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4.19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
0. 블로그 쪽에 쓴 글이라 평어체를 사용했으니 양해 바랍니다.
1. 1960.4.19로부터 꼭 50년. 올해도 변함없이 4월의 기념일이 왔다. 매년 이맘때쯤 되면 블로그에다가 4.19 관련 글을 끄적끄적 썼었다. 짧게 의견이나 소감을 술회하기도 하고, 비교적 긴 글로서 내가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는 2.28~4.29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들을 써 보기도 했다. (*그 포스팅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트랙백을 날렸었는데 나는 그 때 그의 외교정책에 매우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매섭게 비난했다. 번지수 잘못 찾았소- 라고. 그가 세상 베리고 나니 후회된다. 어쩌면 나의 그런 섣부른 태도가 그를 죽음으로 이끈 우울증에 한몫 하지 않았나 싶어서, 생각하면 매우 괴롭다.) 어쨌거나 나는 그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마산에서 나고 자란 고등학생 중에서도 좀 유별나게 세세한 것을 많이 아는 편에 속한다.
2. 하지만 적어도 그 동네서 나고 자란 학생들이라면 대강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게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김주열이란 이름 석자는 지금 고등학생인 고향 후배들도 다들 알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서울 쪽 친구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우리 때는 근현대사 과목이 없었다.)
2-1. 3월 15일이면 시내 각 학교들의 학생들이 기념행사에 동원되었었기 때문에, 들은 가락이야 다들 있기 때문이겠지. (이게 그 당시 시위 참가한 학교들만 하는 건지 아니면 마산시내 전체가 다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합포고, 구암고, 가포고 같은 곳은 그 당시 없었다고 하니까.) 솔직히 행사 자체는 잠이 올 만큼 지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만세 삼창을 끝으로 행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교복을 입은 채 마산시내를 행진하는 것은 꽤나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2-2. 아마 지금 학생들도 여전히 행진을 할 것이고, 행진이 끝나면 그대로 해산한 채로 소풍날마냥 집으로 가든가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든가 할 것이고(근데 연흥극장이 망해서 아마 지금은 안 하지 싶다), 일부는 창동이나 댓거리, 합성동에서 학주 샘들과 숨바꼭질을 하겠지. "아지매- 여기 쏘주맛 나는 사이다좀 주소-" (이것이 내 경험담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노코멘트. 확실한 건 이 동네에선 '이모'란 호칭이 낯설다.)
1-2. 어쨌거나 그런 배경에서 자라나는 마산의 학생들이긴 하지만, 어쩌다 보니 내 경우는 그보다 조금 더 세세하게 알게 되었다. 실은 그렇게 된 계기가 있다. 모든 것은 도서실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처박혀 가던 몇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글쓴이가 3.15 기념사업회라고 적혀 있다. 말 그대로 '그런' 사업회에서 홍보용으로 매해 펴내어 보급하는 두터운 연감 같은 책이다. 지금 생각해도 약간 특이한 부분은, 어떤 교감 선생님이 편년체로 기술한 부분도 있고, 당시의 신문 보도를 모조리 스크랩해서 연대기별로 정리해 놓은 것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런 자료들이 내 흥미를 자극했던 것 같다. (덧붙여, 그 기사를 송고한 사람들은 지금은 작고한 부산일보의 허종 기자 - 그는 김주열의 시신을 촬영했다 - , 그리고 그 유명한 '이만섭'이었다.(국회의장 지내면서 의원들 출석 부른 그 할배 맞다. 당시 동아일보 특파원.))
1-3. 사정이 여기까지밖에 안 되었다면, 이것들은 단순히 머릿속에 들어있는 '소소한 지식'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어떤 대목에서 내 눈길을 잡아끄는 내용이 있었다. 3월 15일에 발생한 희생자 중 김용실이란 이름이 눈에 띄었다. 사진을 보니 검은 가쿠란(일본식 학생교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 썼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교표다. 한자 高자 밑에 산 세 개가 받쳐 있고 양 옆으로 독수리날개가 펼쳐진 마산고등학교의 마크다.
1-4. 계속 읽어나가다 보니 몇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그는 당시 1학년 C반의 급장이었고,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것 같다(반면 김주열에 대해서는 그가 적극적으로 참가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약간 논란이 있다. 그 당시 학생들이라면 물론 참가하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그리고 그 날 저녁, 소방차가 마산무학국민학교(몽고정) 앞 전신주를 들이받고 정전이 되자 경찰은 밀려나는 시위대에게 조준사격을 가했다. 고 김용실 역시 그 현장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1-5. 생각해보면 그와 나는 환경상으로는 비슷했다. 적어도 그 때는 그렇게 느꼈다. 우연히도 그와 나는 같은 반이었고(1학년 3반), 학급임원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반장이란 그냥 선생의 전령일 뿐인 게 고교생활일진대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우연함이 내게 생각의 실마리를 던졌다. 시간차가 있을 뿐 같은 학교 같은 반, 바로 몇십 년 전의 그 교실에서 수업받던 학생이면 적어도 외형적 조건은 비슷하다. 비슷한 신체 조건과 사고 능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불의에 항거해서 행동했고, 그 과정에서 목숨까지 잃었다. 그가 목숨을 잃은 현장 또한 내가 심심하면 걸어다니는 그 거리였다. 몇몇 곳들은 아직 60년대 당시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했다. (지금은 재개발 때문에 많이 사라졌지만, 90년대만 해도 마산은 아직 남아 있는 왜식 건축물 때문에 건축학도들이 답사하러 오는 곳이었다.) 내가 경험하는 바와 다를 바 없는 공간과 환경에서 일어났던 얘기인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각성되는 듯하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후일 탈북자 주성영의 수기를 읽은 후에도 한번 더 겪게 된다. 나는 그가 당시 23세의 약관이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이후 북한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게 되었다.)
1-6. 반면, 내가 만약 그 시대의 그 상황에 서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를 생각하니까 생각할 거리는 더욱 많아졌다. 이를테면 4.19와 관련된 내용들은 책에서 읽던 옛날 얘기가 아니라 내가 대리 경험할 수 있는 실제적인 체감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집에 와서 아버지(같은 학교 30년 선배이면서, 그 사건들이 일어났던 동네에 사셨다)로부터 그 당시의 실제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 내용들을 하나씩 체화했고 복기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 내용들을 흡사 영화처럼 공감각적으로 기억하게 되었고 지금도 앉은 자리에서 10분 정도는 주절주절 떠들 수 있을 지경이다.
1-7. 사람들은 영화 '괴물'을 보면서 "실제 한강에서 이런 이야기가 펼쳐지니까..." 하는 감상을 많이 피력했다. 나는 그만큼 공감가진 않았다(물론 괴물은 매우 잘 만든 스릴러다). 그리고 내가 언젠가 블로그에 을지로 거리의 사진들을 올리면서 은사인 장경학 교수님(1916년생, 박정희와 동갑인데 아직 살아 계심)의 자서전에서 발췌했던 옛 명동 얘기(그는 '본정통(혼마치도리)'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지금의 충무로)와 비교하여 게시물을 올리니까, 독자들은 "늘 걷던 곳인데 이렇게 보니 새롭습니다" 같은 감상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런 사례들을 보면 이러한 공감각적 각성 - 의식화는 나 혼자 겪는 일은 분명 아닌 것 같다. 내게는 4.19가 그랬고, 빨치산이 그랬고, 일제시대에 일본 끌려갔다 돌아온 아재들(지금은 다들 돌아가셨겠지)의 이야기가 그랬다.
3. 그로부터 50년, 그런데 민주주의는 꽃피었는가? 내 생각엔 그런 것 같지 않다. 지금 정부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50년 전에는 민주투사 노릇 하던 사람들 아니었던가. 하지만 과거보다는 나아졌음이 분명하다. 외신기자들이 "Yonsei Beach" 라고 농담삼아 부르던 연대앞 철뚝길에서 지랄탄을 쏘는 광경은 일단 없다. 하지만 헌법 그대로의 권리가 행사되기에는 갈 길은 멀다. 권력은 눈가리고 아웅하며 기능주의적으로 움직이며 때로는 기본권을 침해하기도 한다. 또한 사회 일각에서는 민주주의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예전같으면 목청을 높여 성토를 할 일이지만 지금의 나는 판단을 하지 않고 그저 귀를 열어둔다. 내가 뭔데 남을 비판하겠는가. 나보다 잘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일이다.
4. 단지 곁가지로서, 이런 생각은 있다. 서울 시내 버스 노선 중에서 수유리 국립묘지를 지나는 간선노선 하나를 419번 노선으로 개편하면 어떨까... 50주년을 기념하는 것으로서는 의미 있는 퍼포먼스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