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약간)
사실 파리에서 정말 보고 싶었던 건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 또는 개봉하더라도 금방 내릴 - 아트하우스 영화들이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이었습니다만...
아무리 "좋은 영화는 대사를 몰라도 즐길 수 있다"지만,
이미 그런 경험은 클레르몽페랑에서 많이 한지라 이젠 사양하고 싶더군요.
(메인 상영관이 아닌 곳에서 트는 프랑스 경쟁이나 다른 섹션들은 영어번역이 없었거든요.
덕분에 정말 맘에 들었던 몇몇 영화들의 경우 저는 아직까지도 내용은 제대로 모릅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경우 파리스코프의 시간표를 뒤져보니
'Postcard from the edge'를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있긴 했는데,
이 영화를 봤다가는 민박집의 저녁 식사를 포기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웃지마세요, 이 살인적 물가를 자랑하는 파리에서
저녁 한 끼를 돈주고 사먹는다는 건 저에게 있어 생존의 문제입니다.
결국 먹을 것을 위해 영화를 포기한다는 결론.
그래서 눈을 돌린 게 일반극장에서 상영하는 영어권 영화들,
그중에 "version original"로 상영하는 자막판 영화들이었는데...
사실 가장 보고 싶은 건 울프맨이었지만 이 역시 시간이 안맞아 일단은 포기.
(내일 퐁피두 가는 김에 조조로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시간표에 딱 맞는 영화가 하나 있었으니
그게 다름 아닌 "From Paris With Love"였습니다.
별 생각없이 고른 영화인데 생각해보니 뭔가 괴상한 경험이 되었군요.
파리에 여행와서 본 영화가 제목에 파리가 들어가고
내용은 파리에 날아온 미국인 비밀요원이
아시아 갱단을 우르르 죽이고 흑인 갱들이랑 한판 붙은 뒤
아랍 테러리스트들을 무찌르는 내용이었으니까요.
영화 무지 짧습니다. 내용도 무지 뻔하구요.
한시간 반동안 요점만 딱딱 짚고 넘어가고
중간중간에 엄청 관습적인 유머가 잔뜩 들어가고
캐릭터 발전같은 건 눈씻고 찾아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각본 발로 썼어요"라고 말하기는 뭐한게,
그 뻔하고 간략한 시나리오가 꽤 잘 먹히기는 하거든요.
허긴 뤽 베송이 잘하는 게 이런 거니까요.
어찌보면 극장용 영화라기보다는 아주 재미있게 잘 만든 TV파일럿 에피소드의 느낌?
감독의 전작 '테이큰'(맞나요?)은 본 시리즈를 답습했다면,
이번영화는 그냥 말끔한 헐리우드식 액션인데
존 트라볼타의 액션이 오우삼 스타일을 연상시킵니다.
뭐 그렇다고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건 아니구요.
사실 본 슈프리머시 스타일의 액션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아쉽긴 했지만,
존 트라볼타 등장하면서부터 유머가 난무하는 영화 내용상
그런 스타일의 액션은 좀 안어울렸을 것 같기도 하구...
존 트라볼타, 포스터로 봤을 때는 "왜 저렇게 망가졌나" 안쓰러웠는데,
정작 영화를 보니 전성기의 느끼한 모습보다 훨씬 매력적이었습니다.
외모는 전혀 달라졌지만 '브로큰 애로우'나 '페이스 오프' 시절 생각나더군요.
캐릭터가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서민적인 역할을 맡아도 어째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데가 있는 브루스씨와 달리,
존 트라볼타는 영화 내내 잘난척하고 좌충우돌하는데도
어딘가 친근감있고 푸근한 곰돌이같은 느낌이랄까요.
(아니, 살찌고 머리 밀고 턱수염을 길러서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
하여간 영화관에 몇 안되는 아시아인 관객으로서
초반부 중국 갱단 초토화시킬 때는 좀 껄적지근하기도 했는데,
아닌척하면서 은근히 인종차별적이었던 테이큰과는 반대로
이 영화는 초반부터 대놓고 "우리가 프랑스를 구해줬잖냐"는 거만한 미국인 클리쉐에
아예 아시아인 흑인 아랍인이 줄줄이 연속으로 나오다보니
불편하다기보다는 클리쉐의 노골적인 집합같아 좀 웃겼습니다.
테이큰 때와는 달리, 그나마 타자에 대한 존중(너무 거창한가요?)이 눈꼽만치 존재합니다.
중간에 차 권하던 아랍인 할아버지처럼 재미있는 캐릭터도 있었구요.
뭐 어차피 이 영화에서는, 미국인들도 꽤나 짜증스런 인간들로 나오죠.
결국 파리에 와서 파리 영화를 본 셈이니 만족스럽긴 한데,
그래도 내일이나 모레중에 울프맨을 보든지
아니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나 레알쪽의 아트하우스 영화관에서
큰맘먹고 불어자막 영화를 한 편 보든지 해야겠습니다.
아, 스위스 다녀오기 전엔 정말 우울하던 파리 날씨는
어제부터 비가 왔다 말았다 변덕스럽기는 했지만,
대체로 끝내주게 맑습니다.
이제야 파리가 왜 아름다운 도시라고들 하는지 알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