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귀국후 요즘 가장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케이블채널 폭스라이프의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예요. 물론 SBS 방영 당시에도 본방 사수를 하긴 했었지만 다시 보는 웬만해선...은 이후 만들어진 두세개의 김병욱 시트콤이 잃어가고 있던 또다른 특색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줘서 좋아요. 이를테면 지극히 일상적인 느낌의 각본이요. 똑바로 살아라의 정치싸움 구성 이후로 극적인 요소가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이 느낌이 많이 없어지기 시작했죠. 저번에 듀게에서 많은 분들이 순풍산부인과를 김병욱의 최고작으로 꼽으셨는데, 저 역시 동의하지만 정작 가장 '좋아하는' 시트콤은 바로 이 웬만해선...이에요.
아무래도 결정적인 이유는 김병욱 시트콤 중 유일하게 이곳 등장인물들이 다 착하다는 점일 거에요. 극중 주현의 부인 정수와 홍렬의 딸 민정의 욕심이 다소 강하게 드러나지만 둘 다 그 동기는 확실하고 그로인해 상처 받는 면 역시 많이 부각되지요. 특히 정수의 전형적인 한국의 기독교신자 여성 캐릭터의 표현은 참 현실적이에요. 가족중에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점 역시 미묘하게 현실적인 터치라고 생각되고요. 오중의 선물공세에 감동받아 춤사위를 벌이는 정수의 모습은 웃기면서도 뭔가 뭉클한 면이 있어요. 민정 역시 똑바로 살아라 속 인물이었다면 훨씬 독하게 그려졌겠죠. 아마 새엄마 종옥과의 갈등도 새롭게 들어갔을테지요. 그랬다면 전 참 싫었을거에요. 속물적인 엘리트 재황 역시 스노비즘이 고개를 들다가도 무식한 친구들에 의해 묵살당하는게 그게 참 귀여워요. 엘리트들이 매번 밴티지 포인트에 서는 다른 김병욱 시트콤과는 다르죠.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인삼과 영삼이에요. 김병욱은 모든 시트콤에서 우등생 캐릭터를 넣지만 인삼이는 유난히 정감이 가고 시청자들에게 접근이 쉽죠. 작은 체격 때문에 굴욕당하는 거침없이 하이킥의 민호 에피소드도 있긴했지만 어디에서나 볼 순수한 마마보이 인삼이 만큼 편안한 캐릭터는 아니었고 민호 얘는 몇몇 면에서 조금 히스테릭하기도 했죠. 인삼이와 영삼이의 우애도 김병욱 시트콤이라기엔 이상하리만큼 좋아요. 방금 봤던 에피소드에서는 나중에 커서 성공한 인삼이의 운전기사가 되고싶다던 영삼이의 얘기가 있었는데 이토록 순진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역대 시트콤 중에 있었나 싶을 정도에요. 기능성 구도로 전락하기 쉬운 전형적인'예쁜 여친' 캐릭터 해미도 중간에 신구와의 갈등을 넣어 좀 다채로워져 졌어요. '해민지 소시지인지' 험담은 지금 생각해도 명대사에요. 하긴 순풍산부인과 역시 기능성으로 투입됐던 래원이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만들기도 하긴 했죠. 하지만 순풍은 소연이나 찬우(이 캐릭터는 의찬이가 옆에 없으면 심하게 지겨워졌죠)처럼 몇몇 정안가는 캐릭터도 있었어요.
웬만해선은 이야기 구성 역시 꽤 잘 얽혀있어요. 두가지 이야기 선이 분명했던 똑바로살아라나 러브라인에 낭비되어 버린 하이킥시리즈보다 구성이 더 조화롭죠. 전혀 관계 없는 두 이야기가 결국엔 한 공통점으로 교묘하게 만나는 구성 역시 이 시트콤의 주특기였고요.
순풍산부인과가 블러드심플 이라면, 웬만해선은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정도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힘은 빠졌지만 여전히 훌륭하고 편한 차기작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