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짧은 이야기 몇 개

  • clancy
  •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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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 화

clancy

“그러면 자료 조사한 거 내일 학교로 가져갈게.”

영은은 머리와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양손을 부지런히 놀려 책상을 정리하며 같은 과 친구인 희선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 하는 교양과목 프로젝트에서 같은 팀이 된 둘은 마감이 다가오고 있는 요즘 부쩍 통화가 잦아졌다. 굳이 과제 때문이 아니더라도 신입생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둘은 수시로 문자를 주고받거나 장시간 통화를 나누곤 했지만 말이다. 희선이 막 생각난 듯 감탄사를 내뱉으며 물었다.

“맞다, 영은아 너 병수 선배 전화번호 혹시 알고 있니?”

“선배 번호는 왜?”

“아니 재무회계 수업 때문에 물어볼 게 있는데, 전화번호를 잘못 입력했나봐. 엉뚱한 사람이 받더라고.”

“그래? 잠깐만 있어봐.”

영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기를 손으로 바꿔 쥐고선 전화번호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숫자판을 누르자 액정 화면에 곧 박병수란 이름과 함께 전화번호가 나타났다.

“불러줄 게, 메모 할 수 있지?”

“그래 불러봐.”

“010-2345에......”

“잠깐만 잘 안 들리니까 좀 크게 불러줄래?”

“그래?”

영은은 좀 전보다 큰 소리로 다시 번호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010에”

“응, 010......”

“2345”

“이, 삼, 사?”

“응, 사.”

“2345.... 그리고?”

“6217”

“뭐라고?”

희선이 다시 되 묻자 영은은 답답한 듯 더 큰 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씩 나누어 불러주었다.

“육, 이, 일, 칠!”

“일일이야, 이일이야?”

정확히 불러줬음에도 번호를 다시 확인하는 희선의 질문에 영은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야, 너 왜 그렇게 못 알아들어? 답답해 죽겠네. 그냥 문자로 보내줄까?”

그러자 희선 역시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게 시끄러운데 내가 제대로 들리겠냐? 너야말로 어디 좀 조용한 데 가서 통화하던지.”

희선의 말에 영은은 의아한 듯 물었다.

“뭐라고?”

“옆에서 떠드는 사람 누구야? 그 사람 목소리 때문에 니 목소리가 잘 안 들려.”

“떠드는 사람이라니 무슨 소리야?”

“너 옆에서 계속 재미있냐고 물어보는 사람 말야, 너보고 그러는 거 맞지? 누군지 매너 없다고 좀 해줘라. 남 통화하는데 눈치도 없이.”

희선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원룸에 있었다. 지하철까지 10분 가까이 걸어가야 하는 위치임에도 그녀가 이 곳을 택한 이유는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어 조용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12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 TV까지 꺼놓은 영은의 방에 들리는 소리라곤 자신의 통화음뿐이었다. 무엇보다 방 안에는 영은 혼자뿐이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희선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야 번호는 받았으니까 그만 통화하자, 누군지 몰라도 심심해 죽네, 죽어. 너보고 놀아달라고 애원하는 거 보니까. 너 혹시 남자 생긴 거니, 남자 목소린데? 내일 보자.”

“희선아 잠깐!”

영은은 순간적으로 희선을 불렀지만 이미 통화종료가 된 후였다. 영은은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불안한 눈으로 둘러봤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다. 환청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전화 다 했으면 이제 나랑 놀자......’

탁자위에 놓인 알람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2.

우는 동생 달래기

clancy

명철이는 걱정스런 얼굴로 현관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지지난 주에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아 생일 파티를 하며 6살이 된 명철이었다. 이제 간신히 한글을 떼고 있는 중이었고 혼자서 세수를 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4평 아파트 안에는 명철이와 생후 7개월 된 동생 은아 만이 남아 있었다.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한 아빠가 돌아오는 건 언제나 명철이가 잠이 든 뒤였다. 그동안 두 남매를 보살피는 건 전업주부인 엄마의 몫이었지만 엄마는 벌써 30분도 더 전에 같은 동네에 사는 고모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고 나가버렸다. 보통 엄마는 이렇게 오래 아이들만 남겨 두진 않았다. 아마 이번에도 금세 돌아올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경황없이 나갔던 것일 터였다. 하지만 종종 그런 예상은 어긋나기 마련이고 또한 문제는 그런 순간에 터지곤 한다.

"애애애앵~~~"

집안 전체에 가득 울릴 정도로 요란한 은아의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그 조그만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은아의 울음은 쉽게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명철이는 안절부절못하며 다시 동생이 있는 아기 방으로 갔다. 담요가 두텁게 깔린 방바닥 위에 누워 있는 은아의 얼굴은 붉게 변해 있었고 무엇이 괴로운지 얼굴을 온통 찡그린 채 울부짖고 있었다. 명철이는 자기가 아플 때면 엄마가 그러듯이 자기 손을 아이의 이마에 가져가 얹어 보았다. 하지만 뜨거울 것이라 생각했던 아이의 몸은 오히려 차가웠다. 명철이는 평소와 달리 자기의 체온보다 차가워진 아이의 몸에 놀라며 황급히 주방으로 갔다. 아이에게 따뜻한 것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명철이는 작은 머그컵을 꺼내 들고 주방 한편의 냉온수기 쪽으로 향했다.

동생은 자기보다 피부가 약해서 조심해야 한다고 언젠가 엄마가 그랬던 것을 기억한 명철이는 처음에는 차가운 물을 그다음엔 뜨거운 물을 섞어가면서 컵 안의 물이 적당히 따뜻한 정도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울고 있는 은아의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앗...!"

그러나 너무 서두르던 명철이는 그만 은아가 누워있는 바로 옆에서 자빠지고 말았고 컵을 채우고 있던 물은 그만 아이의 몸 위로 쏟아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따뜻했던 물도 곧 식어버리고 젖은 옷의 물이 증발하면서 은아의 체온은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명철이는 은아의 몸이 계속 차가워지는 것을 보고는 다시 걱정스러워 하며 현관문 쪽으로 갔다.

현관문으로 향하며 막 주방을 지나치던 명철이의 걱정스런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검은색의 네모난 상자모양의 물건......

"엄마, 그건 뭐하는 거야?"

"응.. 이건 음식을 따듯하게 해줄 때 쓰는 거야..."

"우와 정말 따뜻해졌네!"

그 기계라면 은아의 몸을 엄마가 올 때까지 따듯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명철은 곧바로 동생 방으로 뛰어가 울고 있는 동생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울지 마, 은아야.. 오빠가 금방 따뜻하게 해줄게..."

주방 의자 두개를 붙여 우선 동생을 올려놓고 자기도 의자위로 올라간 명철이는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하며 동생을 들어올렸다. 명철이의 키보다 높이 놓여있던 기계의 문이 가씀게에 와 닿았다. 동생을 기계 안에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문을 닫은 명철이는 재빨리 버튼에 적힌 글자들을 읽었다. 하지만 아직 한글을 채 떼지 못한 명철이에게 딱딱한 용어들이 무슨 소리인지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알고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버튼에 적힌 글자들을 살펴보던 명철이의 눈에 간신히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는 글자가 보였다.

'간편 데우기'

명철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윙 소리를 내며 전자레인지 내부의 전등이 켜지며 내용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3.

주의사항

clancy

그는 격리 수용자들만 모아 따로 관리하는 B병동에서 그리 눈에 띄는 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왜 이곳에 격리되어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으니까. 평소의 그는 너무나도 얌전했다. 멍하게 풀린 눈으로 허공을 주시하며 앉아 있는 게 그의 일과의 전부였다. 팔을 잡고 이끌면 이끄는 대로 따라오고 식사 시간이 되면 자기 앞에 차려놓은 음식을 기계적으로 퍼먹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면 조용히 손을 들곤 하는데 그때에도 화장실까지 데려다 주기만 하면 뒤는 알아서 처리를 하곤 했다. 감시하지 않으면 자기가 싸지는 걸 양손에 덕지덕지 쳐 바르곤 온 병동을 뛰어다니는 환자들도 있는 마당에 그는 너무나 고마운 환자였다. 간호사로서 처음 B병동으로 배정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괴팍하기 짝이 없는 환자들의 신상을 파악하기 바빴다. 총 20개의 병실에는 30여명의 환자들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중증의 정신병 환자였다. 개중에는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지른 끝에 이곳에 수용된 사람도 있었고 자해, 자살 시도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아직 말단에 불과한 내가 환자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그들의 간단한 신상과 병력 그리고 주의사항들 정도였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30여명의 환자의 30여개의 차트들을 빠짐없이 외운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결국 어느 정도 환자들에 대해 파악하게 된 건 일을 시작하고 두 달이 더 지나서였다. 그리고 그때 쯤 해서 그 환자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이 현철’이었다. 기록상으로 올해 36이었고 병원에 입원한 날짜는 4년 전이었다. 내가 조회할 수 있는 기록엔 그가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적혀있지 않았다. 다만 사회에서 뭔가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 경우 늘 차트 가장 위에 붉은색 딱지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병명은 망상형 정신분열증이었다. 하긴 이 병동 환자 대부분이 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을 가지고 있으니 특이할 것도 없다. 그에 대한 치료 역시 여느 정신분열증 환자들과 비슷해서 약물요법과 작업치료를 겸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평범한 그에 대해 (비교 집단이 병동의 환자들이었으니 말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것은 그의 간호와 관련한 전임자의 주의사항 때문이었다.

‘전체적으로 얌전하며 요구에 잘 따르는 환자임. 간헐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이나 이때엔 특별한 조치 없이 격리 시키는 것을 권장. ※ 발작시 대면은 피할 것, 행동을 흉내 내지 말 것.’

섬세한 필체로 쓴 손 글씨의 내용은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주의사항을 적은 노트는 간호사들끼리만 돌려보는 일종의 족보 같은 것인지라 내용에 대한 형식적 제한은 없었다. 때문에 그중엔 우습거나 또는 섬뜩한 내용들도 종종 있었지만 이 현철에 대한 글은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원래 발작 증세를 일으킬 경우 자신을 자해하거나 발작으로 인한 충격으로 환자 자신이 다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하기 마련인데 그의 경우엔 ‘무조건 격리’나 다름없는 권고사항이 적혀 있었다. 게다가 당구장 표시까지 해가며 써 놓은 발작시 대처법에 대한 추가 사항은 요상한 구석이 있었다. 대면하지 말 것은 그렇다 쳐도 환자의 행동을 흉내 내지 말라니. 발작을 일으킨 환자를 흉내 낼 간호사가 있기나 한 걸까?

그의 발작을 처음 본건 한 달 전쯤이었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병동 남쪽의 단체치료실에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놈이 온다! 그게 오고 있어!”

그가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걸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치 이 날을 위해 목을 아끼기라도 한 듯, 이 현철은 우렁찬 목소리로 마치 장군이 호령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들어 올린 그의 손끝은 창문 너머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 놀란 다른 환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덩치 좋은 남자 간호사들과 간호실장이 황급히 그를 잡아 누르곤 1인용 격리 병실로 끌고 갔다. 그 동안에도 현철의 입에선 쉴 새 없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놈이 올 거야, 젠장 다들 조심해. 그놈이 오니까 말이야!”

병실에 갇혀서도 한동안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던 이 현철은 어느 순간 다시 조용해졌다. 다른 간호사들은 마치 그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다시 일과로 돌아가 다른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지만 나는 한동안 잠잠해진 격리 병실의 문을 뚫어져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발작을 일으킨 이 현철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쩍 벌어진 입과 깊게 패인 눈 그리고 그 눈 속에서 비춰지던 그의 감정. 그것은 분명 공포였다. 그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발작의 원인이었다. 결국 그날 나는 사람들이 뜸한 틈을 타 격리 이 현철이 갇혀있는 병실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침대 하나와 사람이 간신히 서있을 수 있는 공간뿐인 병실 안에서 그는 침대위에 앉아 있었다. 다시 평소의 이 현철로 돌아온 듯 했지만 곧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의 미동도 않던 것과는 달리 격리 병실안의 이 현철은 몸을 앞뒤로 쉴 새 없이 흔들고 있었다. 그 진폭이 그리 크진 않았지만 속도는 무서우리만치 빨라서 저러다 허리가 고장 나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입에선 작고 낮은 소리로 똑같은 단어가 반복해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재밌다 23, 재밌다 23, 재밌다 23......’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우스꽝스런 단어의 조합은 어딘지 모르게 기괴한 구석이 있었고 그날 이후 나의 머릿속에선 그 말이 떠나질 않았다. 대체 그 말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이 현철은 무엇을 그리도 무서워했던 것일까? 선배 간호사에게 슬쩍 그에 관해 물어보아도 다들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도 이곳에 오기 전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그리고 무엇이 그가 발작을 일으키게 만드는 지도 다들 모른다고 했다. 그저 의사의 지시와 그 잘난 ‘주의사항 노트’에 적힌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그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착한 환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들의 타성에 젖은 무신경한 행동이 어쩌면 오늘 내가 무모한 결정을 내린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게 맞을 것이다. 적어도 난 내가 하는 행동의 이유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 바로 오늘 오후 이 현철은 또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이번엔 화장실에서였다. 여느 때처럼 화장실 앞까지 안내를 받아 들어간 그는 채 5초도 되지 않아 화장실 문을 부수듯 열고나오며 또다시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바지는 무릎까지 내려가 걸려 있었고 그 덕에 드러난 아랫도리에선 한창 오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사람이 그렇게 고함을 질러대면서도 소변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하여간 그는 다시 격리되었고 역시나 지난번과 똑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주간 근무조가 모두 퇴근하고 야근 인원만이 남은 저녁시간 까지도 격리 병실에선 낮게나마 그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일부러 순서를 바꿔 그날 야근을 자청한 나는 함께 근무를 서던 동료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 현철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시선은 아무것도 없는 벽면에 고정되어 있었고 입에선 예의 그 주문 같은 단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밌다 23, 재밌다 23, 재밌다 23......”

나는 조심스레 그의 앞으로 다가가 서선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초점이 없이 흐릿해져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를 그의 눈이 보였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이 현철을 관찰했다. 그의 행동은 전혀 변화가 없이 반복되는 듯 했으나 한참을 지켜보고 있자니 패턴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확히 23번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재밌다 23’을 23번 외우고 나선 잠시 행동을 멈추는 것이다. 그리곤 허벅지에 붙이고 있던 손을 들어 가볍게 손뼉을 한번 쳤다. 그 소리가 너무 작은지라 밖에서 들었을 때는 미처 몰랐던 부분이었다. 그 패턴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의 앞에 선채 천천히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건 일종의 모험이었다. 아니 더 솔직히 얘기하면 일종의 장난이었다. 멍청한 환자를 두고 아무 생각 없이 써내려간 멍청한 전임자의 ‘주의사항’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바보 같은 당구장 표시를 붉은 줄로 죽죽 그어버리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었다. 이 현철처럼 빠르진 않았지만 나름 앞뒤로 몸을 흔들며 난 그의 말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재밌다 23, 재밌다 23, 재밌다 23......”

“재밌다 23, 재밌다 23, 재밌다 23......”

좁은 병실 안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묘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말을 따라하며 난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스물 하나, 스물 둘 그리고 스물 셋.’

‘짝!’

난 이 현철과 동시에 그의 눈앞에서 박수를 쳤다. 마치 그런 나의 행동이 미쳐버린 이 현철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는 또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재밌다 23, 재밌다 23, 재밌다 23......”

나는 그 후로도 두 차례나 더 그를 따라 주문을 외우고 손바닥을 쳤지만 역시나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결국 그 멍청한 당구장 표시는 전임자 맘대로 써 갈긴 낙서에 불과했다. 그를 재면하고 그를 따라했건만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럼 그렇지......”

나는 한숨을 쉬며 병실을 나서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방금까지 이어지던 이 현철의 주문이 끊겨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게 몇 초 전이였다. 아직 23번의 주문을 외우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인 것이다. 등 뒤에서 침대가 낮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 현철의 맨발이 대리석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한기를 느끼며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이 현철이 서 있었다.

신입으로 갓 들어온 병아리 간호사는 근무가 끝났음에도 따로 남아 열심히 무언가를 탐독하고 있었다. 선배가 도움이 될 거라며 준 ‘주의사항 노트’란 것이었다. 이곳 B 병동 근무를 시작한 지 3주도 되지 않았건만 오늘 아침 그녀는 두 번째로 환자의 발작을 보게 되었다. 오늘 발작을 일으킨 환자는 그나마 숟가락으로 자기 눈을 파내려던 첫 번째 환자보다 양호했다. 그저 아침 식사를 먹다말고 벌떡 일어나 고함을 내지른 게 다였으니. 간호사는 노트를 뒤져 그 환자의 주의사항을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얌전하며 요구에 잘 따르는 환자임. 간헐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이나 이때엔 특별한 조치 없이 격리 시키는 것을 권장. ※ 발작시 대면은 피할 것, 행동을 절대 흉내 내지 말 것.’

‘행동을’과 ‘흉내’ 사이에 넣음 표와 함께 ‘절대’란 단어가 추가된 것이 특이했다. 대체 어떤 환자기에 이런 괴상한 주의사항이 따라 붙은 건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제의 환자가 갇혀있는 격리병실 쪽으로 가보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환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자는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주문과도 같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두 단어.

“재밌다 24, 재밌다 24, 재밌다 24......”


마지막 이야기는 학생시절 들었던 이야기를 옮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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