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반복되는 소소한 선택이나 어쩔 수 없는 작은 노동이 너무나도 숨막힐 때가 있습니다. <허트로커>에서 미국에 돌아온 제임스 중사가 시리얼을 고른다거나, 지붕 배수관에 쌓인 썩은 낙엽을 긁어낸다거나 하는 장면처럼 말입니다. 특히 마트 진열대를 가득 채운 시리얼 앞에서 순간 망연해 있는 장면에서 그가 영원히 전쟁터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보였달까요. 군대에서는 주는 대로 먹고, 명령대로 폭탄을 해체하고, 그 순간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다른 소소한 문제들은 폭탄이 터져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삶이 아주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전쟁터는 제임스 중사가 간절히 원하는 생과 사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을 언제나 제공합니다. 그에 비하면 시리얼 고르기 같은 게 얼마나 시시해 보이겠어요.
우라사와 나오키의 초기작인 <파인애플 아미> 중 '화이트 체이서'라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용병인 주인공 제드 고시가 훈련병 둘을 데리고 눈길 행군 훈련을 하다가 정체 불명의 습격자를 만나게 됩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웠던 노병이 눈길을 행군하는 군인을 습격해 죽이고 있었던 거지요. 제드 고시는 가까스로 습격자를 사살하지만 습격자는 "당신 같은 상대에게 죽는 게 소원이었다. 소원대로 난 전쟁터에서 죽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만족스럽게 숨을 거둡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제드 고시는 이해하고 훈련병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전쟁터에서 자기 존재를 깨달은 사람은 결코 침대에서 편하게 죽지 못한다. 싸움에서 싸움으로, 전투 속에 자신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니까."
아마 제임스 중사도 침대에서 편안하게 죽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결코 전쟁터를 떠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그의 속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요.
마지막 인간 폭탄을 겪고 기지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공포에 질린 샌본이 중사님은 항상 목숨을 거는데 그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제임스 중사는 그 질문에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 외에는 신통한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아마도 매순간 임무를 수행하는 그의 속에는 생각 대신 아드레날린과 긴장을 추구하는 본능이 존재할 겁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제임스 중사 나름의 기묘한 쾌락이 존재하겠지요. 그래서 War is a drug. 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