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출혈
엊그제던가 그 전 날이던가.
새벽녘에 자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얼굴 위로 뭔가 끈적거리는 액체가 주르륵 흐르는 느낌... 그리고 베게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스펀지 처럼 철퍽거리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잠결에 비몽사몽인 와중에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방에는 액체로 이루어지거나 그 것을 담은 물건... 이를테면 어항이라던지 자리끼 용 주전자라던지 하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거든요.
그래서 잠결인 와중에서도 혹시 자기 전에 캔맥주라도 하나 마시다 말았던가 하여 그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 요 몇 달간 집에서 맥주를 마신 일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 번에는 이 끈적거리면서 철퍽거리는 액체의 느낌이 혹시 잠결에 느끼는 착각이라던지, 아니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꿈은 아닌지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비록 눈은 감고 있었으나 의식은 이미 또렷하게 돌아오고 있었고, 얼굴 위로 흐르는 액체의 느낌은 꿈결의 착각 따위가 아닌 실제하는 생생한 감각이었습니다.
의아함, 황당함, 어리둥절함... 그리고 어찌할 수 없이 밀려오는 은근한 공포를 느끼며 저는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베게에 닿아있던 오른 쪽 눈꺼풀이 왠지 순간 접착제를 발라 놓은 것 처럼 좀 힘겹게 떠진다고 느끼는 순간, 눈을 뜨며 깊히 들이 마신 숨 속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확 섞여 들어왔습니다.
피 비린내라니... 더욱 놀란 저는 그 순간 벌떡 상체를 일으켜 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경악스러운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그 것은 바로 온통 새빨간 피였습니다.
제 얼굴 위를 줄줄 흐르던 의문의 액체는 바로 새빨간 피였고, 베게는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처럼 피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저는 뒷걸음질치듯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 보았는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마치... 돼지 피를 뒤집어 쓴 씨시 스페이식 같았습니다.
피는 왼 쪽 눈 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얼굴 부위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죠.
안 그래도 새벽녘의 단잠 중에 벌어진 일이라 경황이 없었는데 이런 끔찍한 몰골의 제 모습까지 보게 된 저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약 5분 간 멍하니, 피를 머금은 베게를 노려 보았지요.
그리고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고... 이 피가, 이 많은 피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에 생각이 미치자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 보았습니다.
천장은... 매일 보던 하얀 천장 그대로 였습니다.
귀신의 장난이라는, 그런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고 그에 따라 피가 천장에서 흐른 것이 아닌가 천장을 올려다 보는 그런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한 제 자신을 잠깐 비웃은 저는 보다 현실적인 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의 장난이 아니라면 이 피는 말할 것도 없이 내가 흘린 피일 것이고 그렇다면...
저는 다시 거울을 보았습니다.
피는 왼 쪽 눈 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얼굴 부위에 골고루 흘러 있었지만 특히나 제 입 주변에 진하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자면서 입으로 피를 토했다는 얘기.
그렇게 현실적인 원인을 찾고 현실적인 결론을 내리자 이 번에는 현실적인 공포가 밀려 오더군요.
아니 어떻게 하면 자다말고 입으로 피를 토할 수 있단 말인가.
술 먹고 자면서 과음에 오바이트를 한 적은 있지만... 어떻게 저렇게 많은 피를............
나는, 무슨 중한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귀신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공포를 느끼며 저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습니다.
내 나이 서른 다섯, 아직 한창 젊은 나이지만 각종 중병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하는 그런 나이.
내 친구의 친구는 간암으로 이미 세상을 떴다지...
아아 나는...
병원을 찾아야 할까, 진짜 중병이면 어쩌지, 부모님께는 알려야 할까...
피범벅이 된 얼굴을 한채그렇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감싸던 양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 오른 손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손가락은 다 멀쩡한데 왜 유독... 오른 새끼손가락만...
...처음 마디, 그러니까 손톱이 있는 마디 부분만 피로 새빨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건 또 왜 이러지. 왜 다른 손가락이나 손바닥, 또 왼 손에는 피가 전혀 묻지 않고 오른 새끼 손가락만...
손톱 마디만 새빨갛게 물든 새끼손가락을 약속할 때 하는 손 모양을 하고 노려 보고 있는 바로 그 때, 새로운 핏줄기가 주르륵 흐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새로운 핏줄기는, 입이 아니라 제 오른 콧구멍이서 흐르고 있더군요.
그 사실을 발견한 즉시, 저는 반사적으로 오른 새끼 손가락을 오른 콧구멍에 끼워 보았습니다.
정확히 오른 새끼손가락 첫 마디 까지 들어가더군요.
피가 묻은 부분까지...;;
그러고 나서 새삼 깨달았는데, 입 안에서는 피 맛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더군요.
피를 토한 게 아니라는 얘기.
그러니까 정황을 정리해 보면, 내 방은 요즘 무지하게 건조한 편이라 콧구멍이 막히는 일이 잦은데 잠을 자지 않는 낮에는 코를 풀어 버리지만... 그러지 못하는 밤에는... 취침 중에 나는 무의식 적으로... 새끼손가락을 콧구멍으로 가져가서... 무의식 중이라 미세한 힘 조절을 못 해서 그만..;;;;;.
생각이 여기 미치자 갑자기 오른 쪽 콧구멍 속이 쓰라려 옴을 느꼈습니다;;;
벌떡 일어난 저는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들어가 캐리 마냥 피범벅이 된 얼굴을 씻고 피가 조금씩 흐르는 콧구멍을 지혈했으며 코피로 물든 제 베게 커버를 벗겨 핏물을 뺀 다음 세탁기에 던져 놓고는 다시 방으로 와 무슨 병에 걸린 것이 아님을 깨달은 즐거운 마음으로 취침에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제 방 한 구석에서 열심히 수증기를 내뿜고 있는 가습기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니 뭐,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