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다키가와 사건 : 파쇼에 의한 진보지성의 축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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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게시물에서 언급했던 다키가와 사건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이전 글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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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大學事件


나는 직접 경험한 사건은 아니지만, 그 사건으로 인하여 커다란 학문상의 피해를 받은 셈이다.

1933년 4월 정부에서 교다이[京大]의 형법교수 다키가와[瀧川] 교수의 사직을 요구한 데 대하여, 교다이(京大) 법학부 교수 전원이 항의사표를 제출하면서 교토, 도쿄 양 제국대학생들이 전국 대학에 대하여 대학자유옹호연맹을 결성하고 다키가와 교수의 복직과 문부대신(교육부 장관에 해당)의 사직을 요구하였는데, 정부는 한층 더 강경책으로 다키가와 교수의 저서 「형법 독본」의 발매금지 처분으로 맞서게 된 사건이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당시 교토제대 법학부의 교수진은 실로 최상의 베스트 멤버였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단지 정치적 이유로 모두 14명의 교수와 조교들을 몰아내고 보니 - 무슨 공사판 노동자 교대하는 것도 아니고 - 후임을 구하기도 어려웠으며 새로 채운 멤버들은 누가 보나 종전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입학할 무렵(1937)에는 아직도 지난 총사표 사건으로 입은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학생들은 찬란했던 과거의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며, 현재의 쇠퇴를 위로할 길이 없었다. 현봉섭 선배의 선배답지 않은 공개 석상에서의 돌출행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 상아탑의 역사상 획기적인 이 사건에 대하여 간단하게나마 약술하는 것이 그 곳에서 공부한 사람으로서 의무로 알기 때문에, 아는 대로 적어보기로 한다.



사건의 발단

당시 교토대학 법학부 형법교수(1915년부터 1933년까지 15년간 재직, 당시 40세)의 사상이 제국대학 교수로서 부적당하다는 이유로, 도쿄대학 출신의 문부대신 하토야마(鳩山, 1883-1954)가 교토대학 총장에게 그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총장은 정부의 요구는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휴직 처분을 하라는 요구를 거절하였고, 정부는 1933년 5월 26일 교토대학의 전통을 무시하고 그의 휴직을 명령하였다. 이에 다키가와 교수가 속한 법학부가, 그와 같은 정부의 부당한 처사가 자행되는 곳에서는 학문 연구 및 학생 교육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교수에서 조교에 이르기까지 전원 22명이 집단 사표를 제출하면서 정부와 전면 대결하였다.

다키가와 교수(1891-1962)에 대한 문부성의 휴직 처분의 직접적인 계기의 하나는 1932년 11월 28일, 그가 도쿄의 츄우오[中央]대학에서 행한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타난 형법사상’이라는 공개 강연이었다. 그는 그 강연에서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주장한 법사상을 소개하면서, “사회는 범인에 대하여 복수의 태도를 가지고 대항하기 전에, 범죄의 원인을 충분히 조사해야 할 것이다. 범인에 대한 동정과 이해를 가지는 것이 복수적 형벌보다 인도적인 것이다.” 라고 톨스토이의 입장을 긍정하였다.

특히 교수는 위 강연의 한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재판장은 그의 정부(情婦)와 약속한 시간에 늦을까봐 걱정이 되어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자주 끄집어내 보았고, 배심 판사 중의 한 사람은 아침에 집에서 출근할 때 아내와 다투었기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터라 건강에만 신경을 쓰다가 정신이 묘하게 미신적으로 되어 있었다.” 고 하는 구절을 소개하면서, 그러므로 카튜샤를 재판한 세 사람의 재판관 모두가, 동포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에 종사하면서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신중한 태도로 재판에 임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정부는 교수의 강연이 법무부를 매도한 것이라고 하면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강연이 끝난 후 청중들이 “저놈은 무정부주의자다!”라고 고함을 치면서 소란을 피운 것도 교수의 강연 내용이 부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고 법무당국은 주장하였다. 문부성도 교수가 강연에서 “범죄는 국가 생활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그런데도 국가가 범인에게 형벌을 과하는 것은 모순이다. 범죄는 이른바 국가에 과해지는 형벌이다.” 라고 한 것을 중시하여 모종의 태도를 취해야겠다고 태도를 굳혔다. 그래서 의회에서 사상 문제에 대한 질의공방이 벌어지는 가운데 하토야마 문부대신은 제국대학의 적색 교수들은 엄중처단 하겠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정부 태도의 배후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이 깔려있었다. 1933년 1월 독일 총선에서 나치당이 제1당이 되고 1월 31일 히틀러가 독일국 재상(Reichskanzler)에 임명되는 등, 독일의 파쇼화가 급진전되는 해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도 군부와 관료, 그리고 일부 사상가들이 독일에 추종하여 일본을 파멸로 몰고 가기 시작하였다. 좌익은 태반이 구속되고 남은 사람들도 지하에 숨어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정부는 다음 차례로 대학의 자유주의 진영에 소탕의 총부리를 돌려대었다. 즉 자유주의자를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워 제거하려고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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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다키가와 교수의 이 '형법독본'이 문제가 된 것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라는 당시 형법상 이론의 충돌 때문이었습니다. (조금 딱딱한 내용이니 귀찮으시면 좀 아래쪽의 한줄요약으로 건너뛰셔도 됩니다.)

일제는 형법독본 속에 게재된 <주관주의> 이론을 '위험사상'으로 몰아서, 이에 따라 주관주의를 밀고 나간다면 결국 대헌부인(大憲否認: 헌법의 부정), 나아가 국가를 부인하게 된다고 주장했지요. 군국주의 치하의 일제 입장에서는 이것은 꽤나 먹음직한 소재였던 셈입니다. '어라? 이 학삐리 꼰대가 감히 천황을 부정해?' 라고 몰고 갔던 거죠. (실제로 다키가와가 천황제 폐지까지 주장한 일은 없었지만.... 전형적인 과잉해석에 의한 사상탄압의 예시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에 대해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다키가와 교수의 형법독본에 실린 구절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객관주의 형법이론이란, 범죄라는 사실이 있으므로 그 사실에 해당하는 범인을 처벌한다. 범죄로 인한 손해가 크면 자연히 과하는 형벌도 무거워진다. 반대로 손해가 적으면, 처벌이 가벼워진다. 범인의 나이라든가 범행의 동기 등은 형량의 표준은 되지만, 범죄사실의 대소를 무시하고 범인의 개인적 사정을 먼저 참작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범죄 사실의 대소가 형벌을 정할 때 무엇보다 먼저 표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주관주의 법이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주관주의 형법 이론은 형법은 범인의 개성을 표준으로 정한다. 범죄 사실이 크기 때문에 범인에게 중벌을 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형벌은 개성을 개선하는 한 방법이므로, 범인의 성격, 연령, 범죄 동기 등에 따라 개별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범죄가 있으므로 형벌을 과하게 되지만, 사실은 이것은 본의(本意)가 아니다. 범죄가 없더리도 죄를 범할 위험성이 있는 사람은 벌해야 한다.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는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없으므로 본의 아니게 범죄사실의 발생을 기다릴 뿐이다. 한 마디로 범인의 개성이 형벌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객관주의 = 죄형법정주의, 형량은 범죄의 행위가 어떠하냐가 가장 중요한 판단요인.
주관주의 = 형량은 그 범죄자의 개인적인 사정을 고려하여 주관적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죄형법정주의도 중요하고, 주관주의적 요소로서 '범인 개인의 사정'도 중요합니다. 현대 법리에서는 '정상참작'이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남아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 "쇼와 초기의 군국주의"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관주의에 따른다면 좀 극단적으로 "2등 국민인 조선인은 빵을 훔쳐도 사형"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죠. 물론 각론적으로는 어폐가 있지만, 여튼 주관주의의 가장 큰 폐단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해봤습니다.

다키가와 교수는 일단 표면상으로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구별의 실익이 없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만, 그 자신은 자유주의자로서 객관주의에 의한 죄형법정주의를 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형법독본에서 계속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두 학설을 비교하여

“이른바 객관주의는 만인에게 평등한 형벌, 즉 신분, 빈부, 직업 등에 의해 무겁게 벌한다거나, 반대로 가볍게 처벌할 우려를 없앤다는 의미에서 재판관의 자유재량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며, 형벌에 대하여 범인을 보호한다는 데서 형법의 중요한 기능을 발견한다. 이에 대해 주관주의는 같은 종류의 범죄에 대해서도 재범의 우려가 있는가라는 개인의 사정에 따라 어떤 사람은 무겁게, 다른 사람은 가볍게 처벌한다는 의미에서 재판관의 자유재량의 폭을 넓게 인정한다. 따라서 범죄에 대해 사회를 보호한다는 데서 형법의 중요한 기능을 발견한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다키가와 교수, 그리고 그에 대한 일본제국 문부성의 처사에 대해,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진보적 지식인이던 히라노(平野義太郞, 1897-1980)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객관주의는 형법에 있어서 법치주의 원칙, 죄형법정주의를 주장하는 것인데, 법치주의 원칙을 파괴하면서라도 학문의 연구의 자유를 인정하기에 인색하여 무자비한 탄압을 감행하려고 하는 문부성의 태도는, 객관주의에 의한 인권의 보장의 이론을 위험사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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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옷을 입은 여인


(일제 당국이 문제삼은) 다키가와 교수의 「형법독본」은, 본래 오사카 라디오 방송국의 「시민강좌」프로로서 주1회씩 전부 12주에 걸쳐 방송한 것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라디오로 형법강의를 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본래부터 다키가와 교수의 문장은 간결, 명확하면서도 유려하기로 소문이 자자한데, 그것이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널리 방송되었으므로 청취자가 몰렸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형법의 대중화>라는 슬로건이 적중한 것이다. 난해한 형법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이는 곧 당시 출판계의 신화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 때 방송테이프를 정리하는 것을 도와준 사람은 당시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대학원에 다니던 중국인 여학생 후옥지(候玉芝, 호유치)였다. 이후 候玉芝는 1932년 7월부터 베이징의 한 전문학교의 교사로 취임하게 되었고, 교수는 그녀의 귀국에 맞추어 도움의 답례삼아 「형법독본」의 속표지에 그녀의 전신사진을 실었다. 사진에서 그녀는 아름다운 중국식 옷차림을 하고서는 “형벌로부터의 범인 해방은 범죄로부터의 인간 해방이다.”라고 그녀 자신이 모필로 쓴 종이를 손에 들고 있다.

(* 당시 교토대학에는 중국인 유학생이 적지 않았다. 특히 만주국 성립 후에는 수백 명의 관비 유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그들은 교육시키기 위해 별도의 시설도 마련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국의 국립대학인 대동학원에는 교토대학 졸업생이 교수로 파견되는 예가 많았고, 그 한 예로는 조선인 출신으로 경제학부를 나온 황도연인가 하는 선배도 그곳 교수로 있었다. 다키가와 교수가 재직시에는 중국인 학생을 도와주기 위해 '三國學生會'라는 연구회가 있었고, 총장이 다키가와 교수를 그 회의 지도교수로 임명하였으며, 그와 같은 인연으로 중국인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었으며, 위 候玉芝의 경우처럼 비록 타 대학에 다녔을지라도 교류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당시 객관주의 형법학을 미워한 학자도 적지 않았고, 더구나 형법독본이 날개돋힌 듯 잘 팔린다는 것에 그들은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책이 판매금지조치를 당하기 위해 두 개의 논점을 꾸몄다. 하나는 그 속 표지에 실린 ‘중국 옷 입은 여인’의 사진이고, 또 하나는 형법독본의 내용이 반정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당국에서는 우선 속표지의 중국의상의 여인을 문제삼았다. “일본은 지금 중국과 전쟁 중이다. 적국 여인의 사진을 출판물에 실어 반포한다는 것은 전쟁 중의 이적 행위에 해당한다.”고 비약했다. 결국, 객관주의 형법이론을 주창했다는 점과 중국 여인의 사진을 실었다는 이유로, 「형법독본」은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그 책의 인기는 수그러지지 않았다. 나는 헌책방에서 어렵게 사다가 읽었다.

候玉芝 女人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1932년 7월, 그녀가 귀국길에 오를 때 다키가와 교수는 고베항[神戶港] 부두까지 그녀를 전송했다. 그녀가 귀국길에 타고 갈 죠코마루[長江丸]가 떠나기 얼마 전, 그들이 잠시 갑판의 벤치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형사가 다가와서 대뜸

“너희들은 어디로 가느냐?”

라고 매우 건방지게 (반말로) 물어오더라는 것이었다. 교수가 “당신은 누구신가?”라고 되묻자 “나는 스이죠쇼[水上暑] 경찰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대해 교수는 따지듯이 말했다.

“남에게 물을 때 ‘너희들’ 이라고 (하대) 하는 것은 실례가 아닌가. 그건 경찰관 직무규칙 위반이다.”

그러자 형사는 수그러지면서

“시나징[支那人:중국인을 멸시하는 호칭]인 줄 알고 그만 실례를….”

하면서 쩔쩔매는 시늉을 했다. 그 때 다키가와 교수는 '옳거니, 이놈의 버릇을 고쳐주어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나인이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간에, 경찰직무 수행자는 도의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오. 우선 당신의 신분증을 제시하시오.”

교수 가 다그치자, 형사는 그만 슬그머니 도망치려는 품새를 취했다. 그것을 제지하면서 교수는

“기다리시오. 신분증을 보이기 싫거든 사과하시오. 당신의 태도는 경찰관으로서 돼먹지 않았소. 서장에게 보고해야겠소.”

라고 위협을 준 후,

“그럼 내 이름을 밝혀 두겠소.”

라고 하면서 교수 직함을 건네주었다. 명함을 들여다 본 형사는

“그런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오늘 일은 잊어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명함을 되돌려 주고는 황급히 갑판에서 내려가 버렸다.

당시에는 지나인(支那人) 내지는 적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대만인에 대해서도 '인간 취급은 안 해도 된다'는 사고가 상하를 막론하고 일본 공무원 뿐만 아니라 교양 없는 시민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특히 일본을 내왕하는 연락선이나 열차 속에서 그들 관헌들은 중국인, 조선인, 대만인들을 상대로 '소지품 검사'라는 명목으로 위세를 과시하면서, 멸시.수모를 주고 잘난 체 거들먹거렸다.



刑法讀本의 分折


" 범죄와 형벌은 모두 사회악이다. 헤겔에 의하면 범죄는 법의 부정이며, 형벌은 범죄의 부정이다. 법의 부정인 범죄를 다시 부정하여 법을 부활시키는 - 다시 말해 '법'과 '범죄'와 '형벌'과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인정하는 곳에서 헤겔의 죄형론이 성립한다.

헤 겔의 죄형론은 칸트의 죄형론에 비교하여 볼 때 하나의 진보라고 생각된다. 칸트의 죄형론이 죄형의 사회적 성질을 간과하고 단지 범죄라는 악을 처리하기 위한 형벌이라는 악을 더하는 데 불과한 데 대하여, 헤겔은 죄형의 문화적 의의를 지적한 것이다. 그것은 칸트의 경우처럼 ‘범죄가 있으면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범죄에 의한 사회질서의 파괴가 형벌에 의하여 회복되는 경우에 비로소 죄형의 관계가 문화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원일치에 의하여 사회를 해산하는 최후의 순간에 있어서도 형무소에 있는 사형범인은 한사람도 남기지 말고 죽여야 한다'고 하는 칸트에 대하여, 헤겔은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그에게 악을 가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명언한 곳에서 일견 (그의) 근대적 색채가 엿보인다." (刑法雜筆, 1937.9.14)

문부성은 대학을 탄압하여 반정부적인 언론을 봉쇄하려는 작전의 일환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다키가와 교수를 1차적 희생양으로 지목하고, 그 물적 증거로서 그의 저서 「형법독본」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1.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 당국은 다키가와 교수가 “범죄는 사회의 산물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이유로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견해라고 단정했다. 특히 다키가와 교수가 “범죄의 대부분은 범인의 악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조직이 나쁘다는 데 그 주된 원인이 있다. 형법은 근원적으로 범죄를 없애는 수단이 아니라 단지 범죄라는 사실이 외부에 나타나는 이유 때문에 범인에게 고통을 주어 그 보상을 요구하는 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범죄를 없애려면 범 인에 대하여 형벌을 가하기보다는 범죄가 발생할 여지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노력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 - 고 주장한 것을 두고 (사회를 비판하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비난하였다.

2. 당국은 다키가와 교수가 「형법독본」에서 간통죄 폐지를 주장한 것도 문제로 삼았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다키가와 교수는 중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과 같이 불벌주의를 채용할 것을 주장했으나, 공안당국은 '러시아에서 불벌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그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3. 또한 당국은 「형법독본」에서 내란죄 및 교육형에 관하여 해석한 부분도 문제삼았다. 이를테면 “형벌은 교육이다. 그렇지 않으면 형벌의 생존권은 없다.”고 하는 표어를 내걸고, (기존의 '처벌적 성격'의 형벌으로부터 보다 전향적인) 형벌사상의 방향전환을 꾀한 것이 이른바 '교육형주의'이다. 그에 따르면, 형벌의 목적은 범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반사회적 성격을 고쳐서 법질서에 복종하는 인간으로 개조하는 것이며, 이 때 형벌의 집행은 범인의 사회적 복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교수는 '교육적 의미의 형벌'은 무의미하다고 반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교육'을 거절하는 범인이 있을 때는, 그에 대한 관계에서 교육형은 실패를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이에 비해 사회복귀를 맹세하는 수감자에 대해서는 형벌의 교육효과가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정작 사회가 그들의 사회복귀 요구에 응하지 못한다. 그들이 복귀해야 할 곳은 생활난에 허덕이며 실업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사회이다. 형벌로서 교화를 받아 석방되더라도 직장을 얻을 길이 없다. 결국 재범을 되풀이하여 금방 나온 감옥으로 교육을 받으려고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삶의 길이다.

감옥에서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못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어 있으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침실에서 같은 시간에만 잔다. 그곳은 이상 사회와 지극히 유사한 듯하다. 그러나 감옥 밖의 현실사회는 전혀 다른 조직으로 짜여져 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못한다.”고 하는 진리에 입각하여 살 수 있는 사회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현재의 사회는 그러한 사회가 아니다. 옛날 동양의 사상가는 “형(形)은 형(刑)이 없기를 기약한다.”고 하는 이상(理想)을 선언했다. 그러나 형벌에 의해 형벌을 없애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범죄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다키가와. 형법독본 p.192-196)

요컨대,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감옥에서 교육을 받고 전향하는 자는 정치범(확신범)의 가치가 없다는 것과, ▲교육형의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인 범인이 생활난에 허덕이기는 사회에 복귀한다고 해도 다시 범죄를 범하여 감옥으로 가는 것이 전부라는 것, - 다시 말해 '교육형주의'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토야마 문부대신은 이를 두고, 다키가와 교수가 “감옥이 이상 사회이다.” 라고 주장했다며 생트집을 잡으면서 비난공격을 가했다. (이상 다키가와, "격류(激流)" p.12이하에서 발췌. 1963, 出書房新社)

4. 당국은 다키가와의 존속살해죄에 대한 견해도 문제삼았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책 「형법각론」에서 약간의 설명이 발견되는데, 그는 “존속살해죄는 가장에 대한 반역을 최악의 죄로 보는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잔영이다. 실제 문제로서 자손이 존속친을 죽이는 경우는 대개 포악무도(暴惡無道)한 존속친을 제거하여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부득이 범행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미야모토[宮本英雄], "刑法學粹", 弘文堂書房 ,1930)
이 때 다키가와 교수는 "살인죄에 대해 형의 집행유예를 인정하는 형법이, 손바닥을 뒤집듯 (그 법적 태도를 바꾸어) 존속살해를 극히 중하게 처벌한다는 것은, 그 부조화가 너무 심하여 눈에 거슬린다"고 했다. (다키가와. 형법각론 弘文堂書房 1933 p.93)

* 위에서 언급한 미야모토 교수는 이 '교다이 사건'으로 다키가와 교수가 퇴임한 후 형법강의를 단독으로 담당하였다. 나는 그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주관주의 극우파로, 독특한 겸억(謙抑)주의를 주장하였다. 검사 출신임을 과장하기 위해서인지 근엄한 자세로 한 치 흐트러짐이 없이 150분 강의를 좌석에 앉은 채 변함없는 똑똑한 어조로, 독특한 학설을 종시일관 자신만만하게 해석했다.




법학부와 경제학부가 있는 본부 건물 서측. 1933년 준공.



분패(憤敗)


이처럼 일본 문부성 당국이 다키가와 교수의 사직을 요구한 사태(*당시 일본 내 5개 제국대학은 공립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대학이었다)와 관련하여, 교토제국대학의 법대 교수들은 "학문연구의 자유와 그것을 담보(보장)받기 위하여 대학의 자치를 수호한다"는 기치를 높이 들고 총사퇴라는 배수진을 쳤다. 이는 교토제대가 생긴 이래 유례없는 항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애석하게도 분패(憤敗)의 고배를 마셨다. 제2차세계대전의 전운이 급속도로 밀려오는 국제 정세의 영향과 함께, 일본 국내에서 또한 그 세력이 커지던 군부 파쇼 권력에 결국은 밀리고 만 것이다.

교수들의 총사퇴로 맞선 항쟁의 와중에서 전 총장이 사임하고 이학부 출신의 마쓰이[松井] 교수가 총장에 취임했다. 교수들의 일괄 사표서를 전수한 총장은 문부성과 절충한 결과, 그 중에서 7명의 사표만을 선별하여 문부성에 제출하고 1933년 7월 11일 그들에게 의원면관(*依願免官:본인의 청원에 의하여 관직을 해면(解免)함) 의 발령이 내려졌다. 이에 대해, 면관에서 제외된 것에 분개한 2명의 교수가 이를 거부하고, 7월 22일 총장에게 거듭 문부성의 사퇴 진달(進達)을 요청하여, 26일 이들 또한 의원면관이 되었다.

이로서 그 사이 병사(病死)로 인한 1명을 제외하고 면관된 교수는 다키가와 교수를 비롯하여 사사키(佐佐木, 헌법), 미야모토(宮本英雄, 영미법), 모리구찌(森口, 행정법), 스에카와(末川博, 민법), 타무라(田村, 정치학), 츠네토(恒藤, 국제법, 법철학) 교수 등 총 8명이 되었다. 그 후에도 조교수 4명과 강사, 조수, 부조수(*우리 학계에서는 대학원 연구생에 해당)등 8명이 면관에 합류하여, 결국 모두 20명이 일시에 퇴진하고 7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 '잔류파' 교수 7명은 "학문의 자유 및 대학 자치를 위하여 우려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그 학자적 양심이 의심되는 성명서를 내면서, 학원의 학살과도 같은 문부성의 해결안을 승인한다고 말하였다. 그들 7명은 처음 일괄사표 때 같이 연대하여 제출했던 사표를 주저없이 철회한 것이다. 단체 행동에 있어서는 반대자는 있기 마련인 모양이다.

이리하여 문부성의 승리, 법학부 총사퇴파의 패배, 그리고 잔류파 7명의 반란이라는 기록을 남기면서, 교다이[京大] 사건 - 다키가와 사건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으로 이 비통한 사건은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듯했다. 그런데 다음해 5월 26일에는 법학부 연구실 건물 3층 창문에 "상기하라! 5.26" 이라고 큰 먹글씨로 쓴 현수막이 드리워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심상찮게 돌아가던 일본의 상황에서도, 희미하나마 대학의 자유 정신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이 일로 학생 3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퇴직 후, 면관된 교수들은 그 후 각자 흩어져 제 갈길을 찾아갔다. 원로교수인 헌법학자 사사키 소이치(佐佐木惣一,1879-1965)교수는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총장으로 초청받아, 퇴직 교수들의 태반을 이끌고 리츠메이칸대학으로 갔다.

그런데 이들 퇴직자 중에서 조교수 4명, 조수 2명이 교토대에 다시 복귀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유신가이(侑信會, 교토대 법학부 동창회)의 유지들의 노력 덕분이었는데, 이들은 면관 교수들의 복귀운동에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교수들은 '뜻은 고맙지만...' 하며 모두 이를 거부했고, 그래서 그들은 방향을 돌려 이미 리츠메이칸에 채용되었던 조교수 및 조수급 인력을 빼가는 운동을 펼쳐 이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6명의 복귀자들은, 재취업에 힘써 준 사사키 학장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야반도주하듯 나와 버린 것이었다 하여, 사람들로부터 배은망덕한 태도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교다이사건의 주인공 격인 다키가와 교수는, 교토대를 졸업한 지 3년 후인 1915년부터 사건이 발생한 1933년까지 이미 리츠메이칸 대학의 강사도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리츠메이칸에 계속 출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인 1938년부터는 오사카에서 변호사로 개업하게 되어, 태평양전쟁 종전 때까지 7년간 실무에 종사하면서 형사사건만 취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치안유지법 사건을 많이 맡았다 하며, 그 외에도 '기쿠코 여사의 독(毒)만두 사건' 등 유명한 사건을 많이 취급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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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참 격세지감인 것이, 유학생들 의견에 따르면 지금의 교토대는 보수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경향의 총아라고 하는데 이 때는 참 달랐죠.
그리고 저 때 잘린 사람들이 나중에 전쟁 후의 일본 지성계를 재구축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도 블랙코미디라면 블랙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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