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 아일랜드를 보고 떠오른 한 의부증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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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예전에 병원 대기실에서 정신과에 내원한 모자의 옆에 앉았던 적이 있습니다.
60세 전후로 보이는 어머니와 아들이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람이 났다고
생각하면서 온 가족을 괴롭히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 본인은 자기는 치료도 필요 없고 아버지가 바람 피우는 것만 멈추면
아무 일 없을 거라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아들을 설득하더군요.
하지만 아들은 더 이상은 힘들어 견딜 수 없다며 제발 치료 좀 받으시라고 애원하고요.


그 어머니는 아버지가 돈을 빼돌려서 새 여자에게 주고 있고, 작은 방에 있는
여행 가방은 그 여자가 곧 집으로 들어오기 위해 가져다 놓은 이삿짐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겐 빼돌릴 돈도 없다, 여행 가방은 몇 달 전부터 있던 건데 왜 새삼 이삿짐이라고
우기느냐며 답답해했습니다.


셔터 아일랜드에서 의사들은 망상을 치료하기 위해 망상을 현실화시켜 줍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위의 의부증 환자가 떠올랐고, 이 사람의 경우에도 영화 속 치료법처럼
망상을 현실화시켜 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 아들이 어머니가 우기는 대로 아버지가 돈을 빼돌리는 게 맞다고 하고, 새 여자의
이삿짐이라고 인정하면, 그 어머니는 이제 어떻게 나올까요?


가방을 뒤져보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이 새 여자의 물건이 아닌 걸 발견하면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할까요? 아니면 누가 어느새 내용물을 바꿔놓았다고 또 다른 음모를 떠올릴까요?


제 생각은 후자입니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망상에는 증거와 논리가 소용없습니다. 모든 증거는 망상을 강화하는 데 동원하고, 어긋나는 것은
음모로 돌려버리거든요.


왜 의사들이 그 치료법을 시도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현실에서 망상 환자를
많이 보아온 의사들이 실제로 '망상의 현실화'를 치료법으로 고려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설의 이야기 소재로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망상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테디가 하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혼돈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선택'에 가까운 것 같아요. 선택을 바꾸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없다면, 망상 환자는
계속 본인의 선택만을 고집할 겁니다. 주변 환경이 망상에 부합하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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