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람에 대한 동시대의 다른 평가

  • DH
  • 05-26
  • 2,0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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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같은 사람에 대해 전혀 다른 두 개의 평이 존재하는 건 흔한 일이죠. 제 경우 군대 기수상 A>B>C인 상황에서(제가 가장 막내인 C) 나중에 제대 후 A를 만나 "B는 저와 그 아래 기수들 사이에서 정말 나쁜 놈이었다"고 욕하자 A가 깜짝 놀라더군요. "왜 B를 싫어하지? 걔 정말 좋은 앤데." 네. B는 군대에서 사는 법을 제대로 알았던 겁니다. 써서는 안될 수단까지 쓰면서 아래를 잘 잡아놓고 위에는 깍듯하니 위에서 보기에는 정말 좋은 후임이었겠지요.

아무도 모르는 A, B, C 이야기 말고, 좀 유명한 사람 이야기를 읽게됐어요.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자신의 검사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천 지역에서 근무할 때 이야기인데요. 부천 하면 예전에 유명한, 경찰관 문귀동에 의한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이 있었던 곳이죠. 당시 검찰은 수사를 마친 후 사실이 아니라는 발표를 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부천에서 근무할 당시 이 사건 기록을 읽어봤다고 합니다. 성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수사해놓고서,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거짓 발표를 했다고, 당시 담당 검사는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고 썼습니다. 실명을 밝히진 않았지만, 출세의 증거로 나온 몇몇 보직을 보니 김ㅇㅇ 검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겨레에 연재중인 한홍구 교수의 사법부 과거사 시리즈를 보면, 이 부천 성고문 사건이 나옵니다. 요약해보면, 이 사건이 접수되자 정부에서는 온갖 외압이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은폐하라는 거였지요. 그런데 김ㅇㅇ 검사는 당시 정권 실세였던 박ㅇㅇ와 사법시험 동기였고, 그쪽에 빽을 써서 엄정히 수사해도 좋다는 오다를 받아냅니다. 덕분에 김용철 변호사가 봤다는 수사기록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박ㅇㅇ의 빽으로는 약했는지, 발표 직전에 다시 외압이 들어와 결론을 바꿔 발표해야 했다는군요. 위에서는 검사장이 직접 그 결과를 발표하라고 지시했지만, 검사장이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김ㅇㅇ 검사가 대신 읽게됩니다. 검사장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평생 못할 짓을 시켰다고 미안해했다고 하네요.

어쨌거나 왜곡된 수사결과를 발표했으니 나쁜 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두 묘사는 그래도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김ㅇㅇ 검사는 나름 억울할지도 모르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 이상한 결정을 내린 검사, 판사를 두고 "사표쓰고 변호사 개업해서 돈 벌면 되지, 출세욕에 불타서 그딴짓을 한 나쁜 놈"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그 시대는 정권에 밉보이면 현직 대법관마저도 변호사 개업은 커녕 어디 끌려가서 죽도록 고문당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걸 감수하고 청춘을 걸었던 학생들에 비하면 여전히 비겁하긴 하지만, 이해할 여지도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사람에 대한 두 가지 글을 읽고나서 그냥 생각난 김에 썼더니 결론이 안맺어지네요. ㅡㅡ; 생각해보면 지금 제가 죽도록 욕하는 많은 정치인들도, 누군가는 나쁘지는 않은 사람, 심지어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을 욕하는 절 보고서는 "왜곡된 정보, 혹은 한 때 잘못했던 거 하나만 꼬투리잡아 죽어라 미워하는 편협한 놈"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어르신들과 저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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