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리뷰랄라랄라] 유령작가

  • DJUNA
  •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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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작가]에 나오는 전 영국 수상 애덤 랭을 보면서 토니 블레어를 떠올리지 않는 건 불가능합니다. 원작자 로버트 해리스는 꼭 토니 블레어만을 모델로 한 건 아니라고 했다지만, 그래도 애덤 랭은 토니 블레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원수라는 사람들이 원래 그렇잖습니다. 워낙 역사에 끈끈하게 얽혀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가 없는 거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영국 수상인 걸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토니 블레어가 아닌 사람이 애덤 랭의 위치에 있는 걸 상상하는 건 그냥 불가능합니다.

로만 폴란스키의 이 신작 스릴러에서 애덤 랭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이 영화에서 랭의 자서전을 대필하기 위해 고용된 이름 없는 유령작가는 랭이 알고 봤더니 CIA의 사주를 받아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가 고용되기 이전에 죽었던 전임 유령작가도 그 때문에 살해당했고, 조금만 더 접근하면 그도 같은 꼴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이 엄청난 허풍을 통해 해리스와 폴란스키가 하려고 했던 말은 무엇인가. 물론 그들은 블레어가 진짜로 CIA의 스파이였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진짜로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면 그냥 블레어의 실명을 썼겠죠. 이건 사실 기술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욕설입니다. 아주 짧게 요약하면, "토니 블레어, 이 CIA 스파이 같은 놈아!" 쯤 되겠죠.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욕의 힘이 더 큰 겁니다.

폴란스키의 영화는 겸손한 작품입니다. 감독의 스타일보다 해리스의 소설에서 가져온 이야기와 아이디어에 더 충실한 영화지요. 해리스의 소설은 그가 폴란스키와 [폼페이]를 작업하는 동안 만들어졌기 때문에 폴란스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은 해리스가 잡고 있습니다. 폴란스키는 그 이야기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스타일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유령작가]를 히치콕 스릴러와 비교합니다. 하지만 히치콕의 영화들과는 달리 [유령작가]는 노골적으로 정치적이고, 중립적인 관객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습니다. 결말 역시 히치콕 영화와 멀죠. 이 작품은 분위기부터 히치콕보다 70년대 음모론 스릴러들에 더 가깝습니다. 그 영화들 역시 히치콕의 영향 아래 있지 않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전 둘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 깔아놓은 슬로건이 노골적으로 센세이셔널한 영화지만, [유령작가]는 우아하고 건조하며 간결합니다. 대놓고 욕하는 영화이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죠. 영화는 반 발짝 정도 물러나 주인공 유령작가의 모험을 따라가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도 불필요한 감정을 추가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지나치게 차갑다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형식을 깨지 않고 충분히 넣을 수 있었던 원작의 페이소스를 가차없이 제거한 것부터가 그렇죠. 하지만 이런 우아한 냉소 덕택에 영화가 더 매력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일 수도 있죠. 치장 안 한 싸늘한 미인 같달까.

기타등등
국내 소설 제목은 그냥 [고스트 라이터]. 하지만 영화 제목은 번역을 거쳐 [유령작가]가 되었죠. 보통 반대가 아닌가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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