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전 오늘, 타이타닉이 침몰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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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책에서 발췌해 뒀던 글입니다만.... 4월 14일, 타이타닉의 추념일이라 한 번 올려봅니다.

(공교롭게도 딱 이 날에 맞춰서 천안함을 인양하게 되는군요. 사실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이 글을 올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분간이 안 가긴 합니다.)



타이타닉호의 최후

- 처녀 항해에 나섰다가 빙산에 침몰당한 세계에서 가장 큰 배 -




"나는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상상할 수 없다. … 현대의 조선 기술은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다."


이것은 영국의 가장 저명한 항해자 가운데 하나이자 장차 기선 타이타닉호의 선장이 될 에드워드 J. 스미스가 1907년에 한 말이다. 5년 뒤, 정기 여객선 브레멘 호가 북대서양 먼바다에서 뉴욕을 향해 서쪽으로 항해하고 있을 때, 유보 갑판을 거닐던 한 승객이 대양의 바다 위에 조용히 떠다니는 수많은 물체들 ―그게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을 보고 다른 승객들을 불렀다. 브레멘호가 그 현장으로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갑판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선실로 돌아가 울거나 말을 잃고 앉아 있었다.

배가 그 말없는 잔해들을 지나가게 될 때, 갑판에 남아 있던 많은 사람들은 갑판 저 밑으로 보이는 게 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브레멘호는 구명 조끼를 입은 채 차가운 바다에서 숨져 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시체들은 닷새 전인 4월 15일, 4만 6000톤의 타이타닉호가 바다 밑의 영원한 어둠 속으로 시속 4km의 속도로 하강을 시작할 때 빠져나온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브레멘호의 한 승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잠옷만 입고 남자 아이를 부둥켜 안고 있는 한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그 옆에는 개를 껴안고 죽은 다른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 … 남자 셋이 함꼐 모여 의자 하나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바로 그 너머에는 여남은 명의 남자들 시체가 있었다. 모두 구명 조끼를 입고 서로 필사적으로 부둥켜 안고 있었다. 마치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인 것 같았다."

1909년 봄 타이타닉호를 건조하기 시작할 때는 그런 종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타이타닉호는 인간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든 가장 큰 물체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 벨파스트의 동굴 같은 조선소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통계치들은 엄청나 보였다. 그 새롭고 거대한 배 밑에 깐 선박 지탱용 포장 바닥은 제곱인치당 2톤이 넘는 무게를 받치고 있었다. 100톤이 넘는 방향타 하나만도 완전히 자란 느릅나무 하나 만한 크기였다. 159개의 화실은 마일당 2톤의 석탄이 필요했다. 완성된 배는 건물 11층 높이에 도시 네 블록 정도 되는 길이를 가지게 될 예정이었다. 일단 이 5만 마력의 경이로운 배가 움직이게 되면 거의 1000명에 가까운 승무원들이 2500명 이상 수용되는 승객들의 요구와 변덕에 비위를 맞추며 시중을 들게 될 예정이었다. 아마 가장 만족스러운 통계치는 16개의 방수구획실이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함교에서 전기 스위치만 누르면 몇 초내에 떨어져 내리는 비상문들로 격리되어 있었다. 비록 타이타닉호가 타블로이드판 신문들이 말하는 대로 "절대 침몰하지 않는" 배는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안전도가 높은 배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주: 여기에는 약간 오류가 있다. 이 글이 쓰여진 십수 년 후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타이타닉호에 쓰인 강철은 형편없는 하등급 품질이어서 영하의 날씨 속의 차가운 바닷물에서는 그 강도가 현저히 떨어져 충격에 쉽게 깨진다고 한다. 즉 타이타닉은 철판이 우그러져 리벳 접합부가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옆면이 박살난 것이었다.)

화이트스타 해운회사가 이 새로운 정기선을 건조하면서 세웠던 주된 목표는 손님의 안전이었다. 고액의 요금을 지불하는 승객들을 위해 타이타닉호에는 고급 레스토랑 시설뿐만 아니라 파리풍의 노천 카페도 있었으며 저녁 식사를 하는 승객들을 위해 세레나데를 불러주는 세 명의 탁월한 음악가도 대기시켜 놓았다. 가장 좋은 스위트룸은 값비싼 가구에 아름답게 장식된 떡갈나무 판자벽을 갖추어 편도 최고 4350달러(오늘날의 4만 달러에 가깝다)의 요금에 걸맞는 시설이었다. 타이타닉호는 수영장을 갖춘 최초의 배였다. 또한 21개의 가지가 달린 촛대들이 웅장한 계단을 비추었고 일등 선실의 모든 목욕탕에는 시가(cigar) 받침대가 갖추어져 있었다. 전기 감자깎이 덕분에 식기실 승무원들은 약간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체육관에는 독일제의 최신형 운동 기구들이 설치되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은 필름을 현상할 수 있는 암실도 갖추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였다. 심지어 아래쪽 갑판에 탈 1000명 정도의 3등 선실 탑승객들에게도 보다 나은 편의 시설이 제공될 예정이었다.



규모, 설계, 편안함, 안전 등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타이타닉은 의문의 여지 없이 이제까지 건조된 가장 훌륭한 배였다.


이렇게 해서 1912년 4월 3일 그레이트 브리튼 제국의 새로운 거인은 사우샘프턴의 44정박장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4월 10일에 닻을 올리고 대양으로 출항 준비를 하면서 2등 항해사 찰스 H. 라이톨러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배가 영국 선박계가 이제까지 들었던 가장 훌륭한 평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항해가 계속됨에 따라 배에 대한 감탄은 매일 늘어만 갔다. 타이타닉호가 점차 본격적으로 움직임에 따라 그 가동되는 방식, 진동이 전혀 없는 상태, 계속 속도가 증가함에도 흔들림을 느낄 수 없다는 것 등에 대해 칭찬이 자자했다."

가까스로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의 탑승권을 끊을 수 있었던 사교 컬럼니스트들은 일등 선실로 여행하는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과 선내 활동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금방 수첩을 채워버릴 수 있었다. (◆주 : 지금부터 열거될 인물들은 모두 영화 '타이타닉'에 그대로 한 장면씩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광산업계의 거물인 벤저민 거겐하임이 있었고, 최근에 이혼을 하고 새 신부인 10대의 매들린에게 유럽을 구경시켜 주기 위해, 저명 인사들에 대한 잡담 거리를 찾는 연예기자들을 뒤로 하고 온 존 제이콥 에스터도 있었다. 코스모경과 더프 고든이 영국 귀족을 대표하였으며 디어도어 루스벨트의 보좌관을 지낸 후 이제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 산하에서 일하는 위세당당한 아치볼트 버트 소령이 미국 정계를 대표하고 있었다. 백만장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 는 이시도 스트라우스로, 그는 메이시 백화점 사장인 동시에 40년 이상 함께 살아 온 아내 아이다 스트라우스에게 헌신하는 남편이었다.

콜로라도 덴버의 마거릿 토빈 브라운 여사도 마찬가지로 눈에 띄었는데, 브라운여사는 솔직한 태도, 분명한 의견, 세련된 커다란 모자로 주목을 끌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몰리로 불리는 브라운여사는 곧 "절대 침몰하지 않는"몰리 브라운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유명해질 운명이었다. 가장 바쁜 탑승자들 가운데 하나는 토머스 앤드루스로 그는 타이타닉호를 건조한 회사의 관리였는데, 배의 개선점을 메모하면서 보내는 것 같았다.(유보 갑판에 짙은 색 목제품이 너무 많다, 일등 선실 모자걸이에 나사가 너무 많다 등등.)이런 결점들은 여객선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고칠 예정이었다.

4월 14일 일요일 아침, 타이타닉호는 일간 항속을 거의 880km로 높였다.아마 런던에서 온 젊은 과학 교사인 로렌스 비슬리보다 이 여행을 즐긴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비슬리는 대서양 위의 공기가 점점 쌀쌀해지는 가운데 아주 독실한 영국인 성직자 어니스트 카터와 배의 도서관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런던의 가장 황량한 빈민가 한 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카터는 저녁 8시 30분에 예정된 찬송가 합창 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2등 선실 식당에서 열릴 이 모임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으며 카터 목사가 지도할 예정이었다. 그날 밤 부를 찬송가에는 "바다에서 위험에 처한 이들을 위하여"라는 구절이 포함된 찬송가도 있었다. 카터는 조용히 밤 인사를 하면서 탁월한 안정감과 규모 때문에 이 훌륭한 새 정기 여객선을 신뢰한다는 말을 했다. 그 직후인 10시 45분 로렌스 비슬리는 잠자리에서 책을 읽기 위해 자신의 선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타이타닉호의 함교는 그렇게 느긋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함교의 유리들은 이제 0℃로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바깥 공기를 잘 막아주고 있었다. 일요일 내내 타이타닉호의 고급 선원들은 북대서양에 있는 다양한 다른 정기 여객선들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 래브라도해류가 거대한 빙산 몇 개를 평소보다 남쪽으로 더 멀리까지 싣고 오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되면 배들이 지나다니는 항로를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얼음이 보일 때까지는 배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는 전통, 무전실과 함교 사이의 형편없는 통신 상태 때문에 함교에서는 그 경고에 피상적인 관심만 기울였다.

그러나 오후 9시 40분 훨씬 작인 배인 메사바 호에서 무선으로 타이타닉의 항로 주변에 빙산들이 밀집해 있다는 경고를 했다. 고요하고 싸늘한 밤을 헤치고 계속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 거인의 아주 가까운 곳에 "아주 많은 수의 빙산들"이 놓여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타이타닉의 무선 책임자 잭 필립스는 너무 바빠 메사바의 메시지를 함교로 전달하지 못했다. 타이타닉호 승객들이 미리 미국과 캐나다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려는 인사 전보가 가득 쌓여 있어 무선실에서는 우선 그것부터 처리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두 명의 사우샘프턴 출신의 젊은 해면 감시원들인 프레드릭 플리트와 레이놀드 리가 15m 높이의 앞갑판 망대에 올라가 별이 찬란한 하늘 아래서 망을 보기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까지도, 곧 빙산과 마주치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무선실에 남아 있었다.

밤 11시 40분, 플리트는 갑자기 자신의 배가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너무 검어서 바다 수면과 구분되지 않았다. 플리트는 망대의 종을 세 번 강하게 울리고 곧이어 함교에 대고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면에 빙산이 있다!"

37초 후, 타이타닉호 전체에서 전율이 느껴졌다. 시커멓고 무시무시한 형체가 배의 우현을 긁고 지나갔다. 화실에서 나온 열기로 38℃까지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6번 보일러실에서 화부 프레드릭 바렛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이타닉호의 안으로 우그러진 옆면으로 차가운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몇 초 후, 일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이 아래의 모든 방수문을 닫는 전기 레버를 가동시켰다. 바다의 포효와 비상벨로 귀가 멍멍한 상태에서 바렛과 다른 승무원들은 5번 보일러실로 허겁지겁 들어갔다. 바렛이 탈출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6번 보일러실에는 급속히 물이 들어차고 있었다.



선실들을 서둘러 조사했을 때,
거대한 배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조선 기사인 토머스 앤드루스가 선실에서 함교로 불려 올라갔다. 앤드루스와 냉정을 잃은 스미스 선장은 배의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런 예기치 않은 시간에 예기치 않은 곳에 나타나게 되면 혹시 마주칠 승객들이 놀랄까봐 정상적인 속도로 걸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10분도 되지 않아 그들은 이미 배에 물이 4.2m나 찼으며, 뱃머리가 앞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앤드루스는 재빨리 계산을 해 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침몰하기까지 한 시간 반 또는 두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앤드루스가 말했다. 그 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선장 역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선장은 무전실에 연락하여 근처에 있는 모든 배에 구조 요청을 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밤 12시 5분 쯤, 선장은 타이타닉의 16개의 나무 구명 보트와 4개의 접을 수 있는 배 ―이것은 필요량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를 끌어냈다. 드디어 보트로 옮겨타는 일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수백명의 개인들이 보여준 용기, 비겁함, 행운, 절망의 일화들이 시작되었으며 이날 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금세기 최대의 감동적인 드라마 가운데 하나가 연출되었다.

그 중에는 J.스튜어트 화이트 부인도 있었는데 부인은 배가 가볍게 덜컹거린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배가 수많은 공기돌 위를 넘어간 것 같았다. 그 자체로는 전혀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두 시간이 안 되어 부인은 8번 보트에 탄 승무원 몇 명이 보트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무례를 범한다고 불평하고 있었고 부인 뒤로 파손된 정기여객선 타이타닉 호는 ―여전히 불을 켠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학교 선생인 로렌스 비슬리는 타이타닉의 엔진이 왜 그렇게 갑자기 침묵을 지키게 되었는지 알아보러 선실에서 나왔다. 아무도 설명을 못하자 비슬리는 다시 선실로 돌아갔다. 나중에 다시 나온 비슬리는 "계단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균형을 잃어 제대로 발을 내디딜 수 없다는 묘한 느낌이었다." 타이타닉호는 벌써 가라앉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머스 앤드루스는 사방을 뛰어다니며 사람들이 구명복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정작 자신은 입고 있지 않았다. 앤드루스는 배의 여승무원 한 사람에게, "아주 심각한 상황이지만 공황 상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나쁜 소식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 앤드루스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배 아래가 박살이 났다"고 말하고 종말이 한 시간쯤 남았다고 알려 주었다. 1등 선실부의 리트 레스토랑의 지배인인 프랑스인 루이지 가티는 중산모를 쓰고 작은 옷가방을 들고 한 팔에는 여행용 담요를 걸친 채 단정갑판(구명 보트 설치 갑판)에 서 있었다. 그는 식당 직원 대부분과 함께 오전 중에 익사할 운명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막에 기억하게 될 소리는
후갑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었다.


로저 브리쿠는 다른 음악가들을 따라 구명 보트에 타기 위해 서둘러 가는 바람에 그의 첼로의 금속 각봉이 카페트에 자국을 남겼다. 그들은 갑판이 기울어 서 있을 수 없을 때까지 연주를 했었다. 이 오케스트라의 단원 가운데는 구조된 사람이 없었다.

존 제이콥 에스터는 아내가 창문틀을 넘어 구명 보트에 타도록 도와주었다. 마치 뉴포트의 자기 요트에 있는 자리로 아내를 안내하듯 차분한 태도였다. 그는 자신이 아내를 따라갈 수 없다는 대답을 듣자 정중하게 뒤로 물러섰다.

이시도와 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는 몸을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한 생존자는 이 늙은 백화점 총수가 구명 보트의 자리를 제공받고도 그것을 거부하는 소리를 들었다. 스트라우스는 나이 때문에 자리가 제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들에게 제공되지 않는 특혜를 받고 싶지 않소." 그의 부인 아이다 스트라우스도 똑같이 자리를 거부했다. "싫어요.난 남편과 헤어지지 않겠어요. 우리는 함께 살았듯 또 함께 죽을 거예요." 아이다 스트라우스는 하녀인 엘렌 버드에게 구명 보트에서 입을 외투를 주었다. 그리고 나서 부분은 그들이 함께 맞을 마지막 순간에 일어날 일을 받아들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5번 보일러실에서는 두 하급 기관사인 허버트 하비와 조나단 셰퍼드가 계속 펌프를 가동시키고 있었다. 순간 셰퍼드는 맨홀에 빠져 다리가 부러졌다. 셰퍼드는 방 맞은편으로 옮겨지고 하비와 프레드 바렛은 펌프와 함께 남아 있었다. 갑자기 5번 보일러실과 6번 보이러실 사이의 벽이 함몰되었다. 순간 바렛은 그날 밤 두번째의 기적적인 탈출을 했다. 비상 계단 아래를 뒤돌아보니 하비가 셰퍼드를 도우러 가는 게 보였다. 곧 두 사람 모두 쏟아져 들어오는 물에 익사하고 방 전체가 어두워졌다.

아치 버트도 평소와 다름없는 냉정한 태도와 예의 ―이것으로 그는 워싱턴에서 인기를 끌었었는데 ―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버트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한 여자에게 부드럽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행동해선 안 되지요. 우리는 이 일을 통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될 텐데요." 그 직후 마리 영이라는 루스벨트의 아이들의 음악 선생은 버트의 행동 때문에 그를 특별히 기억하게 되었다. "아치는 나를 보트에 태웠어요. 담요로 내 몸을 싸 주었죠. 마치 자동차 드라이브를 시작하듯 신중하게 나를 보살펴 주었어요. 내 몸을 다 싸 주자, 버트는 보트의 뱃전에 올라서서 모자를 쳐들고 나를 내려다보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어요. 「안녕, 미스 영.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그리고 잊지 말고 고국의 동포들에게 내 소식을 전해 주시오.」"

그 날 밤에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이 놀랐던 것은 배가 마지막 순간에 무척 고요했다는 사실이었다. 배의 후갑판 끝에서는 중얼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토머스 R. 바일스 신부가 고해성사를 거행하며 무릎을 꿇은 백여 명의 영혼들에게 죄를 사면해 주고 있었다. 무선실에서는 잭 필립스가 여전히 SOS를 치는 전신기를 두드리는 소리 뿐이었다. 메세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보트에 탔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 "

거겐하임과 충실한 시종은 조용한 모습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구명복을 벗고 이브닝 드레스로 정장을 하고 있었다. 누가 그런 모습에 대하여 묻자 거겐하임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있소. 그래야 신사답게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하는 게 아니겠소."

이제 타이타닉 쪽에서 물 위에 떠 있으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될 때가 왔다. 새벽 2시 20분. 구명 보트에 탄 사람들과 물에서 몸부림을 친 사람들은 타이타닉의 거대한 고물이 바다 위로 들어올려져 잠시 공중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 1분쯤 되었을까, 이어 고물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한 구명 보트에서 9살바기 프랭크 골드스미스는 어머니와 함께 타이타닉의 불들이 영원히 꺼지기 직전 바다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어른이 되어 디트로이트에 살게 된 골드스미스는 집 근처의 야구장에서 함성이 들릴 때마다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타이타닉이 사라진 후 텅 빈 바다 속에서 물에 가라앉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지르는 소리가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골드스미스의 유언에 따라 그가 죽은 후 화장된 재는 그의 아버지가 작별을 고했던 그 바다에 뿌려졌다.)

골드스미스의 구명 보트 너머 어딘가에서 용기있는 욕실 담당 승무원 해럴드 필리모어는 뭔가 물에 뜰 만한 것을 잡아 구조될 때까지 살아있겠다고 결심했다. 갑자기 모르는 어떤 사람이 그의 몸을 잡아끌어 배의 벽 판자조각에 올려주었다. 미끌미끌한 나무를 움켜쥐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앉아 있는데, 필리모어와 함께 앉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단한 밤이군!" 이 엄청난 재난에 대해 그렇게 아주 가볍게 말한 뒤에 그 사람은 바다 속으로 떨어져 죽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구명 보트들에서는 거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노젓는 소리,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 그리고 6번 구명 보트에서 나오는 따뜻한 목소리가 들릴뿐이었다. 6번 구명 보트에서는 몰리 브라운이 거기 탑승한 28명의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몰리 브라운이 거기에 타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타이타닉에서 몰리 브라운은 모피로 몸을 감싸고 다른 승객이 6번 구명 보트에 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다른 곳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몸을 돌리는데 갑자기 그녀의 몸이 들리더니 1.2m 아래에서 내려가고 있는 구명 보트 위로 던져졌다. 배의 조타원인 로버트 히친스는 앞을 막은 빙산이 너무 두려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 여자가 자신이 기선에서 입던 가운으로 그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몰리 브라운도 검은단비 겉옷으로 반쯤 몸이 언 화부의 몸을 덮어 추위를 막아 주었다. 그리고 모두들 피를 순환시키고 기운을 북돋기 위해 노를 젓도록 했다.

마침내 새벽 4시, 구명 보트를 탔던 모든 사람들이 그 화창한 봄날의 아침에 볼 수 있었던 가장 멋진 광경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증기선이었다. 커나드 해운회사가 소유한 강력한 정기 여객선 캐퍼시아호가 타이타닉의 마지막 절망적인 구조 요청을 듣고 온 힘을 다해 얼음바다를 헤치고 그들을 구조하러 온 것이다. 캐퍼시아호는 705명의 생존자 모두를 태우고 타이타닉호가 사라진 지점에서 추모 예배를 드린 뒤 뉴욕으로 돌아갔다. 뉴욕에서는 3만명이 모여 그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 몇 달간 영국과 미국의 위원회는 각각 대서양 선박 횡단사상 최악의 참사를 조사했다. 통계 수치만으로도 끔찍했다. 2200명이 넘는 승객과 승무원들 가운데 약 1500명이 죽었다. 타이타닉호의 구명 보트는 나중에 보니 겨우 1200명만 수용할 수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것이 당시의 법적 기준에 합당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나마 침몰의 혼돈 가운데 거의 500석에 가까운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아주 잔인하게도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백만장자에 대해서는 신문이 머릿기사로 취급했지만 3등 선실에 탄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도 되지 않았다. 일부 3등 선실 탑승객들은 금속 문과 방수벽 뒤에 갇힌 상태에서 많은 구명 보트가 내려질 때까지도 보트에 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결과 1등과 2등 선실에 탄 아이들은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살아남았다. 그러나 3등 선실에 있던 아이들은 3분의 2가 죽었다.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그런 재난이 되풀이되지 않는 방법들을 강구하게 됨으로써 적으나마 보상을 받았다. 타이타닉호 이후에는 모든 승객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 보트를 준비하였으며 모든 대서양 횡단선에는 의무적으로 구명 보트 탑승훈련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빙산이 떠내려오는 계절에는 항로도 훨씬 남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재난으로 서구인들은 절대 보상될 수 없는 것을 잃었다. 「기억해야 할 밤」의 저자 월터 로드는 이렇게 말했다.

"타이타닉은 우리가 잃어버린 안정과 예의를 갖춘 세계를 상징하게 되었다. …1912년, 사람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자신감을 잃으면 잃을수록 우리는 해결 못할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더 행복했던 옛 시절을 갈망하게 된다."

그 시기의 분위기가 집약되어 있던 타이타닉의 갑작스런 침몰은 거의 무한한 충격을 주었다.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인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는 나중에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을 했다. 라이톨러는 선창 바로 위의 쇠창살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기적적으로 갑작스러운 바람이 위로 불며 그의 몸을 날렸고, 라이톨러는 가까스로 보트 위에 기어올라가 전복된 접는 보트를 지휘하게 되었다. 라이톨러는 그 위험한 피난처에서 타이타닉호의 단말마를 목격했고 죽기 직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비명을 들었다. 라이톨러는 위원회 위원들에게 그 경험을 전하면서 확신의 시대에 대해 간결하고도 적절한 묘비문을 제공했다.

"난 이제 다시는 그 어떤 것에도 안전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 출처 : "Great Disasters" (C)1989 Reader's Digest Co.


P.S.
그 당시 이 글을 옮기면서 느꼈던 것은, 영국/미국의 사후처리에 대한 철저함에 대한 감탄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참사를 잊지 않았고 매년 추념했으며, 양국 의회는 철저한 조사와 함께 수정 법안들을 꺼냈지요.
(원인은 아직 모르지만) 비슷한 참사가 벌어진 지금의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기억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국민이 위정자를 욕하기는 쉽지만, 국민이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면 위정자들도 국민 입맛에 맞게끔 행동하기 마련이겠죠.
(예컨대, 최근 일련의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판시 경향이 종래의 법리와는 확연히 달라지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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