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사랑하기 때문에

  • clancy
  •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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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때문에

최기수는 굳게 닫힌 철문 앞에 선 채 팔분음표가 양각으로 새겨진 인터폰의 스위치를 다시 한 번 눌러 보았다. 2단 구조의 정원 너머 집 안에서 희미하게 벨소리가 들린다. 인터폰이 고장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역시 아무도 없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중에 다시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겠지만 기수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이미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 집에 살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다. 집 전화, 휴대폰, 직장 전화, 이메일까지 심지어 싸이홈피에 트위터까지 뒤졌다. 하지만 지난 며칠 간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다. 기수는 휴대폰을 꺼내 최근 발신목록을 열었다.
‘최진수 010-3198-XXXX'
집주인이자 기수의 동생이기도 한 진수의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 본다. 신호가 간다. 컬러링은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였다. 고리타분하다며 요즘 노래로 바꾸라고 했었지만 진수는 끝까지 이 노래를 고집했다.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 내 모든 걸 드릴 테요.....’ 노래의 가사 중에서도 그는 이 부분을 가장 좋아했다. 그건 아마도 그와 제수씨와의 사연 때문일 것이다. 기수는 하나뿐인 동생 진수와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된 지원에 대해 떠올렸다.

진수와 지원 둘은 학창시절부터 유명한 캠퍼스커플이었다. 학부시절에 이미 벤처 사업을 시작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뉴스나 신문에서도 종종 이름이 거론되던 청년 CEO 진수와 미스코리아 지역예선에서 진을 차지한 적이 있는 검증된 미모의 지원. 모든 이들이 둘 사이를 질투했다. 형인 기수 입장에서도 동생 커플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드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진수 역시 여느 대한민국 청년들처럼 병역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학사장교였다. 회사 경영 일선에선 잠시 물러나고 장교로 근무하며 간접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일종의 투잡을 뛰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지원과의 관계도 생각해야 했다.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운 장교라면 국방은 물론 연애전선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며 훈련소 입소 전날 가족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너스레를 떨던 진수였다. 하지만 3개월이란 훈련기간은 지원이 같은 미모의 여성에겐 너무 긴 기간이었던 모양이다. 그 사이 그녀는 강남의 성형외과에 근무한다는 젊은 의사와 바람이 났다. 임관식을 마치고 돌아와 형제끼리 가진 조촐한 술자리에서 진수는 분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3개월을 못 기다려, 우리가 만난 시간만 3년이 넘는데. 그동안의 시간은 다 뭐였던 거지?’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일과 사랑까지 모든 면에서 거칠 것 없이 해치우며 형을 기죽게 만들던 완벽주의자 동생에게서 초등학교 이후 처음 보는 눈물이었다. 이후로 동생은 오로지 일에만 열중했다. 3년 후 전역할 무렵엔 직원 수 3명으로 시작했던 사업체는 15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우량기업으로 성장했고 코스닥에 우회상장까지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지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잘나가던 의사 애인은 알고 보니 도박 중독에 알콜 중독 심지어 약물까지 손을 댄 중독에 중독된 인간이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고도 한동안 지원은 주위에 사실을 숨긴 채 그를 갱생시키겠다며 매달렸다고 한다. 잘난 외모로 늘 완벽한 세계에서 살아온 그녀로선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는 물론 그녀의 가족까지도 의사 애인의 실상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여러 가지 문제들로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된 이후의 일이었다. 여러 가지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이 그녀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망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짜잔,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날 순간이었다. 기수로선 동생이 매몰차게 자신을 버리고 간 여자를 위해 먼저 소매를 걷고 나서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젠가 대체 이유가 뭐냐고 그가 물었을 때 진수 녀석은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답했다.

‘회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진수가 통 연락이 안 된다는구나. 사정이 급한 모양이던데.’
동생의 회사에서 온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기수에게 연락을 한 것이 나흘 전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는 동생이 잠수라도 탄 모양이라 생각하며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락을 해보려니 그의 전화도 받지 않을뿐더러 지원 마저 전화가 되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부랴부랴 갖가지 방법으로 진수 부부에게 연락을 취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동생 부부의 집에서 근무하던 가사도우미는 이미 훨씬 전부터 일을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도 알았다.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게 됐다면서 집도 이사 할 거니까 더는 올 필요가 없다고 갑자기 그러시더라고요. 한 달 치 급료를 추가로 얹어주셔서 저도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죠.”
뭔가 점점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일 쪽으로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그쪽도 알아보았지만 회사의 임원들 모두 사업은 너무나도 잘 돌아가고 있다며 그래서 더 그가 잠적한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결국 기수는 동생 내외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이 언제인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진수 쪽은 간단했다. 일주일 전 회사에서 신제품 개발과 관련해 전체 회의를 가지고 퇴근한 이후로 연락이 끊겼던 것이다.
“그 다음날도 부품 조달 문제로 거래처 쪽과 미팅이 잡혀 있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사모님한테 전화를 했었죠. 집안 일 때문에 급하게 지방에 내려가셔서 당분간 연락하기 힘들 거라고 하시더군요.”
회사 창업 초기부터 함께해 기수와도 막역한 박 전무의 증언이었다. 그래서 다시 지원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때엔 이미 그녀까지도 연락이 끊긴 후였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집안 문제 같은 건 없다는 걸 형인 기수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회사 역시도 진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중요한 시기였다. 역시나 그의 잠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 지원을 목격한 사람이 나왔다. 바로 진수의 집이 있는 동네 어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 씨였다.
“그 사모님이야 잘 알고 있죠. 워낙 눈에 띄는 외모 시니까요. 저희 가게에도 종종 직접 세탁물 맡기러 오시곤 했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보셨던 게 나흘 전이란 거죠?”
“예, 우리 아들놈 태권도 경기가 있던 날이라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가게도 닫고 응원을 갔었거든요. 경기 끝나고 가게에 볼일이 있어서 나왔는데 사모님이 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이더라고요.”
세탁소는 곧게 뻗은 주택가 도로 끝에 위치해 있었고 진수의 집과는 50m도 안 되는 거리였다. 가게 셔터를 내리려는데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대문 앞에서 무언가를 끙끙대며 옮기는 지원이 보였다는 것이다.
“워낙 특이한 광경이라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사모님이 근처 장보러 나가실 때도 항상 완벽하게 차려입고 나오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참 자세히도 관찰했구나라고 생각을 하던 기수는 반쯤 벗겨진 머리를 매만지며 능글맞게 웃는 세탁소 주인의 표정을 보곤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올해로 32살인 지원은 여전히 젊고 매력적이었다. 미스코리아 출신답게 큰 키와 육감적인 볼륨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이 중늙은이도 그녀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동했을 것이다. 그런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씨는 열심히 그날의 일을 설명했다.
“그런데 그땐 좀 다르더라고, 옷차림도 후줄근하고 여기저기 뭐가 묻어서 더러운데다 머리도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어요. 꼭 어디서 싸움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그런데다가 큰 포대자루 같은 걸 열심히 집안으로 옮기는데 멀리서 봐도 그게 뭔지 딱 알겠더라고요.”
“뭐였죠, 옮기고 있었다는 게?”
“시멘트요, 시멘트 포대.”

길 저편 세탁소 쪽에서 건장한 체구의 중년사내가 기수에게로 걸어오며 말을 건다.
“해가 있었으면 저기서도 충분히 식별할 수 있었겠네요.”
그는 관할서에서 나온 박 형사였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기수가 실종신고를 하러 직접 서까지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자 사건 가능성이 있다며 먼저 나선 남자였다. 아마도 부부가 함께 실종되었고 남자 쪽은 성공한 사업가란 점이 그를 자극했을 것이다.
“역시나 제수씨였던 모양이네요.”
“아직은 상황을 모르니 섣불리 판단은 말자고요. 열쇠는 가져오셨죠?”
“예.”
기수는 미리 챙겨온 동생집 열쇠를 꺼내 보였다. 어제 본가에 내려가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걸 받아왔다. 명절을 제외하고는 가끔씩 안부를 묻는 통화 외엔 동생 부부와 거의 교류가 없던 기수였기에 집 열쇠 같은 것 역시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구멍에 키를 넣고 돌리자 지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린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밀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집으로 통하는 현관문은 열려있었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문틈으로 보이는 안은 컴컴했다. 커튼을 모두 치고 전등마저 꺼버렸기 때문이었다. 기수의 마음 한구석 불길한 예감이 점점 커져갔다.
“여기서부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그를 저지하며 박 형사가 말했다.
문이 열리자 빛이 새어들며 집안이 조금 환해졌다. 마치 집안을 채우고 있던 어둠이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 안에 갇혀있던 다른 것들도 바깥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냄새죠?”
“썩은 내군요.”
익숙한 듯 답하는 형사의 표정이 굳었다. 둘은 누가 듣기라도 할까 발걸음을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것은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시멘트 포대들이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박 형사가 말했다.
“세탁소 주인 말이 사실이었군요.”
“대체 저런 걸 왜......”
기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부족할 것 없는 평범한 삶을 살던 주부가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낑낑대며 시멘트를 실어 나를 이유란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지원을 만나 진수의 행방에 대해 알아보고 나면 두 번째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녀의 대답을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저, 저건.”
거실 한쪽에서 지원을 발견한 순간 기수는 숨을 집어 삼키며 손으로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헐렁한 티셔츠 아래 속옷과 양말 외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차림이었다. 그나마 티셔츠도 허리춤까지 돌돌 말려 올라가 아래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마치 편안히 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지만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핏기를 잃고 허옇게 변한 피부, 드러난 피부의 아래쪽에 시커멓게 자리한 시반들이 보인다. 그녀의 얼굴도 더 이상 이전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부패가 시작되어 감은 두 눈 사이로 진물이 흘러내리고 코와 입에는 허연 포말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걸 먹은 모양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박 형사가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는 약병을 볼펜으로 집어올렸다.
“그게 뭐죠?”
“수면제 같아요.”
형사는 약병을 조심스럽게 도로 내려놓고선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기수는 멀찍이 서서 지원의 시신을 보았다. 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차마 가까이 다가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죽었다니. 동생의 무사에 대한 희망이 급격히 사그라진다. 동시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더욱 궁금해 졌다.
“저기요, 잠깐 이리 좀 오시겠어요?”
거실에서 이어지는 복도 너머에서 박 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수의 시신에서 눈을 돌리고 형사가 부르는 곳으로 향했다. 복도 너머는 부부 침실을 비롯해 몇 개의 방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형사는 거기서도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욕실 앞에 서 있었다. 발바닥에 자각자각 무언가 밟힌다. 내려다보니 거실에서부터 이곳까지 작은 가루와 덩어리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그것이 골재와 시멘트란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 뭐가 있었는지 아세요?”
형사 옆에 가서 선 기수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한때 커다란 욕실이 있던 곳을 시커먼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자체로도 이상했지만 가까이 다가서자 드러난 벽의 모습은 더욱 괴이했다. 그것은 시멘트로 이어붙인 조형물 같았다. 보통은 벽을 만들 때 벽돌이나 돌을 쌓아올리겠지만 이 벽은 갖가지 잡동사니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액자, 밥솥, 전화기, 신발, 옷가지 등.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가져와 쌓으며 시멘트를 바른 모양이다.
“이게 대체 뭐죠?”
“내가 물어보고 싶네요. 이 안은 뭐죠?”
“욕실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린다. 욕실 안쪽에 달린 전등이 켜지자 벽을 올린 물건들의 엉성한 사이로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박 형사는 틈새에 눈을 가져다 대고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동안 욕실 안을 들여다보던 그의 눈썹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저거......”
그 모습에 기수도 따라서 벌어진 벽 틈에 눈을 가져갔다.
욕실 바닥도 역시나 시멘트 가루와 모래들이 가득 흩뿌려져 있었다. 플라스틱 대야와 양동이, 삽과 흙손도 보인다. 벽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물건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아니란 것을 알았다. 적어도 벽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안이 아닌 바깥에 도구들이 있어야 한다. 뒤이어 욕실 안쪽에 붙은 욕조가 보였다. 욕조 안쪽을 무언가 시커먼 것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정황상 시멘트가 분명하다. 가정집 욕조 안을 시멘트로 채우다니 이 역시 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기괴한 것은 따로 있었다. 시멘트 덩어리에서 밖으로 뻗어져 나온 하얀 덩어리였다. 힘없이 아래를 향해 축 처진 물체는 사람의 팔이었다. 사람의 팔이 시멘트 덩어리에서 자라나듯 솟아나 있는 것이다. 팔을 제외한 몸의 나머지는 욕조 안, 그러니까 시멘트 반죽 속에 있다는 얘기였다.
“일단 이걸 먼저 부숴야겠네요.”
형사는 당황스런 목소리로 말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채 10분도 되지 않아 해머와 정 등을 챙겨든 순경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박 형사의 지휘를 받으며 일사분란하게 욕실 입구에 세워진 기괴한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기수는 위험하다는 형사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지원의 시신도 과학수사팀이 오기 전까지 현장 보존을 위해 출입이 통제되고 보초역인 경찰도 세워졌다. 갈 곳을 잃고 서성이던 기수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엔 진수 부부의 서재가 있었다. AV룸으로도 사용되는 방 안은 책과 음반, 비디오테이프, DVD 등이 가득한 진열장과 함께 하이파이 오디오와 고가의 홈씨어터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트라이포드에 고정된 캠코더가 보였다. 캠코더는 벽에 걸린 LCD 모니터에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었다. 기수는 캠코더를 살펴보았다. 디지털 방식의 기기엔 10여분 분량의 녹화영상이 저장되어 있었다. 기수는 모니터 전원을 켰다. 캠코더의 외부입력 화면이 바로 표시된다. 캠코더에 저장된 유일한 영상을 재생하자 서재를 배경으로 카메라를 마주하고 앉은 지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제 이름은 박지원입니다. 이 화면이 재생될 즈음엔 저도 죽었겠지요. 아마도 이 집의 상황에 대해 궁금할 겁니다.”
기수는 화면을 정지시켰다. 화면 속에는 초췌한 얼굴의 지원이 있었다. 입고 있는 티셔츠 역시 아래 누운 그녀의 시신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동영상은 그녀가 자살하기 직전 남긴 유언이었다. 아래층에서 한창 작업 중일 형사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미리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동안 망설이다 결국 다시 재생버튼을 누른다.
“......거기에 대해 얘기하려면 먼저 최진수란 남자에 대해 말해야 겠군요. 그는 (잠시 침묵) 그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들 하겠죠. 똑똑하고 잘생기고 유능한 남자. 언제나 친절하고 자상한 남편.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한때 너무나 힘들어서 죽음까지 생각하던 저를 구해준 것도 그였죠. 전 그것이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때 자기를 버리고 떠난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냐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그랬거든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다시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어요. 친구들은 절 부러워했죠. 능력 있는 남자에게 극진한 사랑까지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결혼 후 그는 달라졌어요. 아니 본색을 드러냈죠. 그리고 전 늦게야 깨달았어요. 이 모든 게 졸렬하기 짝이 없는 소인배의 거창한 복수극이었다는 것을. 그는 저를 가두려 했습니다. 마치 애완견이나 장난감처럼 자기 마음대로 저를 조종하려 들었죠. 이걸 해라, 저건 하지 마라, 이걸 먹어라, 저걸 입어라. 그러다 제가 싫다고 하면 곧장 폭력을 행사했어요. 그러고 나선 미안하다며 다시 나를 달랬죠. 전 최근까지도 그런 그의 행동이 모두 제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를 힘들게 했기 때문에 저러는 것이라고, 내가 잘하면 되는 일이라고 말이죠.”
기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폭력이라니, 진수가? 그것도 아내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학생시절에도 싸움 한번 하지 않았다.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대줄 위인이었다. 그런 진수가 연약한 여자인 아내를 때리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영상 속 지원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교묘하고 강해졌습니다. 증거라면 내 컴퓨터에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턴가 그에게 얻어맞은 후엔 증거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으니까요. 다른 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옷으로 가려지는 부분들만 요령 좋게 때렸기 때문에 다음날 바로 외출을 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의 폭력은 단순한 물리적 폭행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관계에 있어서도 결혼 후 몇 달간을 제외하곤 한 번도 정상적인 관계를 가진 적은 없습니다. 모두 제 의지에 반하여 강제적이고 가학적으로 이루어진 강간이었어요. (잠시 침묵) 제가 이런 일을 벌이게 된 결정적 원인에 대해 얘기하죠. 얼마 전의 일입니다. 시내에서 우연히 전에 사귀던 사람을 만났어요. 그는 성형외과 의사였죠. 하지만 도박과 마약에 중독되어서 재산을 탕진하고 의사면허까지 박탈당한 이후론 폐인이 되었더군요. 그리고 최근에야 제 결혼 소식을 접하고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 봤다더군요. 그 사람이 그랬어요. 먼저 자신에게 다가와 친분을 쌓고 자신을 도박장에 처음 데려간 것도, 마약상과 연결시켜 준 것도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그게 바로 제 남편이라고 말이죠. 그때부터 최진수란 남자의 계획은 진행되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사랑하던 남자를 망쳐놓고, 제 인생도 엉망을 만든 뒤 적절한 시기에 나타나 다시 제 환심을 샀던 거죠. 그리고 결혼이란 우리 안에 저를 가두고 나선 모든 게 마음대로였죠.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던 거예요. 그 순간 벗어나고 싶었어요. 남편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죠.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도 알았어요. 무슨 방법을 쓰던, 설령 법적으로 이혼을 하더라도 그는 끝까지 저에 대한 증오의 칼날을 거두지 않을 거란 걸 말이죠. 그리고 저를 가지고 놀며 몸과 마음은 물론 인생마저 망쳐놓은 그에게 저도 역으로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제가 느낀 고통과 절망의 십분지 일이라도 그가 알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약을 구했습니다. 조금만 마셔도 몇 시간동안 죽은 듯 잠든다는 약을 그가 늘 마시던 술에 섞었죠. 약에 취해 뻗어버린 그를 욕실로 옮겼습니다. 그 뒤론 설명할 필요 없겠죠. 그의 폭력을 참으며 결혼생활을 유지해보려 애를 쓰면서 제가 늘 떠올리던 건 우리가 다시 만나던 무렵 그가 했던 말이었어요.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는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이제 제가 그에게 한 일도 비슷한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사랑 때문이다.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영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기수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그녀의 얘기들을 곱씹어보았다. 분명 결혼 후 진수 부부의 대외 활동이 지나치게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결혼 2년차가 되어가는 신혼부부였기에 어디에선가 그들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으리라 상상했다. 나중에 컴퓨터에 그녀가 말한 사진들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모니터와 연결된 케이블을 분리하고 트라이포드에서 캠코더를 분리하였다. 저장용 메모리카드를 뽑아 주머니에 넣은 뒤 아래층으로 향했다. 이것은 지원이 진수를 죽였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동시에 진수가 그녀를 폭행해 왔다는 증언이기도 했다. 이것을 경찰에게 넘겨야 할지를 결정하는 건 조금 뒤로 미루어야 할지도 모른다.

욕실을 막은 벽은 절반 정도가 제거되어 있었다.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여유가 생기자 작업을 중단시킨 박 형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아래로 내려온 기수도 그의 허락을 구한 뒤 그의 뒤를 따랐다. 욕실 안은 거실에서와 같은 역한 냄새가 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고 가득 고여 있었다. 가까이서 본 진수의 팔은 벽 너머에서 보다 훨씬 기괴했다. 그의 팔은 욕조 안을 가득 메우다 못해 산처럼 불룩 솟은 시멘트 덩어리 가운데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팔목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는데 수갑의 반대편은 세면대의 하수관에 매어져 있었다. 물에 불은 것처럼 퉁퉁하니 부어오른 팔의 피부는 연한 보랏빛이었다.
“이게 다 뭐야......”
박 형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진수의 팔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 안에 있는 게 동생분인지 확인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겠네요.”
박 형사의 말에 기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이 진수란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아마도 지원은 자신의 결혼 생활이 진수의 폭력과 억압에 구속되어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무언가에 속박되어 사는 것을 진수가 체험하게 만든 것이다. 불룩하니 욕조 위로 솟아오른 시멘트의 산을 훑어보던 기수는 또 하나 괴상한 것을 발견했다. 시멘트 산의 윗부분, 그러니까 그 아래 진수의 머리가 놓여 있음직한 부위에 뾰족하니 무엇인가 또 하나 솟아올라 있었다. 그건 엄지손가락 굵기의 검은색 PVC 파이프였다.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솟아오른 파이프의 끝엔 이슬처럼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기수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나 괴상하고 한편으론 지독한 상상이었지만 동시에 일말의 가능성과 희망을 가진 상상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확인하는 가였다. 방법은 간단하다.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긴 했지만.
“누가 되었든 간에 이런 꼴을 당한 게 죽고 나서였으면 좋겠네요. 이건 생매장이나 다름없잖아요. 게다가 시멘트 양생하면서 발열이 심했을 텐데......”
박 형사의 말들이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기수는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마냥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시멘트 덩어리 위로 솟아오른 검은 파이프의 끝을 지그시 손가락으로 막아본다. 약하게나마 손가락의 피부가 파이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악, 이게 뭐야!”
박 형사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는다. 기수 역시 창백한 얼굴로 파이프를 막고 있던 손가락을 치웠다. 밖으로 빠져나온 진수의 팔, 퉁퉁 부어올라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던 그것이 격하게 움직이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기수는 동생의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숨 막혀, 살려줘! 숨 막혀, 살려줘!’
지원의 복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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