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미드나잇 런

  • clancy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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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런 (Midnight Run)

‘사십 대라고요? 어머, 거짓말. 난 삼십대 중반 정도로 봤는데. 진짜 동안이다!’

며칠 전 거래처 상무와 갔던 룸살롱에서 술시중을 들던 애기 마담이 나우진에게 했던 말이다. 술집 아가씨들이 늘 그렇듯 듣기 좋으라고 늘어놓는 립 서비스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직접 나우진을 만난 사람이라면 그것이 완전히 빈말은 아니란 걸 알 것이다.
올해로 44살,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에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까지 있지만 그의 외모는 그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투명하고 탄력이 있는 피부는 가까이 다가가야 간신히 잔주름이 보인다. 머리카락도 굵고 풍성한 흑발이었고 남자치고 선이 고운 얼굴을 차지한 이목구비도 조밀하니 동안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그를 또래들보다 훨씬 젊어 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의 ‘몸’이었다. 완벽한 역삼각형의 상반신과 적당히 근육이 오른 두터운 허벅지 선명하게 드러나는 초콜릿 복근까지 텔레비전에서 ‘짐승돌’이라고 부르며 환호하는 젊은 사내 녀석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그의 몸은 완벽했다.
전국 주요도시에 100여 개 점포를 둔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의 CEO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몸을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물론 그만큼의 노력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피부 관리를 받고 주에 한 번씩은 마사지를 받는다. 고액의 성형 클리닉을 찾아 피부 탄력과 주름 관리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노화를 예방하다면 한방, 양방, 민간요법을 가리지 않고 챙겼다. 무엇보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운동이었다. 스케줄이 허락하는 한 매일, 적어도 일주일에 4번 이상은 헬스장에 들러 두세 시간씩 하드한 트레이닝으로 몸의 근육들을 자극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늘도 마케팅 기획 회의에 참여하고 각종 보고에 밀린 서류업무 처리까지 하느라 10시가 넘어 퇴근한 뒤 곧바로 이곳 ‘A헬스장’으로 달려왔다. 연예인들이나 유명인들을 상대로 하는 시내의 유명 휘트니스에도 등록을 했지만 오늘처럼 늦게 퇴근하게 되면 집에서 가까운 이곳으로 오곤 한다. 아무래도 시설은 떨어지지만 필요한 운동만 할 수 있다면 그는 개의치 않는다. 무엇보다 동네 주부들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곳인지라 이렇게 늦은 시간이면 손님이 거의 없다는 점이 그를 만족스럽게 한다. 탈의실에서 운동용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헬스장 한쪽 데스크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내가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온다.
“나 사장님 오셨습니까.”
“어, 오늘은 혁종씨가 일보는 거야?”
“예.”
동네 헬스장이지만 그래도 여기엔 사장까지 총 5명의 트레이너가 일하고 있었다. 낮부터 저녁 시간 까지는 그 중 4명이 항시 근무하지만 손님이 줄어드는 8시 이후엔 사장과 함께 직원들 중 한 명이 돌아가며 당직을 서는 식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오늘 당직 근무자인 혁종은 트레이너 중에서도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눈초리가 아래로 떨어져 전체적으로 여덟팔자를 그리는 눈매에 순둥이 같은 얼굴과 달리 요즘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짐승을 연상시키는 잘 만들어진 몸은 트레이너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담당하는 회원들에 대해 세밀하게 챙겨주며 적절한 운동법을 코치하는 것으로도 인정받고 있었다. 사장 입장에서 보자면 보석 같은 직원이라 하겠다.
“오늘은 혼자 인가 봐?”
평소와 달리 썰렁하니 혁종 혼자뿐인 실내를 보며 우진이 물었다.
“예, 사장님은 먼저 퇴근하셨어요.”
“이거 나 때문에 집에 못가는 거 아냐, 미안하네.”
우진은 너스레를 떨며 맘에도 없는 말을 꺼낸다. 혁종 역시 아니라는 듯 황망히 손사래를 친다.
“아닙니다. 신경 쓰시지 마시고 편하게 하세요.”
“그래요.”
사업용 미소를 다시 한 번 지어보이며 우진은 러닝머신 쪽으로 향했다. 평소엔 30분 정도는 근력 운동을 한 후에야 달리기 시작하지만 오늘은 시간도 늦었고 간단히 뜀박질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기계에 오르기 전 몸을 풀 요량으로 간단한 체조를 하며 우진은 혁종에게 말을 걸었다.
“혁종씨는 사귀는 사람 있나?”
“아니요, 여자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곤 사내는 허허 웃는다.
“에이, 혁종씨 같은 사람이 인기 없을 리가 있나.”
“제가 뭐 잘난 게 있나요. 저보다 사장님이야 말로 젊으셨을 때 인기 좋으셨을 것 같아요.”
“하하하, 나야 뭐 지금도 인기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진은 러닝머신 위로 올라갔다. 강철 롤러 위를 도는 우레탄 재질의 무한괘도가 살짝 아래로 꺼지며 그의 무게를 받아낸다.
“사장님 젊을 때 가수도 하셨다면서요?”
혁종이 카운터에서 나와 앞쪽 냉장고에서 병에 든 두유 하나를 꺼낸다.
“가수는 무슨, 잠깐 헛바람이 들어서 노래하겠다고 밖으로 돈 적이 있었지.”
“캬, 사장님 외모에 노래까지 잘 불렀으면 완전 최고였겠네요 뭐.”
“거 참, 사람 쑥스럽게 왜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진은 저절로 지어지는 웃음은 감추지 않는다. 기계의 시작 버튼을 누른다. 시작은 가볍게 걷는 정도인 5km/h로 시작했다. 작게 윙윙거리는 모터 소리와 함께 롤러가 회전하자 그의 걸음도 따라서 빨라진다. 오늘은 좀 길게 뛸 생각이었기 때문에 지루함을 달래려 우진은 러닝머신 전면에 부착된 모니터의 전원을 켰다. 이전에 맞춰진 케이블 채널에선 음악프로가 방송되고 있었다. 화면에선 여자 아이돌 그룹의 무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화장으로 가렸음에도 어린 티가 줄줄 흐르는 십대 소녀들은 가랑이 아래를 간신히 가리는 치마나 몸에 짝 달라붙어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을 입고서 노래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이야 사장님도 걸그룹 좋아하시나 봐요?”
화면을 본 혁종이 다시 말을 건다.
“트니까 나오네. 사업 하려면 젊은 감각을 유지해야 하니까 이런 방송도 한 번씩 챙겨 봐야 하긴 하지만. 그런데 이 그룹 인기 있나?”
“모르세요, 요즘은 저 애들이 최고에요.”
“그런데 너무 차림이 과하네. 대체 몇 살이야 어려 보이는데.”
“그렇죠, 저도 잘은 모르지만 어린애는 아직 중학생인가 고등학교 막 입학 했다던가 그랬는데.”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기도 좋지만 어린애들한테 저런 옷을 입히다니 이해를 못하겠어.”
“하하하, 그래도 예쁘잖아요. 어리면 어릴수록 좋은 게 아이돌이고요.”
“그런가?”
“그럼요, 저렇게 어린 아이들의 무대를 보다보면 저까지 저 또래로 돌아가는 기분이 드니까요.”
혁종이 우진의 뒤편으로 다가와 벤치 프레스에 걸터앉아 덩치에 걸맞지 않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화면 속 소녀들을 바라보았다.
“혁종씨 저 그룹 팬인가 봐?”
우진은 버튼을 조작해 기계의 속도를 올리며 물었다.
“그냥 좋아하는 거죠, 멤버 중에 하나가 누나랑 닮아서요.”
“누나가 있나보지?”
“예, 있었죠.”
그렇게 대답하는 혁종의 목소리가 어둡다.
“있었다니?”
“죽었거든요. 하나있던 형제였는데, 벌써 15년 전 일이네요.”
“죽다니, 어쩌다가.”
“자살이었어요. 어떤 놈한테 흉한 꼴을 당하고선 그 충격으로 그만 목을 매었어요.”
갑작스런 얘기에 적잖이 당황한 우진은 벽에 붙은 거울로 혁종의 표정을 살피면서도 러닝머신을 내딛는 페이스는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거 나 때문에 괜한 얘기를 꺼냈구먼.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아닙니다, 벌써 15년이나 지난 일인데요.”
“그래도 가족이 그런 일을 당했으면 쉽게 잊기 힘들지. 그래도 이렇게 훌륭한 트레이너가 되었으니 누님도 하늘에서 대견해 하실 거야.”
“훌륭하긴요, 부끄럽습니다.”
혁종은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야, 회원들 사이에선 혁종씨가 제일 평가가 좋다고. 그런데 이 일은 어떻게 시작한 건가?”
우진은 어색하던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혁종에게 물었다.
“시작이라, 사실 대학 때만 해도 운동을 좋아했다 뿐이지 전공은 이과 쪽이었죠. 사장님이 지금 사업 시작하시기 전에 가수지망이셨던 것 처럼요.”
혁종의 말에 우진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 참, 또 창피한 얘길 꺼내고 그런다.”
“하하, 아닙니다. 사람 일이라는 게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일이 자주 있더라는 거죠. 사실 저 한동안 군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습니다. 놀라셨죠? 학교 다니면서 화약류 관리사 자격증을 땄었거든요. 덕분에 군에서도 EOD 부서에서 근무했었죠. 유실 되거나 폐기해야 하는 폭발물들 처리하는 게 일이었어요. 적성도 맞는다고 생각했고 실력도 인정받아서 장기신청하고 말뚝을 밖을 생각이었죠. 특수 보직이라서 사고 안치고 꼬박꼬박 출근만 하면 자동으로 원사까지는 달 수 있었거든요.”
창 너머 먼 곳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곱씹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사람 일이란 게 맘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요. 중사 진급 얼마 앞두고 제가 관리하던 창고에서 폭약이 없어진 겁니다. 헌병에서 수사를 나왔는데 처음엔 관리소홀 운운 하더니 나중엔 제가 빼돌린 거 아니냐고 의심하더라고요. 숙소 수색당하고 며칠 동안 심문 받고, 참 어이가 없더군요. 결국 조사해도 나오는 게 없으니 혐의는 벗었는데 그래도 폭발물이 사라졌으니 뭔가 조치는 해야겠고 결국 몽땅 저에게 덮어씌우더군요. 중징계를 받았지만 인사 기록에 빵꾸가 났으니 진급은 밀렸죠, 저도 그 일로 군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결국 옷 벗고 나오고 보니 할 줄 아는 게 없더라고요. 백수로 한동안 빈둥거리다 우연찮게 여기 일자리를 잡은 겁니다. 군에서도 헬스 쪽은 꾸준히 공부를 했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취미삼아 했던 건데 덕분에 입에 풀칠은 하고 살게 된 거죠.”
혁종의 지루한 신세한탄을 우진은 묵묵히 흘려듣고 있었다. 죽은 누나의 기억을 끄집어내게 한 것이 미안해서이기도 했지만 그 사이 점점 속도를 올린 탓에 호흡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슬슬 힘이 부치기 시작한 때문이다. 그는 슬쩍 계기판의 숫자를 내려다본다. 속도는 어느새 10Km/h를 넘은 상태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먼, 훕, 훕, 그래도 내가 보기엔 이 일이 적성이 맞는 것 같은데. 후읍, 후읍, 지금처럼 하면 언젠가 자기 체육관 가지는 것도, 훕, 훕, 가능할지 몰라.”
“그렇게만 된다면야 좋죠.”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혁종이 손에 말아 쥐고 있던 잡지를 펼쳐든다. 얼핏 보이는 표지에 헐벗은 여자가 한껏 허리를 꺾고 서있다. 문득 오늘따라 혁종이 수다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하러 이곳에 올 때마다 본 얼굴이었지만 그는 늘 과묵하니 필요한 말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말을 걸어도 운동에 관련된 얘기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선 이런저런 얘길 나누기도 했지만 자기 개인사에 대해선 거의 주절거리는 일은 없었다. 무슨 일이지, 실연이라도 당한 걸까. 자기는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모양이라며 머쓱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러닝머신의 속도는 점점 높아져 이제는 14km/h. 어지간한 사람은 10분 이상 유지하기 힘든 속도다. 물론 마라토너 같은 경우엔 평균시속 16km로 코스를 완주하기도 하지만 그건 꾸준한 훈련을 거친 결과였다. 우진 역시 꾸준히 운동을 해오긴 했지만 이 정도 속도에선 30분 정도가 한계였다. 그 이상 무리를 했다간 당장 몸에 이상이 올 것이다.
“사장님 영화 좋아하십니까?”
한동안 조용하던 혁종이 잡지를 모두 읽었는지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건다. 이거 혹시 자기도 퇴근해야 하니까 얼른 운동 끝내라는 은근한 압력은 아닌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뭐 그냥, 헉헉헉, 일이 바빠서 볼 시간이 없거든.”
거친 호흡 사이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시겠네요. 전 일 끝나고 영화 보는 낙에 사는데.”
“그래? 요즘은, 하악, 하악, 뭐가 재밌어?”
“글쎄요, 사장님 취향을 모르니까.”
“혁종씨는, 뭘, 헉, 헉, 좋아하는데?”
말을 하느라 호흡을 놓치고 말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억지로 누르며 다시 박자를 맞추어 숨을 가다듬어본다.
“저는 액션 스릴러 이런 쪽이죠. 미국 영화들 좋아하고. 혹시 스피드란 영화 보셨어요?”
우진은 말없이 고개만 도리도리 저어보였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기 보다는 그게 어떤 영화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었지만 그걸 일일이 설명하기는 귀찮았다.
“진짜요, 잘 만든 영환데. 그게 달리는 버스에 장착된 폭탄을 소재로 다루는 영화거든요. 제가 전직 폭발물 처리반이다 보니까 자연히 그런 영화엔 관심이 가더라고요.”
확실히 오늘따라 혁종은 수다스럽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우진은 궁금해졌다.
“영화에 보여주는 폭탄들이 보통 엉터리거나 엄청 구식이거나 그렇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는 아이디어가 대단해요. 버스의 속도가 어느 정도 이상을 넘으면 폭탄의 스위치가 작동되고 다시 어느 선 아래로 속도가 떨어지면 기폭장치가 작동한다. 결국 버스는 절대 멈출 수 없게 되는 거죠. 장애물들이 튀어 나오고, 기름은 떨어져가고, 폭탄을 해체할 방법은 없고. 얼마나 긴박감이 넘치던지. 그런데 그런 폭탄을 만드는 건 사실 어려운 게 아니에요. 약간의 지식과 간단한 전자부품 몇 개만 있으면 저도 만들 수 있죠. 영화에 나온 것처럼 복잡할 필요도 없고요.”
이야기는 영화에서 갑자기 폭탄 제조로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숨이 가빠온다. 우진은 러닝머신의 속도를 조금 줄였다. 계기판 숫자는 12km/h로 떨어졌다.
“갑자기 무섭게 폭탄 얘기는 하고 그래?”
“사실 제가 한때 사제폭탄을 만드는 일에 열중한 적이 있어요.”
그건 일종의 고백이었다. 우진은 이 사내가 자신 앞에서 대체 왜 이런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양심고백이나 회개를 하고 싶다면 성당이나 교회를 찾을 일이다. 이렇게 사람도 없는 한밤중의 헬스장이 아니라.
“모두 제 누나 때문이었죠. 아까 말씀드린 죽은 누나 말입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누나는 입을 다문 채 벙어리가 됐어요. 그런 상태로 자살을 했으니 범인에 대해 알 길이 없었습니다. 남은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졌죠. 고리타분한 시골 동네에서 누나가 사실은 걸레였다는 식의 소문까지 돌아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사람 인생이란 언제나 예상 밖의 일들이 벌어진다고 했잖아요. 군에 있을 때 고향 후배 놈 하나가 사병으로 우리 부대에 배치됐어요. 어릴 적에 참 말썽꾼이던 놈이었죠. 그래도 고향사람이라고 제가 꽤나 챙겨줬습니다. 그런데 이 자식 눈치가 이상했어요. 처음 자대 와서 절 보는 순간부터 심상치가 않더라 이겁니다.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아서 계속 간을 봤죠, 그랬더니 어느 날 고백을 하더군요. 범인을 봤다는 겁니다. 누나를 욕보인 범인을 말이에요.”
혁종의 목소리엔 서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 기운이 마치 형상을 가진 것 마냥 날아와 우진의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마침 그 날 밤에 수박서리를 하러 갔다가 우리 누나가 강간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더군요. 그때만 해도 아직 어린지라 저게 둘이 좋아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강제로 하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데요. 그저 사춘기 시절 좋은 구경 하는구나 싶어 몸을 숨기고 지켜봤다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누나가 자살한 겁니다. 누나의 죽음에 대해서 동네에 쫙 퍼진 소문은 녀석 귀에도 들어갔죠. 분명 그날 밤 보았던 일과 관련이 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차마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답니다. 수박서리 한 것에 대해 털어 놓을 일도 그렇고, 그 자리에서 범인을 말린다거나 바로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을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겁이 났던 거죠. 그러는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가버리고, 뭐 그렇게 설렁설렁 시간이 흐르는 사이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가 저를 보는 순간 다시 기억이 나버린 거였죠.”
“그거 참, 헉헉, 별 일이 다 있군.”
우진은 숨이 차올라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결국 수년이 흐른 뒤에야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됐습니다. 같은 마을에 살던 영감님의 먼 친척이었어요. 서울서 살던 친군데 그때 잠시 영감님 집에서 지낸 적이 있던 게 기억나더군요. 소문으론 음악 한다고 가출해서 떠돌다가 우리 마을로 기어 들어와 친척집에 잠시 얹혀살던 중이었어요. 매일 이산 저산 쏘다니며 기타나 튕겨대니 집안일 돕느라 바쁘던 전 몇 번 오가며 본 것이 전부였죠.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그 자식 서울 집주소를 알아냈지만 이미 미국으로 전 가족이 이민을 가버린 후더군요.”
혁종의 얘기가 끊겼다. 넓은 헬스장 안은 러닝머신의 전동모터 소리와 우진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진은 벽에 붙은 거울에 비친 혁종의 모습을 슬쩍 살폈다. 벤치프레스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인 그는 미동도 않고 있었다.
“헉헉, 그래서 결국, 헉헉, 못 찾은 건가?”
기계 위를 달리는 우진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속도를 표시하는 디지털 숫자는 여전히 12를 표시하고 있었다. 속도를 줄일 생각으로 버튼 쪽으로 손을 뻗으려는 찰라 다시 혁종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가 않더군요. 군에 근무하다 보니 이래저래 제약도 많았고요. 그때 쯤 아까 말한 스피드란 영화를 봤어요. 그리고 폭탄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지요. 제가 맡은 업무상 늘 폭발물을 옆에 끼고 살아야 했고 여러 가지 기폭장치나 폭탄에 대해서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우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혁종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예를 들자면 말입니다. 지금 사장님이 달리고 계시는 러닝머신 말이에요. 영화에 나온 것처럼 달리는 속도가 시속 10km를 넘어가면 폭탄의 스위치가 켜졌다가 다시 그 아래로 속도가 내려가면 폭발하는 폭탄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론 소용이 없어요, 달리던 사람이 패드에서 내려와도 기계는 한동안 혼자서 돌아가거든요. 그 사이에 타깃이 된 사람은 얼마든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수 있고요. 그래서 다른 방식이 필요했어요!”
소리라도 지르듯 말끝을 올리는 혁종의 기세에 슬그머니 페이스를 늦추며 기계에서 내려오려던 우진은 다시 달리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중과 진동, 이 두 가지를 감지하는 센서를 기폭장치에 연결하는 겁니다. 머신 위를 달리려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요소니까요. 하중과 진동이 감지되지 않으면 달리던 사람이 기계에서 내려왔다는 것이고 동시에 폭탄이 터지게 되는 거죠.”
혁종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카운터 쪽으로 돌아갔다.
“사실 그런 기폭장치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요. 센서 몇 개만 이어 붙이면 되는 거니까요. 문제는 폭약이죠. 우리나라에서 민간인이 대인살상이 가능할 정도의 폭약을 구한다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화학지식과 어느 정도 설비가 있다면 조악한 폭약을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런 건 폭발력이 약해서 러닝머신에 숨길 수 있는 분량으론 불꽃놀이 정도밖엔 할 수 없을 거고요.”
뒤편 카운터 쪽에서 들려오는 혁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진은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러닝머신의 계기판 속도는 12km/h를 표시하고 있었다. 속도를 낮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문득 조금 전 혁종의 이야기가 기억났다. 그가 군복을 벗게 만든 사건, 그가 관리하던 폭약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진의 머릿속에선 까맣게 잊고 살던 오래 전 기억의 조각 하나가 펼쳐지고 있었다. 가수를 하겠다며 깝죽거리다 학사경고를 받고 아버지에게 신물이 나도록 얻어맞고 뛰쳐나온 집. 그리고 명절 때나 가끔 보던 시골 친척집으로 도망갔던 일. 거기서 만났던 소녀. 서울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교복 차림의 소녀에게서 욕정을 느꼈던 기억. 해질 녘 인적 뜸한 야산으로 불러내 그 애를 덮치던 순간의 느낌들이 떠오른다. 강하게 거부하는 소녀의 뺨을 몇 번인가 후려쳤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 얼얼하니 달아오른 그의 손. 눈물이 가득한 채 그를 바라보던 시선만큼이나 차갑던 소녀의 몸.
“헉헉...... 이봐, 혁종씨.”
“예, 부르셨어요?”
“내가, 하악하악, 잘못했어. 내가...... 헉헉헉. 내가 죽을죄를......”
우진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러닝머신의 손잡이를 그러잡고 안간힘을 다해 소리쳤다. 하지만 카운터 너머 들려오는 혁종의 목소리는 너무나 태연했다.
“미안하다니, 뭘 말입니까, 사장님? 아이고 시간이 벌써...... 저 아무래도 먼저 퇴근해야 되겠네요. 생각해보니까 집에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전화로 사장님 오라고 할 테니까 잠깐만 혼자 운동하고 계시겠어요? 이게 다 사장님이라서 믿고 부탁하는 겁니다. 하하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문은 잠글게요. 사장님도 열쇠 가지고 게시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요.”
“혁종씨, 가다니. 헉헉헉,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말 좀 들어봐. 히익 히익, 그게 사실은 말이야.”
뭔가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우진은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정면 거울에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위로 약간 들린 기계의 바닥 아래에서 무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내밀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기계 아래편 어딘가에서 두 개의 빛이 발광하고 있었다. 적색과 녹색, 적색등은 계속 켜져 있는 것과 달리 녹색 불빛은 규칙적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탁, 탁, 탁, 탁. 녹색등의 점멸 간격이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자신의 보폭과 같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안 돼!”
미처 말려볼 겨를도 없이 혁종은 시원스런 인사와 함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철컥하며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헬스장 안은 우진 혼자뿐이었다. 핸드폰은 옷을 갈아입으며 라커에 두고 나왔다. 밤 시간이면 대부분 빠져나가는 상가빌딩인데다 하루 종일 음악을 틀어놓는 헬스장의 특성상 방음도 잘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소리를 지른다 한들 그의 목소릴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우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25분’
사장이 올 거란 혁종의 말은 거짓일 것이다. 영업시간이 끝난 마당에 여기로 올 사람은 이제 없었다. 내일 아침 오픈 시간이 되어야 도움을 청할 사람이 올 것이다. 헬스장은 6시 30분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준비시간이 필요할 테니 다른 직원들은 6시 전엔 출근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6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는 말이다.
혁종이 말한 대로라면 러닝머신의 속도는 10km/h로 떨어져선 안 된다. 또한 거기서 잠시라도 내려오거나 걸음을 멈춰서도 안 된다. 6시간이 넘는 시간을 시속 10km의 속도로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얘기다.
‘할 수 있을까. 내가 마라톤 완주했을 때 기록이 몇 시간이었지? 3시간 근처였나. 그럼 살기 위해서 마라톤 거리의 두 배를 달려야 한다는 거야? 그러다 발이라도 꼬이면 어쩌지. 그대로 넘어져 버리면? 미끄러질 수도 있는 거잖아. 정말 그게 가능할까. 6시간 동안 마라톤 코스를 두 번이나 완주하는 게 지금 내 나이로 가능한 일인가?’
우진의 맘속에선 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계산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실내에 그의 발걸음 소리만이 메아리친다.

헬스장 주인인 김 씨는 평소와 같이 오전 5시 40분에 가게 문을 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곧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퇴근 시 전부 소등해야 할 전등이 모두 켜져 있었다. 뒷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기구들이 여기저기 너저분하니 널려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 씨를 놀라게 한 것은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열기였다.
벽 쪽에 늘어선 러닝머신 하나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말없이 달리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실내를 가득채운 열기는 바로 그가 뿜어낸 것이었다. 김 씨는 조심스럽게 러닝머신 쪽으로 다가갔다.
“당신 뭐야?”
러닝머신위의 남자를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의문의 사내는 바로 헬스장 회원인 나우진 사장이었다. 저녁시간에 자주 운동하러 왔었기 때문에 그와는 안면을 익힌 사이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김 씨가 알던 우진이 아니었다.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 탄력을 잃고 쪼글쪼글해진 살갗, 늘어진 피부 여기저기엔 검은 반점이 피어나 있었다. 나이보다 10살은 젊어 보이던 동안의 사내는 밤사이 70대 노인으로 폭삭 늙어버렸다. 땀으로 흠뻑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진의 옷을 보며 김 씨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사장님 설마 밤새 여기서 달리신 겁니까?”
행여나 가게에서 사람이라도 죽어나가면 골치 아프단 생각에 김 씨는 서둘러 기계의 전원 스위치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진 우진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기력이 없어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팔로 그는 전력을 다해 김 씨를 말리고 있었다. 이빨이 듬성듬성 빠져나간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노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안 돼, 폭탄...... 끄면, 폭탄, 터져.”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하는 노인의 시선을 따라 러닝머신 속도표시를 본 김 씨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숫자는 기계의 속도를 10km로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다 우진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며 느릿느릿 걷고 있는 지금의 속도는 아무리 봐도 시속 3km를 넘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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