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받았던 이벤트들.

  • 이울진달
  • 03-21
  • 2,576 회
  • 0 건
1.

이제 이런 말도 지겨워지려고 하지만, 오늘도 회사입니다.
'오늘도 회사'라고 말하는 날이 언제쯤이면 줄어들까요.

사실상 한계가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해요.
이처럼 끝도 없는 업무량이라니....
월화수목금금금인데, 그래도 하루에 밤낮은 있어줘야하는데
아침엔 출근 밤에는 야근이니 퇴근은 어느 틈에 하나 눈에 불을 켜지요.

주말엔 정말, 정말 더 일이 하기 싫어요.
손에 안잡히고..잡생각만 나고.
뭘 해야 뇌세포들이 아이스티 샤워를 한 듯 깨어날까요.

다행히 지금까지 어떻게든 펑크난 적은 없었습니다만,
이젠 정신도 오락가락 하여 어느 구석에서 펑크가 날지 저도 모르겠어요.
다른 직원분들이 그러는데, 펑크 한 번 내야지 인원 충원을 시켜줄것 같다고...

2.

얼마 전에 이벤트 관련한 글을 듀게에서 봤는데
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기분이나 좋아져보세 하며
두근두근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고 있어요.

사실 저는 이벤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생각해 왔는데
댓글들을 보며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제가 싫어하는 건 저의 컨디션이나 스케쥴, 의상, 기분상태 등이 고려되지 않은
서프라이즈 이벤트죠.

예를 들어 데이트 약속이 없고 야근이 100%인 날,
머리도 안감고(!) 옷도 후줄근하고 화장 수정도 안하고 다크써클 세례를 받은 모양으로
털레털레 돌아왔는데. 집 청소도 안했는데.
남자친구가 그녀를 만나기 전 100m를 흥얼거리며 전화한다면...으으.

그러느니 차라리 이벤트 없는게 낫다, 라는 거지만
소소한 이벤트들에 감동 받는건 사실이니까요.
이벤트라고 부를 수 있나 싶은 작은 기쁨들요.

2-1.

벌써 5년이나 되었네요.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남자친구가 제가 좋아하는 델리만쥬 한 박스를 직원들과 나눠먹으라고 들고왔어요.
그 땐 불면증도 심했었는데, 아로마 램프랑 같이.
일하는데 방해된다고, 선물만 주고 갔는데 퇴근할 때 전화하니 회사 근처에 있었더군요.
돌아오는 길에 참 행복했던 기억이 나요.

제가 평소에 예쁘다, 고 스쳐 말했던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담담하게 꺼내주곤 했어요.
군대 제대하고 나서는, 만날 때 마다 뭔가 선물들을 한가지씩 가져왔죠.
이건 뭔가 싶지만, 헤어지는 날까지-제가 헤어지자고 말할 줄 알았으면서도
선물을 가져왔더군요.

어쨌든, 가장 감동 받았을 때는.
그 친구 아버지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아주 힘들었을 때..
군대에 있는데 그런 상황이 오자 굉장히 혼란스러워했고, 저에게 짜증을 내는 일도 많아졌는데
어느 날 제가 키우는 고양이들 때문에 싸우게 됐어요.
원래 제 고양이들도 예뻐하던 사람이었는데 저도 힘든 상황에서 고양이가 다 뭐냐고.

심하게 싸우거나 한 건 아니라서 사과받고 그냥 잊고 있었고,
얼마 안 지나서 남자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 후에 고양이 밥, 모래, 장난감, 간식을 가득 담은 택배가 도착했죠.
아버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인데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내게 한 말 한마디가 마음에 걸려서 이런 걸 보냈구나 싶으니까 저절로 눈물이.

마음이 다 해서 헤어진거겠지만
군인이면서 상을 당하는 와중에도-장례식장에서도
저에 대한 마음씀씀이가 소홀하지 않았어요.
헤어졌어도, 나쁘게 생각할래야 나쁘게 생각할 수가 없지요.

또 다른 건. 이벤트는 아니고 친구를 통해 전해 들은 말인데,
친구가 '이울진달처럼 어두운 성격인 애 만나서 너도 전염될까봐 걱정된다'고 했더니
'꼭 밝게 살라고 강요할 문제도 아니고 어두운 길이라도 같이 있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이 얘기 들었을때도 좀 감동받았죠.

2-2.

또 다른 사람은, 낭만적인 면이 있었어요.
전화로 노래를 불러준다든가, 이직 했을 때
도화지에 나무젓가락으로 이직 축하 플랭카드를 만들어온다든가.

그는 비흡연자 였는데, 저는 뭐..골초까진 아니지만 꽤 피는 편이고 사귀기 전에 말하거든요.
나 흡연자이고, 잠시 참을 수는 있어도 끊을 수는 없으니
나중에 속았다거나 끊으라고 하지말고 생각 잘 하라고요.

그렇다고 굳이 안피는 사람한테 피라고 하지는 않는데
제가 하는 건 다 같이 하고 싶다던 그 사람은 담배도 배우겠다고 해서,
나중에 내 탓 하지 말고, 니 선택이면 알아서 해라,고 했더니 한 대 정도는 같이 피우게 됐어요.

어느 날 만나기로 했는데, 커피숍에 먼저 와 있다가 담배를 내밀더군요.
열어봤더니 한 개피 한 개피 마다 그 당시 저의 고민거리들이 적혀있었어요.
괴롭히던 상사, 만났던 깡패, 돈, 집, 여러가지 고민들.
이것 다 피면 걱정거리가 전부 연기처럼 사라질거라고.

제 마음이 아닌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고 헤어졌지만,
요즘도 가끔 너무 답답할 때는 혼자서 담배에 열심히 써요.
싫은 것들, 나쁜 것들, 짜증나는 것들..

니 남자친구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라는게 뭐가 있냐고 해서
김초혜 사랑굿을 1부터 138까지 외워와,라고 했는데
앞에 몇 편 쯤은 외워봤을지 어쨌을지 모르겠네요.
(당연히 농담이고, 저도 못외워요. 당연히...)

2-3.

반대로 모든 면에서 현실적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취미란 것도 일시적인 열정일 뿐이니까 굳이 취미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랄까.

그래도 전시회나 책, 여타 저의 영화/음식/기타 취향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함께 즐기려고 노력해줘서 큰 문제는 없었어요.
나와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 배우는 게 많아서 좋다고 말하는 편이었죠.

생활속에 낭만이나 그런건 정말 없는 사람이었는데
겨울에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갔을 때
탈 때 내릴 때 문 열어주는 거 부터, 걸어서 이동할 때는
자기 옷으로 저를 꽁꽁 감싸서 에스코트 하는 것 까지 남이 보면 유난스럽다 싶게 잘 하더군요.

평소 안하던 사람이 이러니까 이것도 나름 감동.
제가 첫 여자친구라서 많이 서툴었고, 저는 그거때문에 또 답답해하고..그랬거든요.
역시나.... 헤어졌....지만.
애인보단 친구로 만났다면 더 오래 잘 지내지 않았을까..싶어요.

2-4.

얼마 전 이런 문자를 받았어요.
'축 당첨, 이울진달님, 이 문자를 가지고 가까운 편의점에 가시면 CJ 맥스봉을 드립니다'

저는 또 바보같이 회사근처 편의점이란 편의점은 다 돌았어요.
물론 소세지 이벤트에 응모한 기억은 없지만,
출근길에 택시에서 교통방송 이벤트..이런 걸 문자 보내놓고 잘 잊어버리는 편이라..
그리고 일단 맥스봉을 좋아하고, 한 개면 포기하겠지만 한 박스일지도 모르니까...

생각해보면, 어디 편의점인지도 없고, 무슨 이벤트인지도 없고, 마감 날짜도 없고,
보낸 사람도 1004였는데, 그 맥스봉이라는 세 글짜를 보고 이성이 마비되어서.
맥스봉을 먹을수 있다!!라는 환희에 가득차서..편의점 순례를.하고..
당연히 엄청나게 실망을 하고 알바님들과 멋쩍게 웃다가 우울해져서 돌아왔죠.

몇일 뒤 남자친구와 만나서 놀다가 문자가 왔어요.
'축 당첨, 이울진달님, 지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이 문자를 보여주시면 CJ 맥스봉을 드립니다'

제가 맥스봉때문에 실망해 있던 걸 아는 남자친구가
그 동네 편의점과 슈퍼, 마트를 이 잡듯 뒤진 끝에
맥스봉 스페셜 에디션을 사온 거예요.
너무 좋아서 계속 그 박스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3.

흔히 떠올리는 이벤트와 가장 비슷했던 건
술집에서 기타치는 아저씨 반주에 따라 노래 불러준 거?
역시, 이벤트에 꼭 돈이나 풍선, 촛불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닌거 같아요.

이제 작성완료 버튼을 누르면 일해야겠죠.
일하기 너무 싫네요. 일요일 밤 10시 20분인데....
그래도 행복했던 일을 많이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좋아졌어요.
이런 자위용 바낭이라니.

듀게분들 어떤 이벤트 받았을때 기분이 좋았는지도 듣고싶어요.
하지만 다들 내일을 위해서 주무시겠죠.
집에서 잘 준비 하시는 모든 분들이 다 부러워요.
행복한 꿈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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