에선 남이사 누구랑 살다 헤어지던 그건 사생활이지만, 그게 자기 직책을 남용했는가에 대한 의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사생활 보도가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부권에 대한 논란거리에도 불구하고, 블렁켓이 임신 말기의 여자를 몰아쳐서 압력을 가한다는 건 영국 여자들한테 점수를 못 딸 일이었죠.  


저는 정형근의 밀회 장면에 들이닥쳐 문을 쾅쾅 두들겨 댔다는 기사를 보면서 예전에 정형근을 포함한 공작정치를 하던 인간들이 딱 저렇게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점은 협박해서 정치인 길들이기로 썼다는 것과 만천하게 사생활을 공개해서 꼴보기 싫은 정치인한테 타격을 가한다는 점이겠죠. 정형근의 도덕성이야, 이미 고문을 비롯해서 과거의 각종 침침하고 음험한 행적 덕에 다들 아는 바이고, 그래도 찍어주는 부산 유권자들의 해괴한 도덕적 기준 때문에 국회의원 노릇을 할 수 있는 건데, 이런 보도로 더 금갈 도덕성이라도 있나 모르겠네요.

---------------

언니네에서 내놓은 명절 특집과, 어제 누군가 올렸던 '시누이'입장에서 올린 '시아버지 생일상' 얘기를 보고 몇 가지 경우가 생각났어요. 평소에 상것들로(저한테는 좋은 의미입니다.) 잘 살다가 왜 갑자기 아들이 결혼하면 며느리를 통해 양반계급적 격식과 의식을 차리려고 하는지. 부모 생일에 식구들끼리 간단히 외식하고 사온 케익 잘라 먹던 집도 며느리가 들어오면 차려주는 '생신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자기 시어머니는 아침에 전화만 해도 하루종일 골치가 아프다던 사람도 시누이가 되면 '우리 엄만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올케가 잘못하는 거다'라든가, 남편이 시어머니한테 전화하라고 압력 넣는데서 수천년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는 외국사는 오빠네서 비자까지 연장해가면서 6개월 이상 있다왔어도 아버지가 워낙 '꼬장꼬장하고 폐를 안 끼치는 사람'이라서 괜찮다고 말하는 것. 저 비일관성과 근시안. 낯선 부엌에 주욱 서서 관련된 남자들 출생 순서대로 순열 매겨져서 굴욕적인 노동을 감수하는 명절에도, 자기 친정에 가선 올케가 얼마나 잘하나 눈에 불을 켜는 게 뭐하는 짓인지. 자기 좁은 이해를 초월해서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에 엿을 먹이기 전엔 결혼제도 안이고 밖이고 간에 여자들은 영원히 암탉같은 노예로 살 거에요.


명절 혹은 가부장적 '정상'가족, 결혼 제도가 여자들한테 요구하는 굴종 중에서 가장 큰 모욕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인간을 역할로 축소하는 것, 혹은 개인의 실현을 그 좁은 역할 속으로 제한하는 것, 주체가 아닌 종속, 보조, 2차 인간으로 강등하는 것.

----------------

오래된 의식, 종교적 제례, 절차를 보면서 오랜 세월 다음어진 그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과는 별도로 그것들이 강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싫어요. 시드 비셔스가 지 맘대로 부른 '마이 웨이'와 NME의 손가락부터 생각나죠.



게시판2004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8619 오타들 신고. 겨울 514 02-20
8618 눈썹칼에 손을 벤일따위와 등등 hellospace 863 02-20
8617 첫 여행, 새 홈, etc. 다랑 902 02-20
8616 한국의 신세대 아카펠라 5인조 그룹을 아세요? 이규영 1,930 02-20
8615 가장 좋아하는 극장은... Seymour 1,272 02-20
8614 폐관위기 넘긴 서울아트시네마 허리우드극장으로 이전 DJUNA 931 02-19
8613 김지수 주연 `여자, 정혜` 베를린영화제 넷팩상 수상 DJUNA 1,104 02-19
8612 오타신고 + 잡담 태양광결핍증 438 02-19
8611 리뷰 오타 진성 446 02-19
8610 영화 <엘비라 Elvira, Mistress of the Dark> 혹시 보신 분 계세요? 겨울 480 02-19
8609 김기영 심야상영회... 살인나비를 쫒는 여자... 이규영 518 02-19
8608 '독일, 창백한 어머니'를 보고 허준을 떠올리다 새치마녀 526 02-19
열람 잡담 ginger 1,358 02-19
8606 에비에이터 잡담(스포일러) 러아님 842 02-19
8605 소니-NW-E505 / 오늘의 키워드? 렉스 967 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