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보고 왔어요. (스포일러 만땅)

  • bunnylee
  •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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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자체는 너무 뻔해서 이 영화가 김기영 감독의 ‘하녀’의 리메이크라는 사실을 뺀다면 별로 할 이야기도 없을 것 같아요. 자연히 원작 ‘하녀’와의 비교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이 영화를 감상하게 되더군요. 너무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원작 ‘하녀’는 상류층이 아닌 중산층 가족이 나오고, 영화의 주동 인물은 하녀가 아니라 남자 주인이었죠. (혹시 제가 원작 ‘하녀’에 대해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리플 달아 주세요) 계급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래 쪽에 위치한 사람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시한 건 없을 거예요. 집안에 들어온 식모를 건드린 남자 주인이라는 닳고 닳은 이야기인 원작 ‘하녀’가 오늘날 봐도 신선한 이유는 그 이야기를 가해자인 남자 주인의 입장에서 풀어나갔기 때문일 겁니다. 중산층의 위선과 죄의식, 안락한 삶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공포에 관객은 동일시되고, 하녀의 내면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내버려 두지요.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녀의 욕망, 집착, 그리고 그것이 광기로 변해버렸을 때, 영화는 스릴러가 될 수 있었지요.

반면, 임상수의 ‘하녀’는 꼭 하층이라고 할 수는 없는 평범한 여자(수도권에 아파트도 소유하고 있다죠)와 상위 1%라는 상류층 가족이 나옵니다. 영화관에 가는 대다수의 관객이 상위 1%의 상류층 가족에 동일시하기는 어려운 법. 자연히 주인공은 하녀고, 그녀에게 동일시하게 만들죠. 그녀는 다른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지극히 선하기만 하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주인공이고, 이야기는 그래서 더 뻔해집니다. 착하고 가난한 여자 주인공이 돈 많은 남자 주인에게 농락 당하고, 그의 와이프(와 친정 엄마)에게 핍박 당하는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거죠. 살인 미수(2층에서 떨어져서 낙태하도록 만든 것도 일종의 살인 미수라고 친다면요)를 비롯한 거의 범법 행위에 가까운 사태들이 벌어지고, 심지어 엽기적이라고 할 자살 씬이 보여지더라도, 이 영화는 절대로 스릴러가 될 수 없고, 그다지 쇼킹하지도 않아요.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 중에 ‘반전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안나와서 실망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를 김기영 감독의 ‘하녀’의 리메이크로 보지 않고, 그냥 영화 자체로 봤을 때, 정말 진부한 이야기거든요.

임상수는 왜 원작 ‘하녀’같은 다층적인 텍스트를 평평하게 펴서 진부한 스토리를 만들었을까요. 임상수가 작가나 거장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영리한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그다지 영리하지도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한가지 예상과 달랐던 것은, 이 영화가 “계급”뿐이 아니라 “성정치”을 다루고 있다는 거였어요. 감독은 처음부터 시각적으로 이 영화를 성정치적 텍스트로 구축하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보여요. 영화 초반에 은희가 원룸 아파트 옥상 난간에 기대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가 훑을 때, 약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은희의 엉덩이 밑으로 앵글을 맞추더군요. 은희가 처음으로 그 집에 갔을 때, 요가를 하고 있었던 헤라의 배와 가랑이도 그렇고요. 이건 분명히 단순한 감독의 관음증은 아닌 것 같았어요. 내용적으로는 영화 초반에 헤라는 은희에게 자기 팬티를 빨게 하면서 눈을 굴리면서 약간 겸연쩍어 하지요. 훈하고의 섹스에서도 헤라는 비굴한 태도를 보이고요. 헤라는 훈과 같은 상류층 출신은 아니고, 중산층 출산으로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한 여자로 설정되었어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상류층에는 이재용과 임세령의 결혼이 아니라, 정용진과 고현정의 결혼 같은 경우도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감독은 성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하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일부러 헤라와 훈의 관계를 “창녀론”같은 극단적인 이론에도 들어맞을 것처럼 비대칭적으로 만들었죠(아이러니하게도 헤라가 침대에서 읽고 있었던 책은  “제2의 성”). 반면, 은희는 비록 희망 사항에 불과하더라도 훈과의 대칭적인 관계를 꿈꾸죠 (훈이 돈을 지불하자 슬퍼하죠). 그런데, 은희의 이런 나이브한 태도는 이 영화를 성정치적 측면에서 다층적인 텍스트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단순하게 선-악 대결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은희가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성과 배 속의 아기를 이용하려는 영악한 태도로 나왔다면, 좀더 흥미로운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계급”이라는 관점에서도, “성정치”라는 관점에서도 그다지 흥미로운 영화가 아니네요.

잡담을 좀 하자면, 유일하게 입체적인 캐릭터는 병식(윤여정)이더군요. 윤여정마저 없었으면 정말 심심할 뻔 했어요. 재밌었던 장면은 훈이 헤라 엄마한테 ‘내 자식을 누구 맘대로 없애냐’고 호통치던 장면이요. 정말 상위 1%의 남자들은 그럴까요? 자기가 바람 핀 여자가 임신이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중산층의 남자하고는 역시 다른가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는 꼭 해야겠어요. 이정재의 몸이 정말 멋지더군요. 흥분을 느낄 때, 상체의 잔근육이 움직이는 장면은 정말 아찔하도록 근사했어요. 이정재를 좋아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이제부터 이정재 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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