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베를린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일단 액션부터가 한국 영화에서 그간 보지 못했던 수준이었어요.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문제나, 과도하게 판을 키우려는 과정에서 구멍이 숭숭 나 버리는 등의 문제 등이 있긴 했지만 이야기 자체에도 큰 불만은 없습니다.

국가 간 갈등 문제로 외피를 두르고 있던 상황이 갑자기 가족 단위의 갈등으로 변모하더니, 집이라는 공간 근방에서 끝장을 보는 식의 클라이막스도 맘에 들었어요.

고리타분한 내용에다 구멍 뚫린 전개여도 현 시점의 남북한 정세에 베를린이라는 공간이 겹쳐지니까 그 자체로 묘한 생명력 같은 게 생겨나는데, 그 위에 '가족'의 문제가 덧대어지니 이야기의 풍미가 더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가족', 나아가 '민족', 이거 그야말로 남북한을 관통하는 이슈잖아요. 남북한이기 때문에 더더욱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한석규가 전지현에게 '고향'을 묻는 장면처럼 짤막짤막하게 등장하는 장면이 유달리 큰 울림을 준 것도 아마 그 때문이지 않나 싶어요.

류승완 감독은 속편을 내지 않겠다고 했지만, 저는 무대를 바꿔서라도 이 가족 간 갈등 스토리에 어떤 큰 결말 같은 걸 맺어주었으면 좋겠어요.

 

2. 문라이즈 킹덤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사랑스러운 영화였습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덜 자란 어른 대신 조숙한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세움으로써 나름의 전복을 시도했는데, 유명 배우들이 신인 아역들에게 주연 자릴 내어주고 조연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전복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았어요.

미래에서 온 듯 한데 이야기에 개입하기도 하는 나레이터의 존재, 섬이라는 공간적 특성, 대칭 구도에 대한 집착,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예쁜 화면, 재난과 관련된 설정 등을 보면 마치 영화가 통째로 수지가 읽는 판타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가상의 공간 같아요. 그 때문에 보는 이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되는데, 바로 그 자리에 폐부를 찌르는 요소들을 숨겨두었더라고요.

영화는 아이들의 사랑과 폭력을 마치 어른들을 모방하며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보여주다가도 발기, 피 등 그 실질적인 결과를 바로 이어서 보여주기도 해요.

그런데 영화 속 어른들은 그 '진짜'의 증거들을 외면하고 그 아이들의 감정을 무조건 '거짓', '없는 것' 취급하고 무시한단 말이죠. 정작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잊고 있는 건 자신들인데 말이에요.

영화는 비현실적 공간 하에서 그 두 집단이 극적인 화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정말 황홀할 정도로 멋지게 그려냈어요.

특히나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노래가 흐르던 그 장면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3. 비스트는 워낙 해외 평가가 좋아서 기대가 컸는데, 기대보단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원제 'Beasts of the Southern Wild'의 Beasts는 남극에서 올라온 원시 야수들 외에 제방 남쪽 욕조섬에 남아있는, 내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까지 묶어 가리키는 말인 것 같았습니다.

부모 혹은 아내의 결핍으로 인해 야수가 되기를 자처한 아버지, 그리고 그 삶의 방식을 물려받은 딸이 나와요. 그렇지만 그 딸은 욕조섬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내부의 아버지와 외부의 어머니 사이에서 흔들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진실한 소통'의 가치를 깨닫고 진정한 의미의 성장에 이르죠. 그리고 오히려 그 방식을 역으로 스러져 가는 아버지에게 전달해 주고요. 영화는 이 과정을 환상적인 터치를 더해가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내더라고요. 군데군데 신인 티 나는 거친 부분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쿠벤자네 왈리스 연기는 듣던 대로 대단했고, 원래 빵집 주인이었다던 윙크 역 배우도 막판에 찡하게 연기 잘 하더라고요.

 

4. 발렌타인데이였던 2월 14일에는 재개봉한 러브레터를 봤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는 좀 별로네요.

일단 일본 영화 특유의 과잉이 보는 내내 무척 거슬렸어요ㅠ 어릴 땐 몰랐는데 다시 보니까 많이 걸리네요. 왜 그렇게 화보집처럼 못 찍어서 안달인가요ㅠㅠ 시간 지나서 보니까 오히려 더 촌티 나잖아요ㅠ '4월 이야기'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걸 떠올려 보면, 그냥 이와이 슌지 연출력이 덜 여물었던 탓인가 싶기도 해요.

죽음과 망인에 대한 기억을 테마로 세 덩어리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과정도 여전히 낭만적이긴 합니다만, 그 깊이가 제 기억보다 상당히 얄팍하더라고요. 이야기 구조도 더 잘 써 먹을 수 있었을 것 같고... 게다가 이츠키네 할아버지나 고모부는 진짜 스크린에 등장할 때마다 그 부담스러운 오버 연기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긴 좋네요. '오겡끼데스까' 그 장면은 다시 봐도 눈물 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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