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

  • 01410
  • 05-09
  • 891 회
  • 0 건
이웃집 토토로라는 작품은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스토리의 내용이나 지브리 특유의 서정성과 활기 같은 이유도 있겠고, 나로서는 그러한 것뿐만 아니라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나 역시 1990년경까지는 시골에서 살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 비록 연배는 사츠키였지만 그보다는 메이의 추억에 더 가깝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러한 추억의 단편들은 포스팅을 몇 개나 써도 모자랄 듯싶다. 그러한 추억 중에 하나를 꺼내보면 팽이가 있다. 토토로가 하늘을 날 때 사용하는 도구다.

사실 나로서는 90년대 초 항구도시로 전학왔을 때, 그 곳 친구들이 들고 있는 그 팽이의 모양새가 적잖이 이상했더랬다. 그 모양새라는 것이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사람들이 '저게 뭐가 이상해?' 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토토로가 타고 날던 그 팽이랑 똑같이 생긴 것 - 옆에서 봤을 때 가로가 길고 세로가 짧아 막사발처럼 넓적하게 생긴 모양새. 사실 요즘에는 일반적으로 팽이라고 하면 이러한 모양을 떠올리는 게 상식이다. 도시의 새 친구들은 그 플라스틱 재질에 '스뎅'으로 마구리를 마감질한 팽이에다가 운동화 노끈같은 줄을 잘 감아 홱 던져 놀았다. 난 적잖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 때까지 보고 지내던 팽이는 순 조선딸딸이... 아니 조선팽이였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가끔 농사일 하다 남는 장작개비 같은 걸로 팽이를 솜씨좋게 깎아 주셨다. 사실 팽이뿐만 아니라 새총이며 나무총 같은 것까지도 가끔 깎아주시던 기억이 난다. 당신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끌이나 조각도 같은 도구 하나 없이 오로지 꼴 베는 낫 하나만 갖고 만들어 냈다. 그렇게 닥나무나 참나무를 찻잔 모양으로, 그리고 옆에서 봤을 때 세로로 길게 깎아 아래쪽을 조금 둥글게 만든 후 대못을 하나 박아넣으면 그게 팽이였던 것이다. 그걸 가지고 (특히 겨울에) 얼음판이나 논바닥에서, 닥나무껍질을 길게 까서 짓이긴 후 막대에 칭칭 감아 만든 팽이채로 빙글빙글 쳐 가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팽이라는 건 내 기억 속에 있는 그렇게 생긴 것이었는데, 이 도시놈들은 갑자기 옆으로 떡 벌어진 팽이로 승부를 걸어 오니, 세상물정 모르는 촌놈은 어린 마음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던 게다. 조선팽이는 팽이채를 가지고 계속 찰싹찰싹 때려 가며 안 쓰러지게 돌려야 하는데, 이노무 도시 팽이란 거는 이른바 줄팽이라서 끈으로 감아 던진 뒤에 팽이가 제풀에 쓰러질때까지 누가 오래 버티나를 겨루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조선팽이로는 어떻게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런 룰로는, 내 팽이는 두 바퀴 돌면 많이 버티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등교 첫날 그 동네 토박이에게 처절하게 깨진 후, 승부근성에 불붙은 나는 다음날 거금 2백원을 들여서 문방구에서 줄팽이를 샀다. 다른 아이들이 쓰던 백원짜리 팽이보다 1.5배는 큰 놈인 이른바 "뮤태킹" 이었다. 그리고 사흘만에 나는 동네 팽이를 다 쓸어버렸다. 애들이 "사기"라고 볼멘 소리를 했지만, 나는 단호했다. "느그도 큰 거 사오든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마불사의 진리를 깨달아버린 듯싶다.(.....)

하지만 다른 놈이 같은 크기의 뮤태킹을 사왔어도 나한테 적수가 될 순 없었다. 나는 원체 조선팽이에 이골이 나 있는 놈이기 때문이었다. 얌전한 회전 승부가 아니라 숫제 싸움을 붙여서 상대를 쓰러뜨려버렸다. '솟(沼)가'라고 부르는 깊은 여울의 얼음장 위에서 3년을 싸움먹던 실력이다. 자신이 있었다. 질 턱이 없었다. 게다가 줄팽이는 승부를 걸기에도 좋았다. 야구 선발투수가 릴리스 포인트를 놓는 것마냥 홱 줄을 나꿔채서 상대 팽이 위에다 찍어버리면 열에 아홉은 쓰러졌다.

여튼 그런 식으로 나는 팽이는 꽤 잘 던지던 편이었다. 딱지치기는 그냥 엎치락뒤치락 고만고만했다. 솔직히 동네 형이 우유팩으로 접어 온 딱지는 크디큰 신문지 딱지로 때려도 도무지 넘어가질 않았다. 어떻게 접은 건지 아직도 미스테리다. 다마치기(구슬)는 도무지 그 안(安) 머시기의 쇠다마를 견뎌 낼 재간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확실히 팽이 하나는 붙어볼 만했다. 그마저도 심심해지면 가스나들 고무줄을 끊고 줄행랑을 쳤는데 다음날 민 아무개의 주먹에 쌍코피가 터졌다. 태어나서 두 번째 흘리는 쌍코피, 여자애들이 손이 더 맵다. (후에 서울에서 우연히 마주친 걔한테 밥 같이 먹으면서 이 얘길 했더니 '어머나 내가 그랬어?' 하고 점잔을 뺐다.)

그 때로부터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요즘도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 애들은 내가 어렸을 때처럼 팽이치기를 하고 논다. 그런데 팽이는 여전히 끈 감아서 던지던 그 팽이다. 이게 일본식이었는지 아닌지 헷갈린다. 찾아보니 일본식 팽이는 '고마'라고 하는 것 같은데 확실히 생긴 건 도시의 줄팽이랑 비슷하게 생겼다. 서양 팽이는 안에 나사가 들어서 꼭지를 툭툭 누르면 더 회전력을 얻는 방식이었던 것 같고, 21세기 들어서는 다들 탑블레이드로 통일된 듯한 느낌이다.(.....)

여튼 끈 감아서 휙 던지는 팽이는 조선팽이는 아닌 듯싶다. 생각해보니 "채를 감아 던지면 꼿꼿하게 서서 뱅글뱅글 잘도 돌아가는" - 동요에 나오는 팽이도 서양 팽이인 것 같다. 이 노래의 곡조가 아마도 외국곡(양키 두들)이었던가. 그리하여 나는 1990년 이후 조선팽이는 본 적이 없다. 그 찻잔처럼 생긴 참나무 팽이와 닥나무 팽이채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모를 일이다.

_______________

새벽에 쓴 글 때문에 또 기억 담는 주머니가 열려 버렸습니다. 그냥 생각난 김에 어디 처박아 뒀던 글 꺼내서 한 번 다시 올려봅니다.

게시판2004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41624 내 깡패같은 애인 재밌을 것 같아요 1,815 05-09
141623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투표에서 2등했을거같은 배우들 케이티페리 1,100 05-09
141622 (urgent) buying a zip-up tie around Gangnam-Station doxa 521 05-09
141621 아이언맨 2 한 줄 감상 겨자 1,565 05-09
141620 [듀나in] mp3파일 편집하는 프리웨어 나와나타샤 655 05-09
141619 미술 전시 관련 정보 어디서 얻으시나요? mithrandir 843 05-09
141618 가수 신예원씨 좋아하시는 분 있나요 1,438 05-09
141617 오늘 있었던 일... Apfel 657 05-09
141616 맷 리브스 신작 [렛 미 인] 새로 공개된 스틸 보쿠리코 1,941 05-09
141615 Stand By Me... 조성용 905 05-09
141614 50인치 pdp 텔레비전 설치하고 보니 확실히 신세계군요. stardust 2,173 05-09
141613 캠퍼스의 봄 조성용 1,596 05-09
141612 어린이날 결혼식 가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조성용 1,265 05-09
열람 팽이. 01410 892 05-09
141610 요즘 재밌는 공연? nobody 900 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