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만화와 영화

  •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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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장호 감독이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로 만든 후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영화가 시원찮으면 만화같다고들 하는데, 내 영화를 보더니 만화보다도 못하다고.."하는 투로 웅얼댄 적이 있었다. 웃음 섞인 대화였지만, 우리 나라에서 만화가 받는 취급에 대해 쓴 웃음을 짓게 하는 이야기였다.

원작 만화는 외견상 서자 소년의 성장기인데, 칼잡이로 크는 소년의 이야기이다보니 당연히 성욕과 살인이 전편에 가득하다. 또한 이 만화는 글을 통해 배우기보다는 몸으로 땀과 피를 흘리면서 삶을 경험해가는 남녀들의 이야기이다. 이 성욕은 상대방 여성의 입장을 볼 줄 모르는, 여성을 오직 성욕의 대상으로 인지하는 동물적 수준의 감각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그런데 눈덮힌 금강산을 여인의 나신으로 베껴 내는 화폭에서 보듯, 이 욕구는 화자들이 세상을 인지하는 하나의 통로이기도 하다. 이론적 모형과 실증적 데이터가 아니라 자기 경험에 근거하여 삶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말하자면 학문 이전의 가르침과 배움들을 주고 받는 데에는 현실적인 대가가 따른다. 배움을 위하여 때로는 삶을, 때로는 몸을 잘라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남의 몸에 흘린 피로 내가 뭔가를 얻기도 비일비재. 그 배움은 이미 가진 지식의 덩어리에 새로운 관념들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제 몸을 혹은 남의 몸을 피흘리는 아픔을 겪어가면서 하나씩 얻는 귀한 보석들이다. 그러므로, 거저 남에게 쉽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과정들 속에서 만화는 하나의 이미지에 도달한다. 죽고 죽이며 미워하고 애욕하며 살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 동그란 빛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하지만 달도, 구름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인연의 굴레는 한 순간도 벗어나지 않았다. 땅을 적신 붉은 피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다만, 구름 속에 있을 때에는 어둠이 빛인 줄로만 알았는데, 한순간 달이 구름을 벗어나 보니 아하 저것은 그저 구름이었구나.. 그래서 구름도 달도 거기에 그렇게 있더라는 걸 문득 보았더라는 이야기이다. 구름을 제거하자는 소리와는 삼만 팔천리 멀다. 구름과 달은 따로가 아니니까.

영화는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더욱 이념적으로 하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칼잽이는 칼 뒤에 숨는 법이여"와 "나는 그런게 싫더라고"가 갖는 무게는 동등하다. 영화의 이몽학은 달을 가리는 구름에 불과한 조연이 아니라, 구름으로서의 당당한 제 목소리를 가진 존재이다. 그런데 어쩔꺼나. 정작 칼이 가는 길을 끝까지 갔는데, 끝에서 마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빈 의자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그곳은 빈 의자가 아니다. 황처사의 달이 이몽학의 가슴을 비추어, 날랜 칼끝을 한순간 멈추게 했다. 그러므로 이몽학은 구름을 베는 칼의 당당함과 깨달음을 얻은 확고한 주연이었고, 이것은 만화에서 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황처사야말로 견자와 더불어 이몽학을 위해 안배된 조연으로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성적으로 유년인 것 같다. 원작 만화에 넘치는 비릿한 욕정이 영화에서는 말끔히 제거되어, 등장인물들의 입장과 갈등들은 인터넷 논객들의 논쟁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러한 욕정의 절제는 그의 전작 '왕의 남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산군과 장녹수가 벌이는 질펀한 정사에도, 술취해 난동을 부리는 풍물거리에도 욕정은 만담처럼 웃음의 도구일 뿐, 진지하게 제대로 정식으로 화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공길은 아름다운 왕의 남자일 뿐, 그의 욕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는 몰랐었는데, 이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통해 만화와 비교해보니, 음 그랬었지.. 하는 감상이 새삼스럽게 들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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