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나쁜년 되고 편히 지내는 며느리들 안계세요?

  • 레오니아
  •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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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시댁글, 명절글 보다보니 정말 울화가 뻗쳐서!!!!!!

전형적인 마인드셋을 가진 시부모님

- 여자는 시집오면서 출가외인 되고 우리집 사람
- 가족이 평안하려면 여자가 희생을
- 며느리 공부 하거나, 공부 많이 했거나, 심지어는 집이 아주 부자인 것도 싫다
- 며느리 직업은 아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서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것
- 집에서 놀면서 애 보는 게 뭐 힘드냐... 등등


이런 시부모님을 만났는데 그냥 나쁜년 되고 기대치를 팍 낮춰버려서 편히 지내는 며느리 안계세요?

저는 그렇거든요.

케바케 이야기를 하면 서로 속 더 상하죠. 저도 간혹 정말 부유하고 인품 좋고 딸처럼 아껴주시는 시어머니 이야기 들으면 저도 좀 배가 아프니까. 안 부유하고 인품 그저 그렇고 며느리 아까운 줄 전혀 모르는 시부모님하고 적당히 쌩까고 지낸다는 얘기는 자랑스럽진 않죠.

전 원래 강력한 생활페미니스트여서 가정내 남녀차별(=가부장제)에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그랬던 제가 뭐에 홀렸는지 시부모님 자리를 따지지 않고 남자 하나 보고 결혼을 해버린 거예요. 결혼하고 나서 충격이 대단했죠. 진짜 신혼이혼이 이런 것이구나를 매일밤 떠올렸는데.

사실 저는 hubris 님이 올려주신 회사의 비유가 은근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제가 쉽게 나쁜년이 되어버리고 몸편히 마음편히 지내는 이유는, 시부모님께 어떤 것도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인 것도 같아요. 하다못해 착하고 예쁜 며느리가 되고 싶은 욕심도 없습니다. 살가운 며느리? 그거 전혀 바라지 않고요. '도리를 다한다'는 말도 BS 라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그리고 저희 집안 구조가, 남편이 자수성가까지는 아니지만 물질적으로는 부모님께 하나 받은 것 없이 혼자 공부하고 나름 전문직종에 있거든요. (결혼하고 친척들한테 소문 들었는데 부모님 지금 사시는 집도 미혼때 남편이 해주었다는군요. 아직 우리는 집이 없는데. 한바탕 뒤집어 엎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미혼때 일이니.)

처음엔 시부모-며느리 구조의 갈등을 전혀 이해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해대던 남편도 첫 1년 동안 끈질기게 싸우고, 서로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정말 많은 대화를 했더니 이제는 최소한 제가 이해하는 것은 본인도 이해합니다. (제가 느끼는 감정까지는 못 느낄지도 모르지만요.) 그래서 저도 남편의 원하는 만큼 시부모님을 존중해 드립니다. 남편한테 시부모님 험담 안하고요, 시부모님하고 같이 있는 곳에서 얼굴 붉히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냥 항상 웃는 얼굴로 '네, 알았습니다' 하지요.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다시 제 식대로 합니다.)

남편과 같은 선에 서 있고, 시부모에게 물질이든 칭찬이든 들을 생각 별로 없으면 사람이 깡이 세지더라구요. 그래서 저희집에서는 시어머니도 저한테 쓸데없는 소리 안하시느라 애쓰십니다. 며느리보다도 아들이 무서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대신 어머니에게 감정적으로 살갑게 굴고, 듣고 싶은 얘기 해주고, 아들며느리에 대한 불평이나 잔소리 들어주는 건 아들인 남편 몫입니다. (결혼 초엔 남편이 그 역할을 제가 하길 바라더라구요. 이제는 본인이 하는 게 서로 훨씬 좋다는 걸 깨달았지만)

감정노동이 없어지면 육체노동 분담도 쉬워져요. 고부간에 훈훈하게 같이 전부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 같은 건 안하지만, 한 명이 밥하면 나머지 한 명이 아기보고, 상황 봐서 남편은 청소라든지 식사 후 설겆이 등을 합니다. 시어머니가 남편 집안일 하는 것을 영 마땅치 않아 하는 눈치면 저랑 둘이 짜고 남편은 적당히 빠져서 컴퓨터나 하고 낮잠자고, 대신 시어머니 가시고 나면 남편이 저한테 완전충성 봉사하고요. 남편이 내 편이다/ 부당한 노동을 나만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런 느낌이 들면 밥 하는 일 정도는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고부관계는 아닙니다. 적당히 남남처럼 투명인간 취급도 하고 협조해야 할 때는 감정 내려놓고 협조하고, 그러다 보면 같이 밖에 나가면 그래도 우리가 남이 아닌데 싶어서 친밀해지기도 하고, 우리집에 놀러 오시면 손님인데 맛있는 거라도 한 끼 해드리지 싶고 그렇습니다. 그대신 남편은 저한테도 잘하고, 자기 엄마한테도 잘하고, 우리 둘이 갈등이 생기면 제 편을 들고, 중요한 문제는 (부모님을 끼우지 않고) 우리끼리 결정합니다. 크던 작던 예외 없어요. (프라이팬 사는 것도 참견하시고, 아기 이름 짓는 것도 참견하시지만) 우리 가정의 의사결정에 실질적으로 부모님을 끼우지 않습니다. 참견을 듣기만 하고 우리 식대로 결정합니다. 불평을 하시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립니다.

막상 스트레스 받으시는 분들은 다들 자기 가정의 사연이 있겠지요. 누구에게라도 너는 왜 바보같이 스트레스 받으면서 사느냐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냥 콱 나쁜년 되고 편히 지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막상 해보니 오히려 통하더라고요. '시부모님께 바라는 게 없다'는 게 물질뿐이 아니라 칭찬까지도 바라지 않으면 최소한 감정노동의 무게는 많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 변수는 남편이겠지요. 남편이 부모님에게 얼마나 휘둘리는가 - 물질이든 감정이든 - 가 제일 중요한 변수가 된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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