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의 회고록 중에서.
장경학 교수님은 1916년 함경남도 문천군 출생으로, 6년제 경복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대학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하여 (*당시 조선에는 조선사람이 다닐 수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거의 없었음), 마쓰야마고등학교에서 다시 3년을 수학한 후 1937년 교토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이후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에서 법학을 오래동안 가르치셨고 장준하, 조지훈 선생과 함께 사상계의 편집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제가 대학 재학중이던 시절에는 이미 희수를 넘긴 연세에도 새로이 불교학 박사학위를 따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두른 기억도 납니다. 어쨌든 참 기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문에는 진지했지만 옛날 사람이다 보니 여학우들에 대한 배려도 별로 없었고 ("이 년아, 떠들려면 내 수업에서 썩 나가! 랬대나요.) 제 지도교수 중 한 분이었던 모 교수님은 "아 장 교수님? 그분 내 박사 지도교수님의 은사실 텐데. 근데 그 분도 오래 된 분이라 가끔 사리분간 못하고 일본을 좋게 보는 발언을 해서 곤란할 때가 있었지. 뭐 그 시대 살아본 분이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마는..." 이라 하시더군요.
어쨌든지 이 원고를 담당 조교였던 선배의 부탁으로 교열작업 했던 게 벌써 오륙 년 전인데, 그 중에서 종로의 학생 육거리와 관련된 부분 몇 부분만 발췌해서 올려봅니다. - 아직 출판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계속해서 무언가 가필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원고의 일부를 살짝 공개하는 것이므로 삼가 양해를 바랍니다. (*제 옛 블로그를 아시는 분들께. 그 때 언급했던 것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본문의 '가와카미 하지메 의원면관 사건', 일명 '다키가와 사건'이 그 부분입니다.)
단, 원문에는 워낙에 한자가 많은데다 문장 구조 자체가 옛 일본식 문장의 직역에 가깝게 적혀 있어서, 우리 글에 맞게 교열을 좀 했음을 밝혀둡니다. (그래도 한자는 엄청나게 많군요.)
1929년은 세계의 커다란 地殼變動의 해
景福宮 넓은 뜰에서는 日本施政20周年博覽會(9.12-10.30)가 열려 13도에서 모두 관광을 오는 듯 흥청거리고, 南山에는 朝鮮神宮을 건설하여, 13도에서 血稅를 증발하여 각도 10계단씩 130개 돌계단을 만들어, 그 곳을 걸어서 올라가게 하는 듯 흥청거리다, 好事多魔인지, 4日 후, 光州에서 이른바 學生事件이 터지고, 그것이 전국 학생 抗日운동으로 번져 갔다.
서울에서는 11월 4일 각 고등보통학교가 일제히 거사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4일 아침 운동장에 집결하여 기념행사를 시작하자, 종로서의 기마경찰의 수십 마리의 덩치가 큰 말들이 삽시간에 운동장에 난입하여, 똥과 오줌을 갈기면서 학생들을 포위하여 한곳에 모아 종로서로 몰고 가니 작전은 끝났다. 우리들 1학년생은 가담하지 않고 낭하에 몰려서서 창 밖으로,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학교 당국의 처벌도 가혹했다. 전교에서 퇴학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나의 보통학교 선배 중 4년생인 양 朴氏가 퇴학되고, 培材고 4년 朴득순, 中央고 3학년 朴有鉉이 퇴학이 되고 元山 樓氏高女의 朴金善누님도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는데, 그들은 조선 내의 타 학교에의 편입이 정책상 엄금되었다. 교육상 사형집행이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배출구가 있었다. 그것은 일본의 중학교에서 이런 학생들을 받아주는 곳이 있었다. 내가 아는 것으로는 교토에도 한 곳이 있었다. 그 학교는 조선 학생을 모집하여 살려 주는 사립학교이다. 또 다른 곳에도 몇 개 되었다. 조선에서는 중학교 신설을 억제하여, 보통학교를 마치고 교육열이 차차 높아지게 되자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다액의 경비를 쓰면서 중학 때부터 일본 유학을 보내게 되니, 일본으로서는 그런 돈을 앉아서 받아먹게 되는 국가적 이득이 되었다. 1년간 조선에서 일본으로 학비로 건너가는 돈이 상상 외로 컸다. 그래서 조선에서도 民立大學設立을 주장하지만 총독부에서 항상 묵살하였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조기유학 등으로 미국으로 유출되는 돈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인데, 그와 유사한 현상이 있었다.
대공황이 시작되자 조선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1929년 1월 14일 元山부두 노동자 등 1,400명이 노동조건 등을 개선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단행했다. 한편 日本에서도, 帝國大學 교수들이 사회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되고 희생자가 속출하고 학생들은 조직을 강화하여 상아탑이 진보사상의 사령부화했다. 그 중 주요한 사건은 교토대학 교수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의원면관(依願冤官)사건(1928.4.23)을 시작으로, 동경대학 大森(同4.24), 九州大學 向枝교수(同5.4) 파면이 이어졌다.
한편 일본 국내의 정당정치의 부패는 식민지인 조선에까지 飛火되었다. 조선총독부의 독직 사건이 발생하여(1929.8.17) 이것이 山梨半造 총독 파면(同 9.12)으로 급히 이어지면서 공권력의 권위는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日本은 정당 정치의 부패, 사회운동의 격화, 학원의 공세에 충격요법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켜(1931.9.17), 다음해 滿洲國建國선언(1932.1.1), 국제연맹 탈퇴 등으로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Hitler가 독일 수상 자리를 차지했다(1933).
나의 舍兄 모씨도 시대 급변에 대응키 위해, 여러 사업을 정리한 후 文川邑에서 中外日報支局을 시작했다. 그 때문에 나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신문을 많이 접했다. (그 영향으로 뒤에 대학교수 시절 10년 동안, 각종 일간신문의 논설위원을 겸무하게 된다.) 舍兄의 가는 길은 험난했다. 1929년 5월, 君民會사건으로 逮捕되어, 그 후 元山 및 咸興 등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민간 자치 조합인 汱조합을 관제 水利조합으로 만들겠다는데 반대 투쟁 중 官에서 群衆대회를 허가해 주지 않아 무허가로 집회한 죄목인데, 이는 당시의 악법의 표본이었던 치안유지법과 재판상의 예심제도 악용에 의한 희생물이 된 것이었다.
寄宿舍
우리 중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었다. 北岳山 산자락 소나무 숲 속에 위치하여 한적하고 공기 맑은 곳이다. 학교 설립 초기 임시로 2학년까지 임시 교사로 쓰다가, 아래켠에 본 교사가 완성되어 이사한 후, 빈 교실을 온돌방으로 10개로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 앞뜰에 테니스 코트 3개로 사용하는 공간이 있어서, 거주와 운동, 그리고 공부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시설이었다.
林光鎬라는 동급의 친구가 있었다. 그는 元山보통학교 출신인데, 우리 학교 조선어 선생으로 기숙사 舍監을 겸하고 있는 趙鍾立선생은 바로 林君의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 중 발탁되어 우리 학교에 올라온 분이다. 林君과 같이 가서 입사를 원했더니 학기 도중인데도 쾌히 허가해 주셨다. 그래서 중간시험도 끝난 5월 하순에, 홍파동 하숙을 나와 둘이서 기숙사에 들어갔다. 기숙사는 10室인데 큰방에는 7명, 작은방에는 5명, 모두 약 60명이었다. 모두 자치적이다. 상급생으로 구성된 3인의 임원이 식사계획표를 짜서, 거래점인 靑雲商會에 준다. 1日 3食인데, 대체로 콩나물국과 김치깍두기가 보통이다. 月 10円정도이나(下宿者는 合宿인 경우 10円, 독방 15円 정도) 下宿보다 실속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 점심도 기숙사에서 먹으며 도시락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좋고, 또 먼 데 있는 하숙보다 가까워서 종 치면 교실로 내려갈 수 있어서 편했다. 나는 시골서 집에 있는 학교에 다니던 습관이어서 하숙은 불편했다.
아침 7시 기상. 세수한 후 앞마당에서 체조를 한다. 각 실장이 교대로 지도한다. 눈 오는 날이나 무더운 복중이나 계속한다. 규칙적 생활을 할 수 있고, 그것이 건강에도 유익했다. 13도 아이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각 지방의 문화 교류가 되어서 지리학, 역사학의 실무 교육이 된다. 앞마당이 넓어 테니스, 축구 등 무엇이든 즐길 수 있다. 홍파동 하숙 때는 왕복 90분이 통학에 소모되었다. 기숙사에 들어온 후에는 그 시간이 공짜로 생긴 셈이다.
기숙사 생활에는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저녁 때 공부하다가 8시쯤 되면 출출해진다. 간식으로 호떡을 사 오기로 하고, 제비를 뽑는다. 정문을 나가, 옥인동 입구 파출소 옆에 중국 호떡집이 있다. 두 사람이 같이 나가서 사 온다.
선배들이 잘 가르쳐 준다. 李亨淳선배는 1년 선배다. 수원군 출신이다. 이미 결혼도 한 듯 어른 티가 난다. 2학년 때 한 방에 있었는데 그가 실장이었다. 수학의 인수분해에 들어갔으나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참말로 친절히 거듭하여 가르쳐 주었다. 그는 졸업 후 경성의학전문을 응시했다가 실패하고, 거듭 도전하여 4년 후에 합격했다. 그는 의사가 되어, 부산 영도에서 제일병원을 개업했다. 나는 대학 졸업하고 부산에 들렀다가 李선배를 찾았다. 오래간만에 만나니 퍽 반가웠다. 그의 동생은 나보다 1년 후배인데 역시 의사가 되어, 또 영도의 형님 병원과 이웃하여 개업하고 있었다. 영도에서는 형제 병원으로 이름이 알려진 병원이었다.
정기철(丁基喆)선배는 李亨淳선배와 동기이다. 나와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쓸 때 1년 선배이므로 실장이었다. 그는 우등생이며, 그저 공부밖에 모르는 학생이었다. 책상 위에 언제나 작은 유리병을 두고 있었다. 그 속에는 소금물이 들어가 있었다. 밤 9시 반에 사감 선생의 점검이 있고, 그 후 반 시간이 자유시간이고, 10시에 소등한다. 그는 점검이 끝나면, 창문을 열고 유리병 속의 염수를 가지고 크게 소리를 내면서 양치질을 하고는 창문 밖에 소금물을 홱 하고 밖으로 내뱉는다. 그 소리를 들으면 불쾌감이 난다. 양치질을 하는 본인은 느끼지 못하지만, 그걸 듣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 그걸 의식하지 않고, 언제나 그 시간이 되면 빠짐없이 꼭 남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런데 이 사람은 평안남도 출생이다. 그의 방언이 희극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丁基喆은 ‘정기철’이라 말해야 할 테인데, 사람들은 우선 그를 보고 ‘덩기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름부터 희극의 소지가 있다. 이를테면 긴 문장이 된다. “‘덩기털’이가 ‘던타’(전차)를 타고 ‘덩거당’(정거장)에서 ‘덩두’(定州)로 가다가 ‘덤심밥’(점심밥)을 못 먹어 ‘둑었다’(죽었다).” 이런 말을 듣고도 웃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세월은 흘러 내가 일본서 대학 3학년 때 평양에 간 일이 있었다. 교토대학 조선학생 동창회 회장으로 졸업한 선배들을 찾아가서 동창회지를 낼 돈을 거두러 갔던 때이다. 선배님들의 안내를 시내 구경을 하다가, 그 곳 종로 거리에 갔을 때이다. 길옆에, 정기철 내과 병원 간판이 걸린 건물이 보였다. 나는 ‘덩기털’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 곳으로 들어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았다. 꿀렁꿀렁 염소 양치질 소리로 매일 저녁 혐오감을 유발하던 것을 생각하니, 선뜻 나설 생각이 없었다. 일편단심 병원에만 열중하여 평양에서는 우리 대학 동창들과는 거래가 없기 때문인가 했다.
閔洪基선배는 김포군 출신이며, 역시 우등생이다. 교과서 공부만 파는 학생이다. 나와 같은 방에 있을 때 실장이다. 그와 같은 학년인 강원도 伊川出의 金汶鶴은 문학청년의 흉내를 내는 터이니, 그와는 전혀 인종이 다른 셈이었다. 어느 날 그가 우리 방에 와서 놀다가, 奇想天外의 발상으로 陰毛의 長短을 시험하자고 제의했다.
고지식한 閔실장은 꽁샌님을 상대하지 않자, 金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듯 격분하여, 室對決鬪를 소등 후 기숙사 뒤 동산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제의해 왔다. 진용은, 우리 방은 나와 1년 후배인 韓炳玉(충남 대덕 출신)과 또 한 사람 해서 모두 3명이 나가기로 하고, 상대방은 제안자인 실장 金汶鶴 자신과 崔鍾秀(忠北 永同出, 3년생, 秋風嶺驛 吸水夫의 아들)외 數人이 대결하기로 정했다. 인원 점검 후 消燈되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기숙사를 빠져나와 北岳 밑 아카시아 나무들이 옷을 벗고 나란히 서 있는 언덕받이로 나갔다.
12月 초순이라 달은 뜨지 않았으나 흰 눈이 쌓여서 희미하게 밝았다. 삭풍이 불면서 나뭇가지가 휭 하면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시작의 신호로 난투극이 개시되었다. 주먹에 맞아서가 아니라, 손 속에 파묻힌 아카시아 나뭇가시에 발등과 손등이 찔려 피가 흘렀다. 시작할 때는 두려웠지만 난투가 개시되고 나니, 맹목적으로 덤빌 뿐이었다. 이렇게 30분간 치고 받고 하다가 모두 기진맥진하여, 휴전을 선언하고, 땀을 흘리며 방으로 각각 돌아왔다.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소 먹이러 다닐 때, 자연에 의해 단련받은 용기를, 이번의 결투에서는 인간으로부터 다시 용기를 배웠다.
社會變動
1932년 1월 19일 미쓰코시[三越] 경성지점이 한국은행 건너편 충무로1가에 신축 건물이 완공되어 개점하였다. 이 건물 일본 동경 日本橋에 있는 本店의 축소판으로 지은 것으로, 5층으로 현재 新世界백화점으로 남아 있다. 그 건너편으로 本町通り(혼마치도오리, 지금의 명동)가 시작하며 그 곳에는 書店들이 많았다. 신간서를 취급하는 大阪屋號書店에 가면 日本에서 오는 신간서가 가득했다.
金子文子의 ‘누가 그 女子를 그렇게 만들었는가’를 샀다. 그 내용은 저자의 成長期를 적은 책이다. 나가노[長野]縣이라는 日本 中部山岳地方의 雪村에서 태어나서, 고생하면서 소학을 겨우 마치고 東京으로 나와서 직장에 다니면서 겨우 생활을 이어 나가는 때, 조선 청년 朴烈을 만난다. 朴은 무정부주의자이며, 文子는 그를 만난 후 사회적으로 눈을 뜨게 된다. 그 후 朴烈은 천황이 타고 가는 자동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未遂로 체포되어(大逆事件) 長期刑으로 수감 중,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출감하였다가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이승만의 초대 내각의 농림 장관에 임명되어 현해탄에서 아깝게 실종되었다는 풍문이다. 그 당시는 한일간 국교도 아직 수립되지 않고 정기 연락선이 없었기 때문에 밀선을 타고 나가다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는 듯하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朴烈이 中野형무소에서 服後中 所長의 특별 조치에 의해, 면회 온 妻子와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는데 누군가 그 장면을 촬영하였는지 현장 사진이 신문에 보도되어 法務長官은 解任되고 倒閣의 소동까지 벌어진 일도 있었다.
나는 중학 시절에 日本 朝日新聞을 구독하였다(紙代 1円 50錢, 月賦金 1円 50錢). 1933년 봄, 同紙 연재로 호평을 받고 있던 著名作家 山本有三의 「女子의 一生」의 게재가 중단된 사건이 있었다. 作中 主人公 女醫師가 院長의 강요로, 가난한 노동자 아내의 낙태수술을 해 주었다는 내용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당시 낙태는 원칙상 엄금 중이었다. 作家도 逮捕되었다.
또한 “女子의 一生”에서는, 당시 日本의 社會運動이 과격해지는 실정을 반영하여, 主人公이 女醫師의 아들이 고등학생인데, 그들의 독서 경향이 달라진 데 대해 언급하였다. 즉 종래에는 敎養 中心으로 부르주아 취미에 물들어 Goethe의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로테(Lotte)를 즐기거나, Heine를 읽는데도 사랑과 낭만의 詩를 애호하였으나, 지금은 경향이 바뀌어 Heine의 革命의 시를 즐기게 되고, 따라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Marxism의 실천 운동에 빠진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묘사했다.
서울의 두 개 중요 한국 신문 중 동아일보는 민족지로, 조선일보는 사회주의 노선을 취한다고 보았다. 총독부 당국은 조선에서 위험시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양 신문에 싸움과 경쟁을 부추겨, 조선의 독립운동을 약화시키는 고등 정책을 꾀하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소설가 李光洙가 있었으며, 그는 동지에다가 대중소설을 계속 발표하는데 대하여, 조선일보에서는 홍명희의 “임꺽정”을 실어, 이광수의 “이순신” 기타와 대항하였다. 동아일보의 돈줄은 본래 호남 김성수 집안인데 대해, 조선일보는 평양의 금광으로 부자가 된 方應模가 인수하여, 진보적 언론인을 다수 채용하여 사세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1931년 가을에는, 조선일보에서 신문 지상 처음으로 3백원 현상 당선 소설 韓仁澤의 「旋風時代」를 연재하여 주목을 받았다.
1932년 L.A. Olympic과 우에스기[上杉] 體育先生
1932년 7월 LA Olympic에는, 서울의 金恩培 선수 등이 일본 팀으로 마라톤 선수로 참가했다. 그 덕으로 우리 학교 체육 교사 上杉선생이 인솔자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LA에 갔다 온 후 교수 방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아침 조회 때 입장, 퇴장을 Olympic Game 식으로 고치기도 하고, 체조 시간에도 반 시간은 체조를 하고 나머지 반 시간은 북악산 기슭에 올라가 노래를 하였다.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체육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은 체조 방식이라고 했다. 노래도 일본 노래가 아니라, 예컨대 숙명여고 음악 선생 김용환이 작곡한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새 봄이 왔네」의 노래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또 북악산 기슭의 땅을 파내어 농구장을 만든다든가, LA Olympic에 갔을 때 마라톤 선수들 환영식에 참석하여 그 곳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미국에서 교포들이 자유롭게 사는 모양을 보고 감명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일본에서도 저 북쪽 지방 출신이므로 서남쪽 일본인들처럼 비국가주의였다. LA에서 귀국할 때에는 덴마크 선수단을 데리고 와서, 서울 운동장에 시범경기를 하여 서울 시내 각 중학생들에게 덴마크의 체육가 니일스북이 제창하는 국민체육, 사회체육의 시험을 보여 주었다. 특히 음악으로 체조하는 라디오 체조 시간을 서울 방송국에 재편성하도록 했다.
그런데 뜻밖의 비극이 있었다. 1933년(3학년 3학기) 3월 1일 우리 3학년 丙組(4반)가 주동이 되어 3.1萬歲記念으로 盟休를 단행했다. 아이들이 수업거부하고 교문으로 달려나가 가두시위를 할까봐, 이미 교사들이 이층 복도에 모여 와 지키고 있었다. 아이들이 교실에 뛰쳐나와 계단을 뛰어내려가려고 하자 교사들이 육탄전으로 아이들을 잡았다. 이 난투 속에서, 울산 출신 宋濬이란 아이가, 자기를 잡아 안은 上衫교사의 옆구리를 한 대 들이받는 바람에 교사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생겼다.
3.1 만세 운동 기념으로 단행한 우리 반은 예상외로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 上衫교사에게 상처를 입힌 송준은 퇴학으로 해결되고 형사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그 때 급장인 張洪植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짐작컨대 그는 시내 한복판인 茶洞에 사는 富豪이므로 미리 맹휴 정보를 사전입수하고 결석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얄궂게도 부반장인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정상적으로 학교에 나와 맹휴의 뒷수습을 위해 학교와 수차례 교섭을 하는 등 고통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사건을 몸으로 체험함으로써 ‘사람’에 대한 용기를 실제로 체험하였다. 우리 반이 맹휴를 하였다는 이유로, 얼마 후 신학기에 4학년 반을 구성할 때 우리 반 아이들을 3개로 쪼개어 다른 3반에다 혼합시켜 학교 창립 이래 처음으로 1학년에서 졸업까지 반을 그대로 올라가게 하던 것을 개선하게 되었다. 나는 甲組(1반)로 가서, 웬일인지 급장이 되고 또 來島선생이 담임이 되었다. 학교로서는 기구와 인사양면에서 일대 개혁을 단행한 셈이었을까?
修學旅行
1. 1930(14세) 2학년, 5월 開城으로 갔다.
방원이가 새 王國 건립의 방해물이라고 정몽주를 암살한 善竹橋의 白色 돌멩이 위 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박연폭포도 보았다. 九龍瀑처럼 높은데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넓은 바위를 하천 물이 폭넓게 흘러내리는 모습이다. 볼거리가 별로 없었다.
2. 1931.5(15세)3학년, 平讓․.安東縣까지. 新義州 下車, 압록강 철교를 철로 가운데 놓인 좁은 널판을 밟으면서 도강, 국경도시 안동현에 도착, 市內구경. 점심 먹으러 중국집 2층에 올라가니 우리 一行보다 더 많은 중국 아가씨들이 들어와 호박씨를 까 주면서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다. 외제상품이 범한(국제자유무역지)러시아 드롭스, 미제 담배, 러시아女子 스트립 그림엽서 등 거리에 범람. 張學良 국가減亡 4個月 전의 쇠락의 전주곡인가. 이해 9월 17일 만주사변 발발. 일군 1개월만에 만주지배 완료하다.
3. 1932년. 4학년 16세. 5月. 금강산 여행.
「여행안내서」를, 친구들 5명이 위촉받아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여행 떠나기 전에 나누어주다. 당시 이런 안내서를 구입할 수 없었던 탓인지, 선생님의 명에 의해 이를 만들었다. 안내문은 대개 내가 작성했다. 금강산은 나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요청을 받았다. 야간열차를 타고 가다가, 철원에서 금강산 전철을 갈아타고 내금강역 하차, 여관에서 아침식사 후, 내금강을 구경하고, 저녁에 내금강에 빡구(back)하여 저녁 후 전철로 철원에 나와 경원선으로 갈아타고, 신고산, 안변에 와서 동해북부선을 갈아타고, 외금강에 도착하여 오후 가까운 온천에 갔다 와서 일박하고 다음날 신계사를 시작으로 구룡폭, 내금강을 일주하고 돌아와 여관에서 일박. 해금강은 생략하고, 다음날 아침 차로 온 길을 ‘빡꾸’하여 귀경했다.
4. 1933년(17세). 5학년. 만주국 여행. 新京(창춘:長春), 펑텐[奉川], 안산(鞍山)제철소, 푸순[撫順]탄광, 따렌[大連], 뤼순[旅順] 등을 구경. 어딜 가나 일본군이 만주 땅을, 겨우 몇 주일 동안에 張學良군을 소탕하고 점령했다고 하는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설명하고 있었다.
신경에서 여순까지, 12시간 동안 열차는 직선으로 달렸다. 가도 가도 광활한 강냉이밭과 콩, 수수밭이다. 지하자원이 가득 차 있어서 滿자를 붙인 것인지? 旅順에 가서는, 1905년 격전지 203高地의 정상에 올라가서, 일본군이 육탄전으로 기어오르다가 러시아군의 총알에 맞아 4만이 전사했다는 능선을 내려다보았다. 여순 공과대학에 가서, 우리 학교 팀과 친선 농구 시합도 했다. 다음날 여순항을 떠날 때, 안중근 의사를 회상하니, 발길이 무거웠다.
만주 땅은 수천 년간 그 곳에 살았던 백성들과 우리는 역사를 공유한 고장이다. 나는 대학 졸업한 후 1943년 만주국 고문 시험에 합격했지만, 부친님의 완강한 반대로 부임하지 않았다. 2년 후 일본은 패전했다. 그 때 부친님의 상식의 판단이 나의 얇은 지식보다 현명한 것 같다. 만일 내 고집으로 만주에 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다시 뒤돌아보면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왔다. 2년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는 평온을 유지하는 것일까?
下宿
시골서 올라온 아이들은 하숙한다는 것이 큰 골칫거리이다. 입학한 후 서대문 밖 홍파동에서 하숙했다. 학교는 북악산 밑 청운동이므로 통학거리가 멀었다. 시골서 초등학교는 바로 집 앞이었다가 이제 먼데서 통학하는 것은 시간상, 경제상 좋지 못했다. 특히 서울역에서 기차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집 생각이 나서 괴로웠다. 누구보다 일곱 살 되는 동생 생각이 나서 하숙방의 적적함을 참을 수 없게 하였다.
처음에는 전차를 타고 다녔다. 서대문 사거리에서 타고, 광화문 사거리에서 와서 효자동행을 갈아타고 다니는데 45분이 걸렸다. 그 후 동급생 林光鎬를 만났다. 그는 元山에서 왔는데 홍파동에 사는 작은아버지(서울대 의학부 인턴)집에서 살았다. 전차를 그만두고, 홍파동에서 고개를 넘어 사직동 공원에 내려가서, 필운동쪽으로 들어가서 창성동으로 빠져 청계천으로 흐르는 개천을 따라 학교에 가는 것도 45분이 걸렸다. 그래서 그 후에는 그와 둘이서 걸어서 통학했다. 둘이서 이야기하면서 다니면 재미가 있어서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그는 원산이라는 도시아이여서 극장 구경하는 것도 알았다. 전차를 안타고 모은 돈으로 10전짜리 3류 극장인 우미관에도 구경 가고 5전짜리 호떡을 사먹는다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다.
趙鍾立이라는 조선어 선생은 그의 모교인 元山보통학교에서 올라온 분인데 기숙사감이기도 했다. 조선어 선생님 주선으로 학기 도중에 둘이서 기숙사에 들어갔다. 기숙사는 모든 면에서 좋았다. 아침에도 종소리 듣고 학교에 내려가면 된다. 그 때까지 예습할 수 있다. 식사도 하숙보다 좋았다. 친구들이 많아서 뛰어놀 수 있고, 기숙사에는 정구 코트가 두 개나 있어서 운동도 할 수 있어서 고향생각을 할 사이가 없었다. (기숙사 생활에 관해서는 따로 썼다.)
기숙사가 좋기는 했지만, 2년간 지내다 보니 싫어졌다. 1931년(15세) 3학년이 되자 하숙으로 나왔다.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가 昭格洞 盧奉植씨 사랑채에 들어가서 1년 아래인 金斗鉉과 한방을 썼다. 노씨는 논산의 大地主로 서울에는 아이들 공부를 위해 큰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은 간혹 올라올 때가 있으나 대체로 시골서 지냈다. 서울 올라올 때는 사랑방에서 가야금을 타는 등 풍류를 즐기는 분이나, 안채에는 자궁병으로 고생하는 부인을 두고 있었다. 사랑채에는 1년 아래인 노영환과 그 동생, 그들의 가정교사인 제1고보 4년생, 그리고 김군과 나는 한방을 썼다. 안채와 사랑채는 별채이고, 밥상은 시골서 온 머슴애가 가져오고 가져갔다. 그 아이는 시골서 데려왔는데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아가 가자 어서 가자, 백두산 거리에 해 저물어 간다.” 고 노래를 잘 불렀다.
방도 넓고 깨끗하고, 볕도 잘 들고, 식사도 기숙사 같지 않고 자택이나 다름없이 잘 나왔다. 김군은 은진미륵이 있는 논산이 고향이며 이 집과 같은 고장 사람들이다. 안채에는 식모 외에 노씨 부인의 시중을 보는 아가씨가 있었다. 노씨의 조카로 강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尋常科(女中) 2년을 마치고 그곳 은행에서 근무한 분이라고 했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문부터 다르기 때문에, 다른 집과 같은 봉건적인 구조인 셈이었다. 서울 와서 처음으로 사람답게 사는 환경을 만나게 되어, 생활도 안정되어 공부도 잘 되었다.
5월의 어느 날 저녁 외출해서 돌아올 때였다. 팔판동 파출소 뒤를 돌아 골목길에 접어들면 그 집이 보인다. 첫 여름에는 해가 지고 회색의 황혼이 좀 길게 이어진다. 헤겔도 황혼이 짙어갈 때 ‘미네르바’의 부엉새(지혜의 여신)가 활개치면서 날기 시작한다고 했다.
안채 대문 앞에 흰옷 차림의 아가씨가 서 있었다. 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다고도 한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눈이 아프냐?” 고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니예요, 좀….” 하면서, 다소곳이 말문을 열었다.
며칠 후, 학교에서 돌아와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것은 내가 여성으로부터 처음으로 받은 글이었다. 다음날 나는 밥상을 물릴 때 빈 밥그릇에 쪽지를 넣고 뚜껑을 덮어서 물렸다. 머슴애가 안채로 들고 가는 순서이다. 이것만으로도 당시로서는 여성에 대한 욕구는 충족된 듯하다. 그 이상의 것은 바라지도 아니했다. 사랑채의 부엌은 별도로 있었다. 안채로 통하는 작은 쪽문으로 격리된 곳으로, 내 방 앞이었다. 내 방 앞 좁은 마루에 앉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