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코 여사의 독(毒)만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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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글을 올리면서 교수님의 회고록 원고를 꺼내어 본 김에, 아예 이것저것 한번 다 올려볼까 합니다. 설마 이런 글을 퍼가시는 분은 없겠지요. (아니, 진짜로 퍼가게 된다면 좀 골치아파지게 되지만.)

1933년 교토제국대학에서는 일종의 사상탄압 사건인 일명 '다키가와 사건'에 의해 교토법대의 진보적 지식인 상당수가 의원면관(자진사퇴) 형식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다키가와 사건 자체는 좀 길기도 하거니와 형법의 이론체계인 객관주의/주관주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므로 나중에 기회되면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 외전격인 <기쿠코 여사의 독 만두 사건>을 한 번 소개해볼까 합니다.



(중략)



히로세 기쿠코(廣瀨菊子)의 독(毒)만두 사건



[사건의 개요]

변호사로 변신한 다키가와씨가 맡은 사건 중 주목되는 것으로, 이른바 ‘독만두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1939년 4월 25일 고베[神戶]에서 발생한 살인 및 살인미수 사건인데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히로세 기쿠코[廣瀨菊子]는 1924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여의사였다. 졸업 이듬해에 의사면허를 받고 고베 시민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던 교토대학 의학부 출신의 사토[佐藤幹男]의 거듭되는 청혼을 받았고 결국 1931년 10월 그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사토가 학위를 받기 위해 모교에 가서 연구를 하게 되자, 기쿠코는 고향인 고치[高知]시에 돌아가 병원을 개업하였다. 기쿠코는 남편의 성공을 단 하나의 염원으로 삼고, 당시 세계를 강타한 경제공황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여 수입의 거의 전부를 남편의 학비로 제공하면서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사토는 1936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고베에 있는 마이코[舞子]병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 후, 사토는 조강지처의 은혜를 배신하고 ‘가정주부로서 소양이 부족하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시집 식구들까지 그 부당한 요구에 가담하는 가운데, 기쿠코는 깊은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그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협의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녀는 그 후 고베로 다시 나와, 요시무라[吉村]병원에서 일하면서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자신이 헌신적으로 남편의 학비를 벌고 있는 동안 사토는 ‘나는 아직 독신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다녔다는 소문과, 이혼 직후에 사토가 어느 부잣집 딸과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침내 분노가 절정에 이른 기쿠코 여인은, 오사카 다이마루[大丸]데파트(백화점)에서 구입한 만두에다가 티푸스균을 배양하여 응축한 원액을 발라서 포장하여 사토 원장 자택으로 탁송하였다. 그리하여 선물로 도착한 그 만두를 먹은 가족 12명이 티푸스에 걸렸고, 사토 외 11명은 얼마 후 완쾌되었으나 1명은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신문에 연일 크게 보도되었으며 주간지에도 특집으로 다루어지는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매스컴의 논조는 대체로 히로세 기쿠코 여인에게 이해와 동정을 보내었다.

이와 같이 사건이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다키가와 변호사는 그의 친구인 전 교토대학의 학부 조교수 요시무라 박사로부터 기쿠코 여인의 변호의뢰를 받게 되었다. “세상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인지 변호를 맡겠다는 신청자가 많지만, 기쿠코 측에서는 자네에게만 변호를 맡기겠다고 하니 꼭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고베는 오사카에서 출퇴근하기에는 다소 먼 거리였지만, 다키가와 변호사는 대학 동기인 누마다[沼田]변호사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기꺼이 변호를 맡았다.

이후 재판에서 제1심인 고베 지법 제2형사부는 기쿠코 여인에게 상해 및 상해치사죄로 징역 3년(1939.11.4)을, 제2심에서는 오사카 공소원(控訴院) 제2형사부는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징역 8년(1940.3.4)을, 그리고 상고심인 대심원(大審院) 제1형사부는 상고기각(1940.6.27)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과정에서 특히 쟁점이 되었던 것은 사망과 티푸스균 사이의 인과관계였다. 다키가와 변호사는 장티푸스의 사망률이 크지 않다는 각종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상해가 아닌 살인 혐의에는) 그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정의 옛 스승과 제자들]

이 사건이 유명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다키가와 변호인을 비롯하여 관련 판사, 검사 모두가 교토대학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1심, 2심, 그리고 상고심의 관여 검사 3인과 예심담당 판사가 모두 대학 시절 다키가와 변호사의 제자이며, 제1심 재판장이 그의 1년 후배였고, 공소심 재판장은 그와 같은 재판소에 근무했던 사람이며, 상고심 재판장이 그의 10년 선배였던 것이다.

사건이 매듭된 후 다키가와 변호사는 “옛날에 가르친 학생인 검사의 논고를 반박하는 것은 어른답지 못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 괴로웠다. 아마 제자인 판사, 검사들도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제1심 관여검사이던 사카이[坂井]도 뒷날에, “가르쳐주신 선생님을 앞에 두고 논고를 하는 것은 매우 거북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사건이 끝나고 한참 지났을 때 사석에서 다키가와 변호사는 제자 사카이 검사에게 말했다.

“자네의 논고는 피고인 기쿠코에게 지극히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그쯤 되면 변호인이 변론을 할 필요도 없겠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정작 자네가 구형할 때에는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이 상당하다'고 하는 바람에 놀랐지 뭔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껄껄 웃었다. 그러자 사카이 검사는 대답했다.

“논고와 구형이 서로 엇갈린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란,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국제정세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대전이 발발한 상태였고, 일본은 이 당시 이미 진주만 기습을 감행할 준비를 착착 진행 중이었다. 따라서 국내 치안을 위해 그와 같은 사건도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검찰의 방침도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제1심에서 상해 및 상해치사죄로 징역 3년이었던 것이 제 2심에서는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징역 8년이 된 것도 재판부가 ‘비상시국’을 감안결과라고 할 것이다.

(註: 의외로 일제 당시의 재판에서 단순사건에 대하여는 형량구형이 높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땅에서 벌어진 3.1운동이나 105인 사건 등도 형량 자체는 징역 1~3년 정도로 과중형량은 아니었죠. 문제는 이 당시의 교도행정 자체가 고문과 폭력, 그리고 만성적 영양부족 등, 형무환경 그 자체가 지옥이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유관순 열사가 감금 몇달만에 서거했는지 생각해 보시면 될 듯합니다.)


[그 후의 피고인 기쿠코]

그리하여 재판에서 8년 징역형을 받은 기구코 피고인에 대하여, 세상 여론은 대단히 동정적이었다. 심지어 “피해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히로세 기쿠코 아닌가.”라고 쓴 신문도 있을 정도였다. 이에 반해 사토 병원장에 대해서는 비난이 쏟아졌다. 기쿠코의 변호를 맡았던 다키가와 변호인에게는 “사토 의사는 징역 몇 년을 받았나요?” 하는 문의가 오기도 했다.

이후 히로세 기쿠코는, 형기의 3분의 1을 복역하고 가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만주에 가서 한지 의사 자격으로 일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귀국, 고향인 고치 시의 시의원선거에 출마한다. 그녀는 그 선거에서 최고득표로 당선하였다. 그리고 다시 의사면허증을 교부받아, 고향에서 덕망 있는 의사로 일했다고 한다.


[기쿠코 재판 보고 강연회]

이 사건에 대해 고베 지방재판소는 재판이 개정된 지 얼마 후인 1936년 6월 어느 무더운 날, 교토 시내 고쇼(御所:대정봉환 이전에 일본 덴노가 교토에서 살았던 궁궐) 근처에 있는 시 상공회의소에서, 다키가와 변호인이 주요 보고자로 참석한 가운데 이 사건에 대한 보고강연회를 열었다. 나는 선배들과 같이 가 보았다. 큰 강당의 아래 위층을 몽땅 가득 메운 인파는 복도에까지 넘쳐 어디를 가나 연단에 선 연사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청중은 그 자리를 뜨기가 아쉬운지 비지땀을 흘리면서 앞사람의 등을 쳐다보면서도, 연사의 들리지 않는 잡음 같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청중들은 유례없는 파문을 던진 이 사건 자체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졌을 터이지만, 그보다는 6년 전 교토대학 사건의 주인공인 다키가와 변호사를 직접 보고 싶어서 모여온 것인 듯했다. 그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교토 시민들이 교토대학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흐뭇했다. 일명 "쇼와[昭和] 아카데미 레지스탕스"의 하나인 교다이(京大)사건의 희생자인 교수, 학생을 격려해 주는 장소인 것처럼 느껴졌다. 단상을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는 수천 명 청중들의 열광 속에서 교토대학의 정신이 여전히 맥맥히 살아있음을 보는 듯 했다.

암울함 속에서도, 역사는 단 일초도 멈추지 않고 소용돌이치면서 도도히 흘러간다. 사악한 승자는 멸하고, 정의로운 패자를 부활시킨다. 시민들이 자기 고장의 대학을 이렇게 아끼며 사랑하는 정성이 있었기에, 세월이 흘러 마침내 전쟁이 끝난 후, 교다이 사건으로부터 12년만에 정의의 여신이 법학부의 문을 다시 두드리게 된 일이 일어났다. 와신상담(臥薪嘗膽). 그들은 인고(忍苦)의 세월을 이겨냈다. 교다이 사건으로 면관된 8명의 교수들의 지위가 회복되게 된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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