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돌아와서 바낭
0. 전주에서 지금 막 돌아왔어요! 멀리 갔다 돌아와도 듀게부터 들어온다니 전 정말 듀게 중독....
일기처럼 써서 죄송하지만 블로그에 쓰면 외로워요.
1. 대학 입학 2개월여 만에 학점의 노예가 된 저는.. 장학금을 받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초등학교 입학 이래 제일 높은 출석율을 보이며 학교 다니고 있어요. (촬영때문에 빠진 유고결 외에 올출석!)
비록 엄마도 콧방귀 뀌는 장학금에 대한 야욕이지만 말입니다 -_-
뭐랄까.. 입학하고 나서 부당하다! 화난다! 어이없다! 대학이란 역시 시시하군?! 싶을 때마다,
내가 이런 꼴을 겪으려고 등록금을 450이나 내고 대출 이자를 꼬박꼬박 내고 다니는 건가 싶어서
분하니까 장학금 꼭 타고 말 거다!! 라고 마음 먹었지요. 이렇게 나름대로 노력하고도 별 성과가 없다면
휴학하고 뭐든 다른 길을 돌아봐야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2. 뭐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전주 일정도 최소한으로 잡았어요. 영화제라면 학교도 며칠이고 가차없이 째고 그랬는데,
'수업에 지각하면 안 된다'며 심야버스로 부산 내려간댔을 때 지인들의 의아한 표정이란.
1,2,3일까지로 잡았는데 1일에 두리반 식당 51+ 공연을 보느라 그 날 영화 표 네 장을 취소하고..
(잠시 옆길로 새서, 공연 정말 좋았어요! 저는 럭키럭키한 지인이랑 같이 돌아다녔더니 저까지 행운이 깃들었는지
보고 싶은 공연 다 보고,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 거의 없이 보고 족발도 먹었답니다. 우후훗!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공연을 보컬분 정면 30cm 앞 정도에서 봤는데, 보컬분 원래 그렇게 귀여우셨나요?
지산에서 봤을 땐 그냥 비범한 밴드 보컬 아저씨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너무 토깽이처럼 귀여우신 겁니다.
이건 사심이었고.. 비둘기우유 공연도 좋았고, 음반보다 라이브가 좋다더니 정말!
404라는 밴드도 좋았어요. 보컬분 왠지 동아리친구 하고 싶은 사람 같았어요. 드럼 치는 분은 뱀파이어일 거 같았구요.
마지막으로 아나킨프로젝트에서 완전 빵터졌습니다. 진짜.. 자음 남발하고 싶은 공연이었어요.)
좌우지간 너무 짧게 머물러서 아쉬운데 대신에 영화는 첫 날 [포르투갈 수녀] 빼곤 말짱한 정신으로 봤네요.
서울에서 전주까지, 온 과정은 기억이 안 납니다... =_=
분명히 차 타서 눈 감았다 뜨니까 제가 입 벌리고 자고 있는 사이에 전주에 도착했어요.
유진 그린 영화가 좋을 거라고(?) 추천하던 지인이 있어서
전날 새벽까지 공연 보고 11시 영화라, 분명히 졸 거 같으면서도 [포르투갈 수녀]를 오기로 봤는데
역시 졸았습니다. 누벨바그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아할 만한 영화- 라고 들었는데
(초반에 숙면 취하고 할 말은 아니지만) 전 그냥 그랬어요. 마지막 씬이 좋긴 했는데 뭔가 한 구절의 악보를 계속 반복해대는 느낌 같았거든요.
물롱! 그게 의도일 것도 같고, 또 다시 한 번 보면 그 점이 더 좋을 수도 있을 거 같지만..
종종 '누벨바그 영화를 보고 자란 사람이 그걸 흉내내는 영화를 찍는다면 요런 연출을 하지 않을까' 싶은 부분들이 있었거든요.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여했을 때 단편이 괜찮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궁금하긴 해요 :-o
그리고 [적과 백]을 봤는데, 꽤 괜찮았어요. 영화를 보는 도중에도 이후에 미클로슈 얀초 것을 더 못 보고 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보고있어도 보고싶은♪)
전혀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켄 로치의 [보리밭은 흔드는 바람]이 좀 담백하고 담담해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기도 했구요.
오늘 저녁까지도 전주에 더 체류하면서 얀초 영화를 더 볼까 고민했어요.
그 다음에 [울트라미라클러브스토리]를 봤는데, 예매할 때도 절대 보고싶어서 끊은 게 아니었는데.. (전북대라 자리가 많아서;)
역시 잘못 골랐다 싶었고.. GV가 있었는데 엔딩 크레딧 끝나자마자 얼른 나왔어요.
이제껏 영화제에서 본 일본 영화들 중에 제일 취향이 아닌 영화였던 거 같아요. 일본 영화 고르면 웬만하면 중간은 가던데 말이죠.
저녁엔 함경록 감독의 [숨]을 봤는데요. 일단 배우분이 비전문배우라던데, 되게 연기를 잘하시더라구요.
뒷부분도 되게 인상적이었고, 생각할 구석도 많고. 한국에선 첫 상영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조만간 여기저기서 이름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2시에 [카르카세스]를 봤는데, 앞부분에 좀 졸았어요. 하나도 안 졸고 봤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저한텐 큰 감흥이 있는 영화는 아니었어요.
감독 본인의 말로는 유희 같은 영화를 찍고 싶었던 거 같은데.. GV는 재밌었네요.
GV만 좋다는 건, 감독한텐 절대 칭찬이 될 수 없겠죠. 허허.
GV에 프로듀서 분도 오셨던데 누굴 닮은 거 같았어요. 그게 누군지 생각이 안 나서 계속 간지러워요.
5시엔, 대망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봤습니다. 전주 영화제, 1일에 예매했던 것까지 포함해서
제일 보고싶었던 영화였고 예매 1순위였는데,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좋았어요.
필립 가렐 너무너무 좋아요! [평범한 연인들]을 보고 너무 좋아서, 이 영화도 꼭 봐야지 했는데..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종반부에선 [평범한 연인들]의 느낌도 났던 거 같구요.
뭔가 보면서 콧잔등이 시큰할 정도로 좋은 장면들이 많았어요. 이런 말들이 너무 추상적인 건 알지만
저는 영화를 참 감정적으로 보고, 왜 좋다 왜 싫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구나, 이 영화 보면서 다시 느꼈답니다.
조만간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하는 동시대 유럽거장전에도 필립 가렐 영화가 두 편 들어있던데,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아쉬운 건, 페드로 코스타 영화를 하나도 못 봤단 거고 한국 영화랑 단편 영화도 하나도 못 봤어요.
세상에, 영화제 보러 가서 단편 섹션 하나 넣치 않은 적은 처음인 거 같아요.
3. 아침에 영화 시간 기다리면서 교보문고에 들려 미니사이즈 책 같은 걸 샀는데, 괜찮네요!
왠지 미니사이즈만 모아놓은 주머니 문고 이런 건, 소설도 다이제스트판일 거 같고 비소설도 전문성이 떨어질 거 같은 막연한 편견이 있었는데
전 김영진씨가 쓴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을 골랐는데, 흥미로와요.
몇 주 전에 시네마테크 월드시네마에서 [WR : 유기체의 신비]를 보았는데, 그 전에도 후에도 그 영화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없었는데
마침 이 책에 나와있는 거에요! 한층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하여간 주머니 문고도 은근히 유익하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아.
4. 짧은 전주 일정 끝에 저녁을 먹는데 동기한테 문자가 왔어요. 한 기수 위의 (저랑은 동갑인) 선배의 부고였는데,
우선 그 문자를 보고 오늘이 만우절인가 한 30초가량을 들여 느리게 더듬다가,
만우절도 아닌데 얘가 이런 일을 가지고 장난칠 확률에 대해서 또 한참 생각하다가
맙소사, 어쩌다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 몰라도 정말로 그렇게 된 거구나, 깨달았어요.
여태껏 할머니, 할아버지의 장례에 간 적은 있었지만 얼굴을 알고 얘기를 나눠본 제 또래의 누군가가
죽는다는 일은 처음이어서 그냥 너무 벙쪘어요.
사람이 살고 죽는 건 참 너무 허무하구나,
정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일이니,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잘해야겠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학점! 등록금! 돈! 이런 생각 말고 좀 더 나한테 충실한 삶을 살아야겠다.
나는 그 선배랑 얘기를 나눠본 기억도 몇 번 없는데도 그 짧은 기억들이 계속 반복 재생 되는데
가까운 사람들은 오죽할까, 여기저기 널린 게 기억들일 텐데,
남아있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힘들겠구나,
내 가까운 사람들이 죽으면 진짜 너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들이 순서대로 들었지요.
소설에서 영화에서 죽음과 애도라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말 섞던 사람이 죽음은 훨씬 다르게 다가오네요.
지금 이렇게 느꼈어도 또 언젠가 더 가깝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면 그또한 생경스럽겠지요.
같이 밥먹던 사람들에게 건강 조심하라고, 오래 살라고 말하고 부산 오는 버스를 탔는데..
음, 아무튼 그렇네요. 몇 살이든 죽는다는 게 슬프거나 힘들지 않겠냐만은, 스물한 살이라니 너무 이르잖아요. 못해본 게 얼마나 많을까.
5. 어찌 되었든, 짧으나마 영화 보느라 즐거운 시간들이었어요. 영화에만 너무 치이지도 않고, 너무 영화에 질리지도 않고.
짧은 건 짧은 대로 장점이 있네요.
뭣보다!! 듀게분들의 도움으로 서울에서도 전주에서도 편하게 묵고 왔어요.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언젠가 이 은혜 꼭 갚도록 하겠나이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