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에이지 : 오리진을 플레이하고 나서. 스포일러 가림.
작년에 발매된 게임인데 뒤늦은 감이 있군요.
트레일러.
게임 중의 한 중요 퀘스트와 관련있는 트레일러. 파티의 특성을 잘 표현한 영상이면서, 동시에 중간에 활 쏘는 빨강머리 언니 Leliana가 게임 중에서도 저정도로 쓸모가 있었다면 절대 캠프에 놔두고 다니지는 않았을 거라는 댓글에 공감케하는, 내용과 영상 양면에서 미화된 슬픈 영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티에 다른 쓸만한 도적이 없는지라 울며 겨자먹기로 데리고 다녀야 했던 서글픈 추억을 상기시킵니다.
원래도 대사와 퀘스트가 넘쳐나는 RPG를 좋아라합니다. 그래서 '플레인 스케이프:토먼트'를 인생의 게임으로 여겨왔고 그 정도로 빠져 플레이하는 게임은 없을 거라 생각해왔는데, 근 십 년만에 그에 버금가는 게임을 만났습니다. 사전을 옆에 두고 플레이해야하는 점만 빼고는 불평할 점이 없습니다. 피가 튀는 무기와 화려하고 강력한 마법, 복잡하지만 편리하게 정리된 전투시스템, 수도 없는 대화와 이벤트, 방대하다 아니면 치밀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세계관 설정과 단순히 선과 악으로 구분되지 않는 입체적인 인물들, 플레이어의 선택이 흐름에 영향을 미쳐 결과가 달라지는 복잡한 스토리, 동료와의 연애질, 그리고 러브신.
써놓고 보니 흔히 보는 카피문구입니다. 낄.
거의 100시간에 가까이 진이 빠지도록 플레이해서 에필로그를 겨우 한 번 보았는데 드래곤 에이지 위키 ( http://dragonage.wikia.com/ )를 뒤져보니 아직도 못 본 퀘스트나 이벤트가 많고, 다른 설정과 방향으로 진행할 수도 있으니 반복해서 플레이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게임 내에서 Archdemon이라 불리는 용을 필두로 Darkspawn이라는 악의 무리들이 지하에서 인간 세계로 쳐들어옵니다. 역사상 이미 수차례 있었던 재앙입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종족과 직업, 그리고 이야기의 발단에서 다양한 출발점을 갖는 주인공은 이러한 재앙을 막아야 하는 사명을 가진 용사 집단 Grey Warden의 일원으로서 세계 여러 세력의 협력을 구해야합니다. 오래 전에 인간에 의해 몇 번 문명이 파괴된 역사가 있는 엘프들은 인간 세계에서 노예화되거나 집시처럼 유랑민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있습니다. 엘프 부족의 숲으로 찾아가 그들에게 협력을 요구하면 자신들을 위협하는 숲속의 늑대인간들을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이를 해결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늑대인간들의 몰살, 반대로 엘프들의 몰살, 아니면 그냥 원인만을 제거해 늑대인간 저주를 풀어주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마지막 전투에서 참가하는 협력 npc들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재미있는 건, 늑대인간들이 그토록 엘프들을 미워하는 이유가 엘프들의 Keeper-(족장 정도?)가 바로 늑대인간 저주를 발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도 단순한 악당은 아닌 것이, 인간에 의해 살해당한 아들과 강간당한 딸의 복수를 위해 숲의 영혼을 늑대의 몸에 불러들인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불러들인 저주가 도리어 자신의 부족을 수백년간 괴롭히는 존재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런 인과율스러운 이야기가 유저의 선택이 이후의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 이 게임의 가장 큰 매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게임에 살색을 더해주는 숲의 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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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엘프 키퍼 Zath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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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수백년 산 엘프 영감과 역시 나이는 수백년 들었지만 아리따운 노출광 처자 둘 중에서, 호르몬이 날뛰는 빤타지덕들이 과연 누구를 선택할런지는 자명하지 않겠습니까....만은 그래도 어쨌거나 선택은 경험치를 더 주는 쪽으로.
이러한 테마는 몇몇 퀘스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설정에서부터 드러나 결말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인간들을 위협하고 있는 저 Archdemon과 Darkspawn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욕망의 결과물로서 발생된 것이고 몬스터로 등장하는 Darkspawn 잔챙이들도 사실 한 때는 인간이었던 존재들로부터 태어나는 괴물들인 겁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엄청 참신하다거나 예측이 전혀 불가능해 은신한 도적에게서 데미지 16.5짜리 양손전투망치로 백스탭당하는 정도의 충격을 안겨주는 그런 종류의 것들은 아니겠습니다만, 문제는 그런 것들을 얼마나 흥미롭고 인상적으로 구성하느냐일테고, 그런 점에서 이 게임은 거기에 충분히 성공하고 있다고 봅니다.
캐릭터 설정의 깊이를 보자면 이렇습니다.
마지막 보스는 Archdemon 용입니다만, 스토리상의 Archenemy는 Loghain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보자면, 평범한 밀렵꾼이자 농부출신으로서, 한때는 선왕 Maric과 함께 이웃나라 Olrais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해낸 국가적 영웅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주인공이 참가하는 Darkspawn과의 첫 전투에서 지금의 왕이자 자신의 사위이기도 한 Cailan왕을 배신하고 부대를 철수시켜 왕의 부대를 몰살시킨 주범이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주인공을 계속 죽이려드는 권력 중독 미치광이 악당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Olrais의 침략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나라의 독립마저 잃지는 않기 위해 애썼던 권력가로서 Darkspawn의 침략이라는 큰 위기에서 Olrais의 원군을 받으려는 무리를 용납할 수 없었던 나름의 입장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왕비이자 자신의 딸이기도 한 Anora를 납치 감금한 음모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만, 만약 플레이어가 또다른 왕가혈통이자 처음부터 함께 한 동료 Alistair를 배신하면서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동료에 포함시키면 Anora 왕비 또한 타고난 정치꾼이며 자신의 악행에 대한 소문 또한 많은 부분이 날조된 것이며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고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반목할 수 밖에 없는 혐오스러운 인물이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능력이나 무작정 미워할 수만은 없는 배경 또한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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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에서 술마시다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모 나라의 모 전대통령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는 Logh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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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나라였다면 수첩공주에 비교되었겠지만 그에 비하면 훨씬 지도력이 있어보이는 Anora
sarcasm 스킬의 달인이자 츤데레 빰므빠탈 동료이자 목걸이 선물을 탐하는 된장마녀 Morrigan의 트레일러.
주인공을 남자로 설정했다면 연애가 가능한 동료인 Morrigan은 게임의 초반 등장합니다. Loghain의 배신 후에, 전설이자 레전드인 숲의 마녀 Flemeth의 구원을 받은 주인공은 딸 Morrigan을 동료로 데려가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인간의 도시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한채 모진 경험을 했던 Morrigan은 생존, 강함, 목적을 우선시하고, 정의, 수단, 사랑과 같은 명분은 괘념치 않습니다. 주인공의 선행에 빈정거리는 말 몇 마디를 던지는 것은 물론이고 플레이어가 무력한 NPC들을 돕는 퀘스트를 수락하면 심지어 주인공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지기까지 합니다. 중반에 Flemeth가 자신의 딸을 주인공의 모험에 동참시킨 이유가 좀 더 힘을 가진 Morrigan의 육체를 통해 영생을 꾀하려는 의도였음이 밝혀진 후에 주인공이 그를 구해주고, 그 외 여러 가지 이벤트와 대화를 통해 친밀도가 아주 높아진 후에도 여전히 사랑은 약점일 뿐이라며 주인공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전투 직전 Morrigan은 자신이 주인공의 모험에 동참한 목적은 주인공이나 주인공처럼 Archdemon을 처치할 수 있는 유일한 용사집단 Grey Wardens에 속한 다른 캐릭터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고, 원래대로였다면 Archdemon을 죽이는 순간에 Grey Warden의 몸속으로 흡수되어 Grey Warden의 영혼과 함께 파괴되어야 했을 Archdemon의 정수를 아이에게 옮겨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존재를 태어나게하려는 것 뿐이었다며 고백하고, 그 목적이 달성되자 마지막 전투 직후에 사라져 버립니다. Morrigan의 인간적인 면과 주인공에 대한 마음을 보여주는 여러 대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도 Flemeth와 같은 계획을 가진 것이라는 해석 또한 가능한 것입니다.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부제가 'Origin'인 이유가 바로 이것때문이라는 해석을 볼 수 있습니다. 속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바람직한 전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디 그냥 떡밥으로 끝나지 말고 다음 작품에서 이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근데 너무 몰입해서 플레이하다보니 에필로그 후에 황폐해진 마음은 어떻게 다잡을 수가 없습니다. 으헝.
덧. 동료 혹은 NPC와의 연애질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가능한 캐릭터들이 있습니다. 이런 게임에 열광할 빤타지 겜덕들이라하면 일반적으로 이성애자 너드만을 떠올리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것도 나름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캐릭터 디자인에서 시력을 위협하는 양키센스가 심하지 않고 비교적 예쁘장하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심지어 드워프들마저.
다른 덧. 맵을 이동하다보면 파티에 들어있는 동료들끼리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주인공이나 자기들끼리의 관계에 따라 대화내용도 달라지고 풍성해집니다. 예들 들어 Morrigan과 드워프 주정뱅이 Oghren이 함께 파티에 있을 때 Morrigan과 주인공이 연애관계에 있다면 Ohgren이 딱 술먹은 아즈씨들이 처자들 놀리듯 모리건을 놀립니다. 도적이자 음유시인이면서 게임 내에서는 Chantry라 불리는 수도회 소속의 Leliana와 적자생존 논리의 신봉자이자 무신론적인 입장의 |Morrigan이 파티내에 있으면 종교적인 주제를 놓고 각자 프랑스식 억양과 영국식 억양으로 투닥거리는 걸 들을 수도 있습니다. 고등학생 백치미남 쿼터백을 떠올리게 하는 Alistair와 Morrigan이 파티에 함께 있으면 Morrigan이 Alistair를 가지고 놀고 Alistair는 발끈합니다. 이런 잔재미가 풍부하다는 점도 아주 큰 매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