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잘 안나요

2013.08.30 02:19

카시스 조회 수:3756

평소에 정신없이 회사 다니고 약속 잡고 사람들 만나서 얘기 듣고 얘기 하고 

틈틈이 스마트폰에

시간날 때 마다 자동반사적으로 들어가는 SNS로 멍때리기 하다 보니 


지난 몇년동안에는 제가 "기억하는 행위"에 부은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기억하는 행위가 점점 귀찮게 느껴지고 있구요.. 


가끔 대화의 일부는 생각나는데 이 이야기가 나올 때 내 앞에 앉아있던 사람은 누구였지 생각이 안날 때도 있어요. 


그리고 그날 점심은 누구랑 먹었더라도 생각이 안나요.. 이건 거의 안나는 것 같아요.. 


좀더 어린 시절에는 2-3일에 한번씩 손으로 일기 쓰는 행위가 제게는 그나마 기억하고 기억한걸 언어화 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것도 요즘에 아주 가끔 생각나서 일기장을 열어보면 마지막 페이지에 한달전에 쓴 일기가 적혀 있어서 깜짝 놀라곤 합니다. 사실 일기장이 눈에 밟히긴 했는데 일기를 쓴다는건 기억하기니까 그게 귀찮기도 했어요. 의식적으로 머릿속을 어떤 질문에 대한 답에 집중하고 그걸 떠올려보는게, 그래서 잠시 쉼표를 찍는 행위가 귀찮게 느껴지다니. 얼마나 내가 충동적이고 자동반사적인 행동에 몸을 맡기며 살았나 싶어요.  


뭐든지 요샌 후다닥 반응이 오고 

뭐든지 쉽게 구글에서 검색해 볼 수 있고 그런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찐득하게 앉아서 기억하는 행위는 귀찮아진걸까요. 

그냥 앞만 보고 내일 할 일만 생각하기도 벅찬데, 지금 끝내야할 일로도 정신없는데. 아직 못읽은 페이스북 업뎃도 많고 계속 생기는데.. 트윗 업데는 계속 생산되고 있는데.. 

계속해서 무한 생산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현재를 쫓아가기 위해.. 나의 과거를 지우고 있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니 한심하네요. 남들의 수많은 현재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다보니 얼마전에 누가 제게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묻는데 머릿속이 깜깜 생각이 안나는거에요.. 내가 올해 본 영화가 뭐였더라.. 

집에 와서 기억을 돌이켜보고 아 맞다.. 올해 본 영화 중에는 지슬이 느무느무 좋았고 마스터는 생각보다 별로 였어. 

아 나 대학시절에 이터널선샤인이 너무 좋아서 4번넘게 보고 대사도 외우고.. 살인의 추억은 극장에서 3번.. 아, 글구 아비정전.. 

근데 이 영화들의 제목을 듣는게 너무 오랜만인거 있죠. 혹시나 까먹을까봐 좋아하는 영화를 적어서 두었어요.. 꼭 옛날에 싸이월드 하면 자기소개 글에 좋아하는 것이나 취향 적어놓듯이. 그렇게 해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듯. 


그리고 또 누가 제게 올해 좋았던 논픽션 책은 뭐였냐고 묻는데, 

올해 읽었던 책이 뭔지, 적어도 한달에 한권은 읽었는데.. 또 생각이 바로 안나는거에요. ㅜㅜ 

한참 머리를 쥐어뜯다가 피로사회 하나 떠올렸습니다. 


그러다 트위터에서 앵무새 죽이기 관련 칼럼을 추천한 트윗을 보고 생각났어요. 아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다시 첫장으로 돌아가 읽고 싶었던 앵무새 죽이기. 앵.무.새.죽.이.기. 몇년간 잊고 있던 그 여섯글자와 함께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오랜만에 회상하게 해주었더랬죠.. 근데 난 이렇게 잊고 있었다니. 그 트윗이 아니었으면 기억도 못했을 중요한 책인데. 


그래서, 비록, 그날 뭐했다는 단조로운 행위와 일상의 시간순서대로의 배열일지라도 

하루하루 시간 나는대로 

일기를 쓰면서 기억하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 


연관없는듯 연관있는 동영상인데 


구글은 우리가 모르는 상태로 남는 순간을 모두 없애버려서

그래서 우리 인생을 망쳐버렸다는.. 코믹하고 슬픈 비디오에요. 

우린 더이상 not knowing state 에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게 생겨도, 금새 알게되기 때문에, 뭔가를 알고 싶은 그 욕망을 느끼는 순간도 사라졌다.. 

http://www.youtube.com/watch?v=PQ4o1N4ksyQ 


너무 슬프지 않나요. 

어릴때 학교 수업에서 선생님이 학생들한테 질문을 하면 

학생들이 틀린 답을 내도 바로 답을 알려주지 않을때 있죠 

조금더 힌트를 주고 또 새로운 힌트를 주고 

그러면 그 궁금증이 새로운 궁금증을 낳으며 뇌의 다른 부분을 자극하는데 

그렇게 호기심과 알고싶은 욕망에 모멘텀이 생겨 점점 커지다가 

결국 답을 알게 되는 순간, 아! 하고 이해되는게 있잖아요. 


그렇게 앎에 이르는 과정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요. 기억도 그 과정의 일부일텐데  


구글 때문에, 페이스북 때문에, 스마트폰 때문에, 인터넷 때문에, 

인간의 기억하는 기능이 점점 퇴화되고 있는 거겠죠? 


어떤 내용을 적어서 컴퓨터에 저장하면요 

그 내용을 기억하는게 아니라

컴퓨터 어느 폴더 밑에 어느 폴더에 저장했는지 저장 위치를 기억하게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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