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대화.

  • 은밀한 생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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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토요일 점심으로 국수를 먹기로 했습니다.
동네에 새로 문을 연 국수집인데 ***맘보라구요.
두 앳된 처녀들이 처음 이런 일을 해보는지 주문 받을 때나 그릇을 치울 때나
뭔가 어색한 미소와 어설픈 동작을 하는 것이 귀여운 곳이죠.

오늘이 세 번째 방문이었는데요,두 처녀 중 한 처녀가 아주 곱게 화장을 했더라구요.
참 고왔어요. 역시 분가루는 20대 초반 아가씨들의 얼굴에 빈 틈 없이 스밉니다.
엄마와 어린 딸.(물국수 두 그릇)
산행 후 점심을 드시는 듯한 40대 아저씨들.(비빔국수 세 그릇 & 해물 국수)
20대 중반쯤의 연인.(물국수 & 비빔국수)
그리고 저희 두 사람.(콩나물 비빔밥 & 비빔국수)

그리고 바로 문제의 할머니와 아저씨.(물국수 두 그릇)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계셔서 모든 대화를 다 들을 수가 있었죠.
그냥 뭐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할머니는 단무지 좀 더 달라 난 단무지가 좋더라!
사리 추가는 먹으면서 하거라(아저씨를 향해)하시면서 국수를 드시고 계셨죠.
척 보니 교회에서 아시는 사이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권사,집사,목사등의 단어가 나오더군요.

아무튼 그렇게 남자친구와 저는 맛있게 국수와 콩나물 비빔밥을 먹으며
저쪽 동네의 ***맘보보다 여기가 더 나은데? 날씨 좋은데? 먹고 산책 가자!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토요일 점심을 마무리 중이었죠.
그때 한 가족이 들어왔어요. 그들은 할머니& 아저씨 바로 옆 테이블에 앉자마자
온 식당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할머니와 반가운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권사,집사,목사들의 단어가 나오더군요.
그 가족은 중년의 아주머니와 출가한 딸,갓 성인이 된 아들,출가한 딸의 어린 아들.
이런 구성이었어요.

역시 그런가보다...... 목소리가 참 우렁차고 큼직하시네에..... 생각하면서
여전히 국수를 맛있게 먹던 저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어요.
그 새로 등장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자신의 어머니뻘 되는 할머니한테
"어휴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권사님" 한 지가 1분도 안 되서.
"나 국수 네 그릇만 사줘!!!" 하는 거였어요. 아주 우렁차고 당당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할머니는 짐짓 당황한 듯 물국수를 드시다 말고 "아휴. 그러면 좋은데 지갑을 안 가져와서...."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굴하지 않고 "나 국수 네 그릇만 사줘!!!"
다시 할머니는 "아휴.. 그러면 좋은데 이건 H권사가 미리 계산하고 간 거야...."
그 아주머니는 "H권사 어딨어? 나간지 얼마 안 됐어?? 불러 불러!"
다시 할머니는 "......그, 글쎄에...?"
그 아주머니는 "그럼 E권사가(할머니) 나 국수 네 그릇만 사줘!!!!"

할머니의 일행인 아저씨는 휴지로 땀을 살짝 닦아가며 말없이 국수를 드시고
할머니도 아휴 아휴 두 번 얘기하시고 국수를 드셨어요.
그렇게 몇 분이 지난 후 잠잠해진 그 가족을 향해 할머니 가라사대.
"아니 근데. 남편은? 남편 바람났어?"

(바, 바람 났; 바람.... 바, 바라암?? 오우..... 신이시여.
전 정말 제가 어느 세상에 와 있는 건지 순간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 왈,
"아유 아니야!"
이윽고 할머니네는 식사를 다 마치고 자리를 뜨시며 다시금 할머니께서
그 아주머니의 출가한 딸의 얼굴을 거의 두 손으로 감싸 안듯이 살갑게 어루만지시며,
어루만지는 건지 실은 때를 미는 건지 잘 알 수 없도록 너무나 힘차게 만지시며.
할머니께서 그 딸을 향해 가라사대.
"아휴 근데, 얘는 예전엔 이뻤는데 얼굴이 왜 이렇게 망가졌니이!!!"

(망,마,망가졌; 망가지다... 망가져.... 상했다도 아니고 망가져......허허.맙소사.)
순간 그 딸의 얼굴은 핏기가 가시면서 돌처럼 굳습디다.
국수 사달라고 강짜 놓던 아주머니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지더군요.
하지만, 아휴 기도 시간에 봬요 네네 교회에서 봬요 아휴 만나서 반갑다 그래요 그래
라고 다시금 그들은 인사를 주고 받으면서 완벽하게 헤어졌습니다.

거기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단지 구경하던 제가 이곳이 어딘가 내 친구들은 누군가 저들은 누구인가 세상엔 여러 가지
화법이 정말 다양하게 존재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국수를 마저 비웠을 뿐.

그런데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들의 표정 말인데요.
분명히 모두들 입만 웃고 눈은 웃고 있질 않았어요.
그 할머니의 아주 환하게 입이 찢어지던 미소와 무표정한 눈빛.
그리고 카랑카랑한 노년의 목소리로 "아휴 얘는 왜 이렇게 망가졌니!!!" 하던 것이.
교회에서 봬요 하면서 그 딸과 그 아주머니가 입만 웃으면서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던 것이.

참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환청이 다 들릴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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