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친구랑

  • 차가운 달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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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친구랑 술을 마셨죠.
오래된 주공 아파트 단지, 지하철 종착역이 있는 곳이었어요.
종점 포장마차라는 주점으로 들어서니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친구가 보이더군요.
자리에 앉자마자 오래 못 있는다는 얘기부터 하는 거예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죠, 맞벌이 부부, 이제 갓 두 살이 넘은 아이...
해물파전을 찢으며 웬 막걸리냐고 했더니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해서 그냥 생각이 났다고 하네요.
아, 그래, 그것도 알지, 나도 항상 그런 걸...
고교 시절부터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는 친구,
한때는 내 반쪽이라고 느낄 정도로 모든 걸 함께 나눈 친구였죠.
물론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는 아니었죠.
친구의 아내는 술을 마시는 걸 싫어해요.

한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죠.
만약 녀석이 결혼을 하면 나는 만날 녀석의 집에 쳐들어가서
맘껏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다 취하면 그냥 거기서 잠을 자고 그럴 거라고...
아, 그건 정말 철없는 생각이었죠.
그건 정말 저 혼자만의 생각이었죠.

지난해 봄, 그러니까 일 년 전쯤이었을 거예요.
그날은 술을 잔뜩 마시고 친구에게 한마디 했죠.
넌 이 자식아, 너무 와이프한테 잡혀 살아.
한 번쯤은 그냥 막 나가고 그래 보란 말이야.
난 정말 너 보면 답답하다.
아무튼 그래서 말이에요,
친구 녀석은 평소보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더니
저보고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녀석의 집으로 갔죠.
친구의 아내와 아이는 이미 잠든 시간이었어요.
거실에 이부자리를 펴고,
볼륨을 낮춘 음악을 들으면서 조용조용 얘기를 나눴어요.
옛날 얘기였죠.
예전에 우리가 듣던 락음악에 대한 얘기들 말이에요.
술에 취해, 어둠 속에서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안방의 문이 열리고 친구의 아내가 나오더군요.
음악 안 꺼? 여기가 하숙집이야?
한 글자도 안 틀리고 그렇게 말했단 말이죠.
그 말은 이상하게도 기억에서 잊혀지지가 않는단 말이죠.
저는 그냥 누워서 잠든 척했어요.
친구는 허둥지둥 일어났고...
얼른 음악을 껐어야 했는데...
술에 취해 이놈이 어둠 속에서 한참 헤매는 동안
정적 속에서 분위기 파악 못하는 락음악만 조그맣게 흐르고 있었죠.
음악이 멈추고, 친구의 아내가 방으로 들어가고, 친구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저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어요.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었죠.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친구가 잠을 깨더군요.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저는 혼자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어요.
그 넓은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한참을 걸었어요.
버스 정류장에는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죠.
봄이라고는 하지만 입김이 하얗게 나올 정도로 차가운 새벽이었어요.
버스 창가에 앉아 새벽의 푸른 빛을 보면서
저는 그 말에 대해서 생각했죠.
하숙집, 하숙집...
맞아요, 친구 녀석은 하숙집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니죠.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다는 말이죠.
그리고 문득 그런 기분이 드는 거예요.
뭔가 내 삶의 한 시절이 끝나간다는 그런 느낌.

그날 이후로는 술을 먹다 일찍 들어가야 한다는 친구 녀석을 굳이 붙잡는 일은 없어졌어요.
어제도 그랬죠,
그랬어야 했죠.
그런데 막걸리를 꽤나 마셨단 말이에요.
녀석은 조금 더 시간이 있다고 하더군요.
종점 포장마차를 나와 슈퍼에서 캔 맥주를 하나씩 샀어요.
나무들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또 캔 맥주를 마셨죠.
그리고 저는 알면서도 괜히 흰소리를 늘어놓았어요.
야, 지금 바다나 보러 갈래?
아무 데나 가자, 이따 술 깨면 바로 출발하자, 동해도 좋고 부산도 좋고...
회사고 뭐고 이럴 때 안 가면 언제 가냐.
원래 그래, 그냥 아무 생각없이 가면 되는 거야.
왜 그런 말을 하느냐구요?
예전에는 정말 그랬거든요.
스무 살 무렵부터 녀석이랑 저는 그냥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는 걸 좋아했거든요.
밥 먹다가도 가고, 술 마시다가도 가고, 대낮에 커튼 치고 음악 듣다가도 가고,
밤새 놀다가 동이 틀 무렵 차를 몰고 강원도 산골로 떠난 적도 있었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저녁, 맨 정신에 동해로 떠나
창 너머로 파도 치는 밤바다를 보며 횟집에서 소주를 마신 적도 있었죠.
주문진항 한구석의 모텔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는 물텅범 해장국을 먹었죠.
아무런 의도도, 계획도 없이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일들이야말로 인생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어제는 달랐어요.
말 그대로 흰소리였죠.
이제는 더 이상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 없는 것을,
친구도 알고 저도 알고...
모두 알고 있었죠,
우리는 캔 맥주를 다 마시고 그대로 헤어졌어요.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저는 정말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어요.
친구 녀석이 못 간다면 나 혼자서라도.
이대로는 뭔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여기서 떠나지 못하면 영영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거라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술이 좀 깨면 곧장 달려서 어디든 가겠다고 생각했어요.
대구, 부산, 동해, 그 어디라도 좋았어요.
단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우연한 일들만 일어날 수 있다면 그 어디라도 상관없었어요.

집에 돌아와 불을 끄고 누워 음악을 들었죠.
술이 깨기를 기다리며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어요.
그리고 잠에 들었어요.
아주 잠깐씩 눈을 떴던 것도 같은데 일어나지는 못하고 계속 잠에 빠져 있었죠.
얼마나 잤을까, 문득 잠에서 깼을 때 요란한 기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요.
그때는 얼른 일어나 음악을 끄고 다시 자리에 누웠죠.
그리고 방금 내가 뭔지 모르게 이상한 꿈을 꿨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정말 이상한 꿈이었어요.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어요.
아주 이상한 꿈이었어요.
그대로 밖으로 나가 비안개에 가려진 산을 보며 담배를 한 대 피웠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고,
어느새 술이 다 깼죠.
정신은 말짱했어요.
그리고 전 알았어요.
그 어디로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어디로도 떠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단지 이상한 꿈을 꾼 것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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