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의 후대 평가가 궁금하신 분들, 이 글이 참고가 됩니다
(전략)......드디어 조종(祖宗)들의 옛 제도를 모두 고쳐 혼란케 하였는데,
먼저 홍문관 사간원을 혁파하고 또 사헌부의 지평 2원(員)을 없애므로써
언로(言路)를 막았고, 손바닥 뚫기[穿掌]·당근질하기[烙訊]·가슴빠개기[斮胸]
·뼈바르기[剮骨]·마디마디 자르기[寸斬]·배가르기[刳腹]·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碎骨飄風] 등의 이름이 있었으며, 말이 조금만 뜻에 거슬리면 명령을
거역한다 하고, 말이 내간(內間)에 미치면 촉상(屬上)이라 지적하여, 얽어 죄를
만들되, 기제서(棄制書)를 경률(輕律)로 삼고 족속을 멸하는 것[夷族]을
상전(常典)으로 여겨 한 번만 범하면 부자 형제가 잇달아 잡혀 살육되고
일가까지도 또한 찬축(竄逐)을 당했고, 익명서(匿名書) 및 다른 죄로 잡힌
자가 사연이 서로 연루되어 옥을 메웠는데, 해를 넘기며 고문하여 독한
고초가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옛 당직청(當直廳)이 협소하다 하여 이내 복야청(僕射廳)으로
옮겨 넓히되 밀위청(密威廳)이라 하고 감옥의 관원을 더 두었으며, 죄수를
신문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공(三公)과 승지·금부 당상이 섞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사대부로서 매를 맞는 자가 빈 날이 없었으나 모두 그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고, 또 비방하는 의논이나 우어(偶語)를 금하는 법을
만들어 감찰로 하여금 날마다 방방곡곡을 사찰하였다가 초하루 보름으로
아뢰게 하였고, 온갖 관사(官司)와 여러 부(府)도 또한 초하루 보름으로
시사(時事)를 비방하는 자가 있나 없나를 적어 아뢰게 하여, 비록 부자간
이라도 관에 보고한 뒤에라야 서로 만나도록 하므로, 모두 서로 손을 저어
말을 막았고,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겨 길에서 눈짓만 했다.
또 도성(都城) 사방에 백 리를 한계로 모두 금표를 세워 그 안의
주현(州縣)과 군읍(郡邑)을 폐지하고 주민을 철거시켜 비운 뒤에 사냥터로
삼고, 만약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당장 베어 조리를 돌리고, 기전(畿甸)
수백 리를 한 없는 풀밭으로 만들어, 금수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내수사 종 중 부실(富實)한 자를 가려 들어가 살게 하여 몰이하는 데
편리하게 하니, 본래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사망하여 길에 즐비
하였고, 능침(陵寢)이 다 금표 안에 들어가 지키는 사람이 없어 향화(香火)
역시 끊겼다.
또 도성 안 대궐에 가까운 인가를 철거하고 동서로 돌성을 쌓아
한계를 정하고 문묘(文廟)의 신판(神版)을 옮긴 뒤 그 안에 짐승을
길렀으며, 수리 도감(修理都監)을 두고 크게 공사를 일으켜 사방의
공장(工匠)을 모으고 민호(民戶)를 징발, 모두 서울에 집중시켜 궁실을
넓히고, 대사(臺榭)를 더 지어 강가나 물구비에 그들먹하게 벌여 놓으며,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워 큰 길을 이리 저리 내고, 밤낮으로
시녀들과 오가며 놀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삼각산 밑
장의사동(藏義寺洞)에 있는 탕춘정(蕩春亭)인데, 시냇물이 구비쳐 흐르는
위에 위치하여 단청(丹靑)이 수면에 현란하고, 시내를 가로 질러
낭원(廊院)을 벌여 지었는데 규모가 극히 웅장하였다. 일찍이 강물을
끌어 정자 밑에 이르게 하고 또 산을 뚫어 다른 시냇물을 끌어 정자 밑에
합류시키려 했는데, 모두 이루지 못했다......(후략)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中)
** 참고로 연산군은 조선의 10번째 임금, 이명박도 대한민국의 10번째 대통령
입니다. 폭군 내지 암군은 행동양태가 거진 비슷한가 봅니다. 읽는 순간 바로
아, 그분이구나 싶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