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막히다는 듯) 감독님이 내게 시나리오를 줬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이거, 너무 공격적인 것 아닌가.
이=처음 시나리오를 보곤 잘못 전달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볼륨없는 몸매인데 뭘 믿고 베드 신을 찍겠다는 건지. 그리고 배역도 당연히 경희(한석규 아내 역)인 줄 알았는데 가희였다. 그때 알았다. 감독님이 진짜 특이한 사람이란 걸.
이=윽, 말도 말라. 베드신. 그때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 장면 찍고 서럽게 울고 불고. 정말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에 있는 대로 찍겠다는 감독님이 얼마나 야속했는지 아는가. 이제야 말하지만 감독님의 그런 성격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베드신 찍던 날 감독님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어쩔 수 없는 A형 남자란 걸 또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파격적인, 엄청난 신이란 걸 감독님 본인도 알지 않나. 솔직히 한석규 선배도 '은주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며 기적을 바라지 않았나. 그런데 너무 쉽게, 또 아무렇지 않게 베드신에 대해 말해 속상했다. 난 배우이기 전에 여자이고 이제 겨우 스물넷이다.
이=물론 자동차 트렁크 신이었다. 시나리오를 보며 영화가 에베레스트산 같았다면 트렁크신은 바로 에베레스트 정상 같은 장면이었다. 3일 밤낮, 피 분장 뒤집어쓰고 롱 테이크로. 정말 생애 잊을 수 없는 생지옥이었다. 기억 나나? 그 장면 앞두고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끝장을 보자'는 살벌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