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존 봤습니다. (스포일러)
스포일러 있습니다.
조조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그린 존을 보고 왔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몇가지 긁적여 봅니다.
1. 정치
그린존을 얘기하면서 정치적 문제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은 원래 좌파(? 좀더 적당한 단어를 찾질 못하겠군요.)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데 아주 적극적인 사람들입니다.
본 시리즈에서도 그런 색채가 묻어났습니다만, 그린존은 아예 대놓고 이라크 전쟁과 미국의 대량살상무기 추적을 전면적으로 비난합니다. 사실상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정도로 정치적인 내용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그 시각에는 100% 공감합니다만, 문제는 이게 좀 지나쳐서 정치선전물처럼 보일 정도라는 거죠. 이라크인 통역자 '프레디'의 몇몇 대사들은 너무 노골적이라 민망할 정도입니다.
그린그래스의 '블러디 선데이'도 대놓고 영국군과 정부를 까는 내용이었지만, 등장인물에게 슬로건을 외치게 하기보다는, 그린그래스 특유의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연출로 더욱 큰 공감을 끌어내었기에, 그린존은 더욱 아쉽습니다.
2. 소재의 식상함
정치 부분에서 연결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만, 영화의 축을 이루는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얘기는 이미 철지난 소재가 된 감이 있습니다.
미국 보수파들은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며 비난하고 있습니다만 (로튼토마토의 부정적 리뷰 중 상당수가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아닌 이런 이유로 까댄 것들입니다.) 그야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닐테고, 문제는 영화의 시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조차도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맷 데이먼이 맡은 밀러가 대량살상무기의 진실을 파헤쳐가는 스릴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관객들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스릴러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죠. 그걸 커버하려면 좋은 각본과 플롯상 고도의 트릭이 필요합니다만, 이 영화의 각본과 구성은 그냥 평이합니다.
3. 배우들
그린그래스의 연출 스타일 자체가 배우들이 개인기를 펼쳐 보이도록 하기보단, 전체적인 상황을 실감나게 잡는 데 치중하는 스타일이고 이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맷 데이먼은 늘 그렇듯 크게 튀지 않지만 안정적이고, 다른 조연들도 괜찮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프레디와 여기자 역이 배우들의 연기력을 보여 줄 수 있는 배역인 것 같은데, 프레디는 앞서 언급했듯이 너무 노골적인 대사들 때문에 연기가 죽고, 여기자 역은 양심의 가책과 갈등을 보여주긴 합니다만 분량 자체가 너무 적습니다.
CIA 지부장으로 나오는 브렌단 글리슨도 배역 자체가 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만 늘 그렇듯 폭풍간지를 보여줍니다.(제가 글리슨 팬이라... ^^)
악역인 그렉 키니어도 열심히 합니다만, 역시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진 못하는 것 같네요.
4. 그린그래스의 연출 및 액션
수전증 카메라와 빠른 편집은 여전합니다.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몇개 세력이 쫓고 쫓기는 부분은 자연스레 본 얼티메이텀의 모로코 시퀀스를 떠올리게 하며, 그 폭풍처럼 몰아치는 느낌은 역시 그린그래스가 대가임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영화 자체가 현실적이다 보니, 본 시리즈같은 입을 쩍 벌리게 하는 초인적인 활약이나 멋진 장면은 나오지 않고, 그런 액센트가 없다보니 추격 시퀀스도 좀 밋밋한 감이 있습니다. 액션의 '재미' 면에서 본 시리즈의 모로코 시퀀스나 모스크바 카체이스 같은 걸 기대하시면 실망하실 가능성이 큽니다. 액션의 분량 자체도 매우 적구요.
그린그래스가 현장감 나는 연출은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잘 합니다만,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는 좀 의문이 갑니다. 그의 이름을 알린 '블러디 선데이' 이후 기승전결의 영화적인 플롯이 있는 건 본 수프리머시와 그린존 뿐인데 (본 얼티메이텀은 기승전결이 아닌 전전전결...), 두편 다 스토리텔링이 나쁘진 않지만 액션 없는 부분에서 스토리 전개만으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 듯 합니다. 게다가 그린존은 본 수프리머시보다도 스토리텔링의 비중이 큽니다.
5. 번역
홍주희의 번역은 그렇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무난하고,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통역자 프레디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영어가 약간 어색한 프레디의 대사들을 적당히 어색하게 번역했다고 생각됩니다.
중간 부분의 '총격을 받고 있다(taking fire)'가 '총상을 입었다'로 오역된 것은 이미 많이들 지적해 주신 것 같구요.
클라이맥스와 마지막 부분이 오역은 아닌데 뉘앙스가 좀 다르게 전달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장군의 "그게 너희 정부가 원한거다('전부 너희 시나리오야'로 번역)",
"넌 정말 그게 워싱턴에서 원하는 일이라고 믿는거냐",
그렉 키니어의 "누가 니 말에 귀기울여 줄 것 같아?('누가 널 믿어줄 것 같아?'로 번역)
맷 데이먼의 "앞으로 어떻게 사람들이 (정부를) 믿게 할 수 있겠소?(또 무슨 구실로 사람들을 죽일거냐는 식으로 번역)"
이런 대사들은 모든 것이 키니어가 연기한 파운드스톤 혼자 벌인 일이 아니라 미국 정부 전체가 저지르거나 알면서도 묵인하고 이용했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대사들입니다만, 번역된 자막만 봐서는 그냥 개인의 음모인 것처럼 보일 소지가 있습니다.
돈받고 일하는 전문 번역가라면 영화 전체의 내용을 잘 파악해서 조금 더 뉘앙스를 잘 살려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6. 맺음말
쓰다 보니 단점 위주가 되었습니다만, 그린그래스와 데이먼 콤비의 작품 답게 전체적으로 평균 이상은 하는 영화입니다.
다만, 본 시리즈처럼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영화는 아닌 것 같네요.
(본 얼티메이텀의 히트 덕에 가능했겠지만) 이렇게 흥행 안될게 뻔한 소재를 밀어붙인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맷 데이먼의 열정에는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