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멀고먼길 입니다.


제가 얼마전에 [바람이 분다]를 봤는데요, 뭐랄까 '하야오 영감은 어떻게 근심을 멈추고 전투기를 사랑하게 되었는가'라는 패러디영화를 보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상심한 나머지 집에 와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았습니다. (아니, 왜....)

그런데 이 작품은 얼마나 장면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운지 그만 이 나이 먹고 그만 울음을 터뜨릴 뻔 했지 뭡니까.

간신히 자리보전을 하고 나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극장에서 영화보다가 운 적이 몇번이나 있더라...?'

'아니, 왜 혼자 뜬금없이 울어놓고 뜬금없는 망상을 하는건가요?'라고 물으신다면 말이죠, 원래 슈퍼-바낭이란 그런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머리속에서 격추시켜도 끝내 불굴의 야마토혼으로 되살아나서 '이야아, 우리들은 참 열심히 살아남았지요!'라고 외치는 제로센같은 그런 것이죠.


네, 뻘소리는 고만 하구요...


아무튼 간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가 극장에서 영화보면서 운 적은 두번 있더라구요.

그 중 한번은 노근리 학살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이었습니다. 

극중에 다리밑으로 쫓겨들어간 피난민들이 기관총사격을 막기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엄마손에서 뺏어가 강물에 빠트려 죽이는 장면이 있는데요.

뭐 그 장면에서는 저 뿐만 아니라 시사회를 하던 극장 전체가 눈물에 잠긴 듯 했으니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죠. (여러분, 그 영화 보세요. 두번 보세요.)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이 - 이게 참 골때리는 사례지 말입니다.


제가 200x년에 재수를 한 곳이 포천 모처에 있는 - 많은 분들이 수능 직후 날아오는 신문광고지로 익숙하실 듯 한 - 기숙학원이었는데요. 

혈기왕성한 스무살(플러스 알파) 남자들이 산골짜기에 1년씩이나 처박혀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꼭 인서울하야 내 부모님의 은혜를 갚고 입신양명하고 말리! 라는 다짐은 한 석달쯤 가면 오래 가는 거구요.

"아이고 선생님 제가 목에 담이 걸려서..." 내지는 "아이고 선생님 제가 감기가 독하게 와서..."등등의 핑계로 읍내로 도망가 게임방으로 달려가거나 서울로 도망가는 사례가 부지기수였죠.

그래서 학원측에서도 기강관리를 위해서 한달에 한번 치르는 모의고사가 끝나면 그 주 주말에는 2박 3일 가량의 '휴가'를 줬습니다.

전 그때 동생이 서울 모 대학에 다니고 있는 관계로 종종 신세를 지곤 했죠.


그 해 4월이었나 5월이었나, 휴가를 만끽(...)하고 복귀하려는 찰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내가 모처럼 서울까지 나왔는데 영화는 한편 땡기고 들어가야제!!'

마침 집합장소가 신도림 모처라서 '아이 잘됐다'하는 심정으로 구로 CGV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비수기라서 그런지 영 볼 작품이 없더라구요.

매표소 앞을 서성거리다가 눈에 들어온 작품이 당대의 로리...아니 국민여동생이었던 문근영이 출연한 [어린 신부]와

한국개봉전부터 무수한 루머를 양산한

그 문제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였습니다. (두둠칫!!)


두 영화중에 잠깐 고민하다가,

'하하하 이 내가 문근영이 나오는 3류 코메디영화 따위 극장에서 볼리가 없지!'라며 - 네, 저도 어릴때 이런 생각했던거 기억날때마다 허공에 3단 하이킥 날리고 그럽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성↗인↘ 1장이요"를 외쳤습니다.

일요일 아침이었고, 구로가 건대나 신촌같은 동네도 아니어서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뒷 자리에 저 하나, 그리고 저어기 앞쪽에 커플 한쌍.

'그래, 예수님의 고난 따위 내가 다 받아주겠어!'라는 생각을 하며 들고온 팝콘을 입에 한주먹 털어놓는 순간 - 상영 3분전

구로 모 교회에서 목사님 인솔하에 할머니 대략 80여명이 우루루 들어오십니다.

전원 착석.

영화 시작.


뭐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한 5분여만에 무도한 로마 병사놈이 '그 분'께 귓방맹이를 날리죠.

뒤에서 어느 어르신이 

"아이구야, 저걸 우째!!"

이 장탄식을 시작으로 극장이 뭔가 3D 사운드 시스템으로 바뀝니다.

좌우후방에서

"어이구 예수님요...."

"아멘...아멘...아멘..."


사갈같은 본디오 빌라도의 심문을 거쳐서 상스러운 로마병사가 '그 분'께 고문을 가합니다.

"어이구...으흑흑..."

"아멘...아멘...아멘..."

"로마놈들이 다 쌍놈의 것들이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유대제사장들이 모처에 모여서 수군수군 회의를 하다가 '그 분'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 저놈들이 그럴줄 알았어!"
"이런 나쁜놈들아!"

"아멘...아멘...아멘..."

"이 육시랄 놈의 유대놈들!"

어르신 그러시면 안됩니다. 그거 제노포비아요. 일단 제가 영화를 못보고 말이죠...


'그 분'의 사형이 결정되고 시베리아에서 귤이나 깔 로마상것들이 '그 분'을 조롱하며 가시면류관을 씌웁니다.

"어헝 어헝 어컭컭" (이 정도 되면 데리고 나가야 하는거 아닌가...)

"아멘...아멘...아멘..."

"아이고 우리 예수님 우짜노...우짜노..."

"로마놈들이 다 저러다 천벌받아서 망하는 거여"

할머니 세계사 막 다시 쓰고 그러시면 안되는데...


여기까지 대략 1시간 30분정도 걸리는데요, 제 멘탈은 이미 더이상 무너질 데가 없을 정도로 무너져서 '오냐 뭐라도 하나 눌러지면 왈칵 터져주마!'라는 상황이었습니다.

군중심리라는게 참 무섭더라구요.

그런데 '그 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천천히 올라가려는 찰나 삐끗해서 넘어지는데, '그 분'의 어머니께서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탄식하며 달려나오는 장면이

'그 분'이 어릴적 골목길을 달려오다 넘어져 어머니가 달려가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랑 교차편집으로 튀어나오지 뭡니까.

네, 어떻게 보면 진부한 표현이라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제가 이런거 좀 약합니다. 대놓고 "엄마마마마마", 혹은 "아빠빠빠빠"하는 거요.

그래서 그만 눈물이 왈칼 터지고 말았지요. 그런데 이게 한번 터지니까 말입니다. '봇물터지듯 흘러나온다.'라는 관용구처럼 제어가 안되는겁니다.

십오분정도를 울었어요. 심지어 저는 교회도 안 나가는데! 절에 나간단 말입니다!

'이제 그만 울어야지, 그만 울어야지.'하고 있는데 '그 분'께서는 왜 자꾸 언덕을 올라가다가 그리도 삐끗해 하시는지,

왜 멜 깁슨은 '그 분'이 못박힐때마다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지, 

왜 저 할머니들은 당최 울음을 그치시질 않는건지, 이 영화는 두시간짜리란 말입니다! 어디 삼각커피우유팩에 눈물보충분같은거라도 담아오셨단 말인가요!


어쨌거나 '그 분'은 "다 이루었도다"를 외치며 승천하셨고, 제 훌쩍거림도 그제야 다 그치더군요.

'스크린안쪽은 이제 기독교천국이겠지만 여긴 지옥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라고 생각하며

'영화 빨리 끝나라, 빨리 끝나라, 빨리 끝나라.'를 되뇌고 있는데

근성의...아니 거룩하신 '그 분'께서는 기어이 사탄놈의 뒷통수를 맛깔나게 후려치고 부활하시지 뭡니까!

이렇게 영화는 결말에서 성령이 대 폭발!!!!!!!!


그리고 제 좌/우/뒷자리에 앉아계시던 할머니들도 성령이 

발!!!!

"이야아아!!!!"

"예수님이다, 예수님이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리고 번뇌를 버리고 평정을 유지하려던 저의 멘탈도

아주 그냥 승천을 해버렸다는 그런 이야기...


혹시 여러분은 영화보다가 이렇게 울어본적 있나요?

(있을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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