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집에서
동생과 내가 어릴 때 쓴 일기와 시 등을 묶어 제본한 책을 발견했습니다.
...음, 저는 어머니를 더이상 예전만큼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미 몇 년 전 부터 어머니의 위치는 내 안에서 하강했던 것 같아요.
며칠 전까지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지만요)
하지만 이 책의 서문을 적던 삼십대의 어머니는,
열살 난 딸에게 씩씩한 편지를 보내던 젊은 어머니는
여전히 존경스러워요.
글모음집을 내면서
우리 어른들이 XX, RR같은 어린이들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은 많은 돈과 좋은 음식과 좋은 옷만이 아니라,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나약하게 의존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또 한 몫의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물고기를 가져다 줄 것이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유태인 속담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우리가 XX.RR 에게 자신들의 글모음집을 선물하는 것도 바로 그런 '낚시질하는 법 가르치기'의 하나이다.
- 공동 편집자-
자랑스러운 딸아.
어느새 만 열살이 되었구나 .
너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 무럭무럭 자라나 지금의 네가 되었으니 엄마는 참 기쁘기 그지없구나.
우선 너를 사랑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고맙고 또 잘 커준 네가 고맙다.
앞으로도 그 보살핌 속에서 더욱 건강하고 지혜롭게 크리라 믿지만, 이젠 너 스스로도 자기자신을 키우는 노력을 많이 하기 바란다.
자기자신을 키우는 노력이란, 열심히 배우고, 또 배운 것을 생활 속에서 실제해 보고, 또 반성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란다.
배울 것은 많이 있단다. 지식도 많이 알아야 하지만 건강한 몸을 만드는 방법도 배워야 하고, 남을 사랑하는 방법도 배워야 하고, 옳고 나쁜 것을 구별하고 옳게 행동하는 것도 배워야 한단다.
XX는 엄마의 자식일 뿐만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자식이며 이 나라의 자식이란다.
XX의 생일날을 맞이하여 우리 약속하자.
XX는 더 많이 배우는 데에!!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책 보는 것만이 배우는 게 아니다!)
그리고 엄마는 더 열심히 너를 도우며 한 편 네가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데에!!
다같이 힘껏 노력하자.
'어른이 되었을 때 나약하게 의존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라는 말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굳이 '공동편집자'라는 표현을 쓴 것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편지 말미 가득 뿌려진 느낌표에 파핫 웃었지요 :D
+
어린 나의 일기는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습니다. 문법도 맞춤법도 나이치고 능숙하게 구사하는 편이었지만 그저 성실한 아이의 지루한 숙제용 일기같았어요.
하지만 일곱살 때의 일기 몇 편은 단정하니 마음에 들었습니다.
8. 2. (금)
비가 왔다. 꽃들이 좋아했다. 비를 맞으면 좋아했다. 나는 집에서 책을 봤다. 꽃들은 좋아했고 나는 재미있었다.
+
사실 내 동생의 여덟살 일기가 훨씬 재미있어요 :p
3. 25 (금)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태양도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달도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달에는 사람이 살까? 별에도 사람이 살까? 태양가 별가 달은 빛이 날까?
3. 28 (월)
진짜 하나님이 있을까? 부처님도 진짜 있을까? 부처님은 아버지께서 옛날에 살아 계셨던 분이라고 했는데 .... 공룡도 진짜 있었을까? 내가 옜날에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죽으면 끝일까? 천국, 지옥 다 있을까?
10. 8 (토)
왜 통일이 안될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안가. 통일이 된다면, 나는 제일 먼저 백두산에 갈 거야
백두산에 가서 호랑이를 타고 산꼭대기로 갈거야 산꼭대기에서 얼굴을 씻고 마을내려보고 돗자리를 펴고 밥을 먹을 거다. 두번째는 금강산에 가서 나무에다 새집을 달고 놀으거다. 세째는 집에 들어서 잠잘 거다.
11. 18 (금)
나는 모든 걸 모르겠다. 우주는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 인간은 어떻게 해서 생겼나, 죽으면 끝일까?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블랙 콜에는 무엇이 있나? 왜 블랙 콜에 들어가면 몸이 산산조각으로 되어서 죽느냐? .... 등등이다. 이 문제를 푸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