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씨네21> - ‘김혜리가 만난 사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 sae rhie
  •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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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전 공부를 마치고, 점심으로 떡만두국을 먹었습니다. 도서관으로 돌아오면서 할리스에 들러 아메리카노를 샀습니다. 5분 남짓한 거리를 걷는데, 날은 흐렸고 비는 흩날렸습니다. 도서관 건물 1층에 있는 휴게실에서 푹신한 자리에 앉아서 폴리니의 피아노를 들으며 <씨네21>에 격주로 연재하는, 제가 가장 즐겨 읽는, 그리고 이번 주로 시즌2를 마치는, <김혜리가 만난 사람>을 읽었습니다. <세계의 끝, 소설가>라는 제목으로 김혜리는 김연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그것을 종이 위에 적었습니다.



2.


저는 김연수의 책 세 권을 읽었습니다. 그의 유명세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작년에 처음으로 그의 글을 읽었습니다. 부담 없는 수필로 시작했습니다. <청춘의 문장들>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나쁘지 않았고, 그의 소설을 읽어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최근작이자, 단편들을 모은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었습니다. 그에 대한 호감은 커졌습니다. 그를 더 읽고 싶었습니다. 책 뒷부분에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언급한 책 네 권인 <꾿빠이, 이상>,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중에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습니다. 그렇게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의 수필, 단편 소설, 장편 소설을 각각 한 권씩 읽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두고두고 김연수를 읽게 될 것이다. 천천히, 하나씩, 그를 읽어 가자.



3.


하지만, 김혜리와 김연수가 나눈 대화를 읽고 더는 주저할 수 없었습니다. 문학 서가에서 김연수의 작품을 모아 놓은 곳으로 가서 어떤 것을 읽을지 둘러보았습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와 <밤은 노래한다>였습니다. <밤은 노래한다>는 일종의 역사소설이라서 나중에 읽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읽고 싶었던 것은 (그것 역시 역사소설이긴 하지만) <꾿빠이, 이상>이었습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사서에게 내밀면서 <꾿빠이, 이상>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두 명의 사서의 도움을 받아서 알게 된 사실은, <꾿빠이, 이상>은 구미도서관에 존재하지 않고, 중앙도서관에 있는데 제목이 <굳빠이, 이상>으로 나와 있다는 겁니다. 상호대차로 대출 신청을 하고,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들고 열람실로 돌아왔습니다.



4.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모두 9편의 단편 소설로 되어 있습니다. 그중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라는 작품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김연수가 그 작품에 대해서 김혜리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소설 쓰는 자아와 제 자아가 다르냐면 창작하는 과정에 단절이 있어요. 처음 사회적 자아로서 뭘 쓰겠다고 결심하고 나면 먼저 스토리를 만드는데 쓰레기 같은 것들이 나와요. 평소의 내가 얼마나 후진 생각을 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죠. 마감을 앞두고 잠도 안 자고 더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고쳐 쓰다 뻗어버리는데, 내 자만심도, 습득한 지식도 다 부정하고 아무것도 없이 깡그리 벗겨진 그 상태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예요. 그러니 평상시의 저와는 다른 존재가 썼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대표적인 예가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에요. 그 작품을 끝내는 순간에는 “이것은 소설임에 틀림없다”는 환희가 들었어요. 독자들도 제 에세이와 소설이 다르다는 걸 알아요. 에세이와 평소의 저를 좋아하지만 소설은 어려워하는 분도 있어요. 저 역시 독자들을 만나 소설을 설명할 때면 이미 평소의 자아로 돌아가 있기 때문에 남이 쓴 작품을 말하듯 어색해요. 문예지에 연재할 때는, 첫회가 제일 쉬워요. 마감하고 한달 놀고 한달 자료 찾고 마지막 달에 2회분을 쓰려고 첫회를 읽어보면 너무 잘 썼어요. 도저히 이렇게 쓸 수가 없고 남이 써줬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겠다 싶어요. 그렇게 비참해하다가 간신히 쓰죠. 그리고 3회에 가면 또 가까스로 썼다고 여긴 2회분이 훌륭해 보여요. 그 상황이 반복되는 거죠. (웃음)
<씨네21> 743호
<김혜리가 만난 사람> 82쪽


공부를 시작해야 했는데,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덮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첫 단편인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20쪽에 불과하기 때문에 금세 읽을 것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5.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을 모두 읽고, 무척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단편은 세 개의 소제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꿈, 나무, 농담 이렇게 말이죠. 모두 옮겨 적고 싶지만, 가장 짧고 가장 강렬한 <나무>를 옮기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나무


그날의 행로가 무슨 의미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그녀는 분명히 나란 인간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고 쏘아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시작해보자. 연암 박지원은 언젠가 처남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이재성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꿈에 중을 보면 문둥이가 된다는 속담이 있지요. 무슨 말이겠습니까. 중은 절에서 살고 절은 산에 있고 산에는 옻나무가 있고 옻나무는 사람을 문둥이처럼 옻오르게 합니다. 꿈에 본 중과 문둥이는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박지원을 오랑캐라고 욕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작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재성이 편지로 일러줬기 때문에 박지원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들을 서로 연결시켜 한가한 입을 달래는 자들의 허망함을 속담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의 고갱이는 그 뒤에 나오는 “지난 수십년 이래로 옛날 함께 놀던 친구는 대부분 이 세상에서 없어졌습니다. 하룻밤 우스갯소리나 하면서 지내보고 싶은 때도 있지만 그런 날이 있을 수 없게 됐습니다”라는 구절에 있다. 이재성이 일러준 헛소문 얘기를 듣고 느낀 허망함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가 결국에는 먼저 죽은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옮겨갔다. 그러니 죽은 박지원을 위해 이재성이 제문을 짓는 장면에 이르러 내 마음이 다 편안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재성마저 자신보다 먼저 죽었더라면 박지원은 아마 그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테니. 서울 가회방 재동 중국식 벽돌집 사랑채에서 “깨끗이 목욕시켜달라”는 말만 남긴 채, 박지원이 숨을 거둔 것은 1805년 10월 20일 오전 여덟시경이었다. 이재성의 제문에는 이런 구절이 남아 있다. “마치 저 굉장한 보물이 크고 아름답고 기이하고 빼어나나 마음과 눈으로 보지 못하면 이름하기 어려운 것과 같지요.”

마치 저 굉장한 보물이 크고 아름답고 기이하고 빼어나나······ 이 구절을 읽을 때면 나는 늘 늦가을 아침 유언을 남기고 죽는 박지원의 재동 집 벽장에 들어 있었다는 지구의를 떠올린다. 그 지구의에 대한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박지원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지구의를 가져왔다고 쓴 바 있다. 박지원이 손수 지은 재동 집 사랑채 앞에는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 또하나 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원래는 숲을 이룰 만큼 많았겠지만,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다. 바로 그날, 우리의 행로 한가운데에 서 있던 바로 그 나무 한그루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비롯한 수많은 책을 남겼으며 조선 후기의 개화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아울러 박지원은 벽장 속의 지구의와 뜰 앞의 나무 한그루도 남겼다. 그건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다. 나는 역사라는 이름의 위험천만한 폭약을 단숨에 폭파시키는 뇌관은 <열하일기>나 실학사상 같은 게 아니라 벽장 속의 지구의나 뜰 앞의 나무 한그루처럼 사소하고 하잘것없고 우연의 소산으로만 보이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사이의 행로는 때로 매우 우연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곤 한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가끔씩 혼자서 중얼거릴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이혼할 만큼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었나?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대답은 알아내지 못하고 다만 지극히 하찮은 우연들의 연쇄과정에다 대고 왜 그래야만 했느냐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만을 알아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은 대부분 스캔들에 휩싸인 영화배우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면서 진실은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내젓는 단호한 손짓 이상의 의미를 띠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나간 일들을 다시 떠올릴 때 늘 만나게 되는,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다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의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억을 쫓아가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혼자서 옛일들을 생각하며 자문자답할 때면 특히 그렇다. 지나간 일들은 실험실에서 알코올램프와 플라스크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일어난 일들은 그 자체가 사실로 증명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면 그녀는 늘 화를 냈다. 자기가 원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하는 수 없다. 이렇게 얘기해야만 한다. 사실은 박지원이 살던 중국식 벽돌집 벽장 안에는 지구의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박지원의 손자로 나중에 우의정까지 올라간 박규수가 북촌에 사는 어린 청년들인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을 사랑채에 모아놓고 지구의를 보여주며 국제정세에 대해 얘기한 것은 그의 나이 68세가 되던 1874년 11월 무렵의 일이었다. 이때, 김옥균 등에게 보여준 지구의가 박지원이 중국에서 가져온 지구의인가, 박규수가 손수 만든 지구의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지금은 박규수가 만든 지구의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은 그 수많은 지난 일들 역시 그 지구의와 같은 것이다. 박지원이 죽을 당시, 그 집의 벽장에는 지구의가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또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까? 그 지구의를 보면서 조선을 개화시켜야만 하겠다고 결심한 김옥균과 홍영식과 박영효 등은 정확하게 십년 뒤,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날, 민씨 세력의 핵심이었던 민영익은 온몸에 자상을 당했다. 역사가 사소하고 우연하고 모호한 일들의 연속체가 아니라면 그날 민영익은 죽어야만 했다. 무려 열네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해 9월 20일, 알렌이라는 미국 의사가 조선에 들어와 있었다.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의 임지는 뻬이징이었으나 중국인들의 폭력에 시달리며 난징과 샹하이를 전전하다가 다른 곳을 찾던 중, 주변의 권유로 우연히 조선에 들어가게 됐다. 박지원 가의 지구의 때문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중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알렌 덕분에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적어도 갑신정변 때문에, 더 나아가서는 박지원 가의 지구의 때문에 조선 땅에서 첫 개신교 신자가 나오게 됐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알렌의 조선어 선생이던 노춘경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바로 그날 밤, 알렌이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에 알렌의 서재에서 알렌마저도 읽지 말라고 말렸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집으로 훔쳐가 밤새 두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노춘경은 그로부터 2년 뒤, 세례를 받았다. 역사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왜 이혼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다만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 그러나 텅 비어 막히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이어지는 골목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도 납득이 안되면 이렇게 덧붙이겠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홍영식이 비참하게 죽은 뒤, 민영익의 도움을 받은 알렌은 흉가가 된 홍영식의 집에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제중원의 뜰에는 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박지원의 집앞에 있었던 나무. 홍영식의 집앞에 있었던 나무.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다녔던 그 골목길들, 그 가운데 서 있던 나무. 그 나무 한그루 말이다. 그녀와 내가 헤어진 지금, 이 모든 일이 과연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17쪽 ~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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