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일 교사.

  • 치르치르
  •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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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진정으로 생각해 주는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평소에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사소한 일,먼 옛날의 기억이 우연한 때에 물꼬를 틔우면
단번에 가슴으로 다가들곤 해요.

저번 주에도 엄마와 죽기살기로 다툰 제가 쓸 글이라기엔 너무 간지럽습니다만.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났어요.
20년도 더 된 이야기군요.
저는 갓 국민학교에 들어간 꼬맹이였고,엄마는 그때까지도 머리를 길러 느슨하게 묶거나 땋았던,
순진한 가정주부였어요. 남들 앞에 나서기도 싫어하는,'끼'라고는 없는 스타일이었죠.

스승의 날이던가,어버이날이던가 하는 날이 가까워올 때였어요.
담임선생님이 그날 일일 어머니교사를 한 분 모시고 와야 한다고 공지를 했고,
저는 손을 번쩍번쩍 치켜들었습니다. 반장도 뭣도 아니고, 친구들 사이에서
딱히 눈에 띄는 편도 아니었던 저였기에,일일 교사 엄마로라도 위신(?)을 좀
세워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단번에 제가 낙점되었지 뭡니까.


저는 집에 가서 엄마에게 일일교사를 해야 한다고 졸랐고,
엄마는 겁을 좀 먹은 가운데서도 열심히 연습을 했어요.
그냥 동화 구연 정도의 수업 내용이면 된다는 말에,엄마는 두 편의 동화를
읽고 또 읽으며 연습을 하셨어요.
하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하멜른의 쥐떼 이야기라고도 하죠)>였고,
하나는 <해님 달님>이었는지,전래 동화 같은데 이건 기억이 안 나네요.

그 때 저희 엄마는 집으로 학생들을 불러들이는 피아노 교사 일을 하고 있었기에,
집 주변에 사는 고학년 언니 오빠들이 자주 드나들곤 했습니다.
엄마는 그런 언니 몇몇 앞에서 시험삼아 저 동화들을 읽고 주인공을 따라 몸짓으로 흉내를 내면서
"비슷하니?이거 좀 비슷한가?" 거듭거듭 물었어요.


그리고 대망의(?)그날.

엄마가 선생님의 소개를 받으며 교단에 섰어요.
"치르치르네 어머니께서 오늘 일일 교사로 오셨어요."

저는 너무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불뚝 내밀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엄마는 초록색 칠판 앞에서 먼저 <피리 부는 사나이>를 시작하셨어요.
독일의 하멜른에서 쥐떼가 출몰하고, 모두가 골머리를 앓을 때
한 피리 부는 사나이가 나타나 하멜른 시의 시장에게 금돈을 약속받은 후
피리를 불어 쥐떼를 홀리죠.

"...그래서 쥐떼들이 이렇게 도망갔어요."
엄마는 그 부분을 읽으며,손으로는 쥐의 앞발 모양을 짓고 발을 굴러서
도망가는 쥐떼의 모습을 흉내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에- 재미 없어요!!!"
어떤 녀석이 소리를 질렀어요.
그를 기화로 온 반 아이들도 따라 외쳤어요.

"우-우- 재미 없어요!!!"
"귀신 얘기 해주세요,귀신 얘기가 훨씬 재밌어요!!"


엄마는 그만 당황해서,구연을 멈추었습니다.
온 반 아이들이 떠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저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어요.
엄마를 당황하게 만드는 반 아이들이 미웠고, 그걸 혼자 다 감당하는 교탁 앞의 엄마가
어린 맘에도 안쓰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때,제 짝궁인 남자아이만큼은 그 소동에 참여하지 않고
저를 따라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 애한테 너무 고맙더라고요.

그 때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셔서,소동을 잠재웠어요.
"자,애쓰신 치르치르네 어머니께 박수-"



집에 돌아온 엄마는 "휴우 진땀 뺐지~"라며 중얼거릴 뿐
딱히 상처받거나 기분나쁜 얼굴은 아니었어요.
어린 제가 괜스레 기분이 상했을 뿐이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반장 엄마도 아니고 육성회장도 아닌 우리 엄마가
딸이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줍음을 무릅쓰고 교단에 서서
그런 '낯 두꺼운 일'을 했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아요.
지금은 소리도 잘 지르시고 욕도 잘 하시지만(...),그 때의 엄마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음에 틀림없거든요.


지난 주에 큰 소리로 싸운 뒤 엄마가 한탄을 하셨어요.
"내가 몇십 평생 한 게 뭐가 있겠냐,너희들 키운 것밖에 이룬 게 없는데..."
그 말씀을 들으니 미안도 하고,다소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어요.
엄마라는 이름을 떠나,한 사람이 지금의 나를 이루기까지
평생을 바쳤다는 생각을 하면
문득 내 인생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부담감과 감사함이 뒤섞여
눈 앞이 일순 깜깜해지더군요.

재미있는 건,그런 말보다도
오늘 아침에 문득 떠오른 몇십년 전 엄마의 일일 교사 소동에서
엄마의 사랑을 더 진하게 느낀다는 점이에요.

저도 제 아이를 위해서 없는 숫기를 무릅쓰고 교단에 서서
꼬맹이들의 야유를 받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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