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에서는 남자친구의 피씨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솔직히 한국남자분들 중에서 제가 생각하는 피씨를 위해 노력하거나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거의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화내고 싸우면서도 제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게이나 이민자나 환경에 대한 공정함의 문제에 있어서는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 면이 있어요. 그렇지만, 제게 직접적으로 닿는 정치적 공정함의 영역이 있죠.
연애를 하면, 아무래도 전통적인 역할놀이를 하게 되잖아요.
그게 처음에는 별로 신경쓰이지 않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평소보다는 성역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요. 평소에는 내가 요리를 해도 바느질을 해도 망치질을 해도 머리를 볶아도 나를 위한 일이어서 그런 고민을 별로 할 필요가 없었는데, 남자친구와의 관계성 아래에서는 그냥 싸주고 싶어서 싸준 도시락이 '여성적'인 걸로 간주되고, 평소 하던대로 다소 거친 농담이나 툭툭 던지는 말투를 쓰면 그건 '여성적이지 못한' 걸로 불려요.
그 '여성적'인 것들은 사실 제게 별로 어려운 게 아니에요. 전 밥하는 것도 싫어하지 않고 귀여운 말투같은 것쯤 좀 오그라들어도 쓰는 게 힘든 것도 아니죠. 그런 부분을 맞춰주는 건 마음먹으면 쉬워요. 그런데 이런 건 전체적인 나에서 몇개의 단면일 뿐인데, 이런 특성들 기준으로 규정되고 싶진 않아요. 벌레 막 잡고 남 앞에서 감정토로하기 싫어하고 일은 혼자하길 좋아하고 감정적으로 쉽게 건조해지는 것도 다 난데, 앞의 '여성적'인 특징들만 긍정당하는데 내 자체가 제한되는 기분입니다. 남자친구의 머리속에는 귀엽고 애교많고 잘맞춰주고 싸우면 화내기보단 '토라지는' 혹은 '삐지는' 그 누군가가 있고, 거기에 맞는 내가 등장하면 좋아하지만 아닐때는 그쪽은 일탈이나 파격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게 싫어서 (사실 손재주는 없기도 하고) 전 남자친구가 은근히 소원하던 손으로 뜬 목도리같은 것도 안했어요.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성역할에 내가 역으로 갖힌단 생각도 들어서 그땐 꽤 심정이 복잡했어요. 대부분의 연애에 관한 일엔 본능을 따른다는 심정이지만, 어렵네요.
솔직히 저만 강요 당하는게 아니죠. 나도 모르게, 혹은 알면서 저도 남자친구에서 '남성적'인 어떤 것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약간은 더 받고 싶어하죠. 노골적으로 쟤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더 사랑받는단 느낌을 원하고, 가능하면 그쪽에서 전화하고 돌봐주길 원합니다. 무슨 금전적인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사실 제가 더 해줄때도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요. 그래도 제 머리속에는 은연중에 '받아주는 남자' 혹은 남자가 더 해주는 쪽이 '그림이 좋다' 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