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많이 잡혀 있던 연말 약속을 하나씩 취소하고 묵묵히 집에 걸어 들어와 밥을 데우고 국을 끓이다가 문자를 받았습니다.

번호를 스팸처리 해도 해도 오는 당선자의 니마땡큐베리감사! 하는 문자였어요.

무려 '민생' 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더군요. 야 이 XX아. 니가 민생이 뭔진 아냐. 속에서 또 불이 치밀어 올라 찬장을 뒤졌습니다.

결국 밥 + 국 + 김치 + 양주 라는 괴이한 조합이 탄생했죠. 밥 한 술에 양주 한 잔. 김치 한 번에 양주 한 잔. 양주 반 병이 순식간에 줄어드네요.

정신을 다른 데에 쏟자 하고 티비를 트니 괴이한 프로그램들 사이에 강용석이 진행하는 프로그램 이름을 보며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불이 화르륵!

계속 채널을 올리다가 윤도현이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에 잠시 멈추었습니다.

들국화가 나오네요?? 콘서트가 참 좋았더라는 후기를 바로 여기에서 본 것도 같았는데.

across the universe 를 부릅니다.

 

Jai guru deva om 신이여 승리하소서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그 무엇도 나의 세계를 바꿔놓을 순 없어요.

 

전인권의 째질 듯한 목소리에 유난스레 감정이입이 됩니다.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압구정에서 <테이킹 우드스탁>을 보고 나오면서 뜬금없이 친구에게 '비틀즈는 위대합니다요' 문자를 보내던 생각도 나고요.

무언가, 이상스럽지만 저 구절이 마음을 다독여 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창 노래에 취해 있는데 노래는 이미 끝났고, 다음 노래는 들국화의 <사랑한 후에>가 나오더군요.

항상 제목 그대로로 받아들이던 곡입니다.

곡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있나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

 

평소와 다르게 받아들여져요. 특히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 이 구절이 말이죠.

정말로 끝난 것 같았던 석양이 길게 늘어뜨려져 밤이 되어 내 눈앞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저기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 수 없어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 수 없다는 말이 평소와 다르게 다가오는 밤입니다.

이 노래의 끝은 이러합니다.

 

종소리는 맑게 퍼지고 저 불빛은 누굴 위한 걸까
새 별이 내 앞에 다시 설레이는데

 

새 별이 내 앞에 다시 설레인다고 합니다.

아직 설레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요.

어제 아침에는 분노와 증오와 절망이 나를 감싼다고 일기를 썼고 어제 밤에는 그 중 절망이 가장 강하다고 썼습니다.

이제 그 '내가 대체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이냐' 를 넘어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더'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이 되더군요. 이쯤이면 기운이 난 거겠죠.

어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는데 할 수 있는게 참 무지막지하게도 많더라구요. 이제 슬슬 그만 징징거리고 그만 남 탓 하고 기운을 내 보아야겠죠.

 

음악의 신기함은 이것인 것 같습니다. 어떤 곡이든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재생산이 가능하고 자신의 상황에 맞는 감흥을 줄 수 있다는 점이요. 저는 정말 오늘 전까지 저 곡을 사랑노래 이외 다른 느낌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저 아래 어딘가 검정치마의 안티프리즈를 올리셨던 분 글에 어떤 분이 여태 사랑노래로만 생각했었다고 하셨더라구요. 거기에도 덧글 썼지만 전 정말 그 곡을 너무 좋아하면서도 한 번도 사랑노래로 생각했던 적이 없었죠.

 

 

 

참, 프로그램의 마지막은 Let it be 였습니다.

비틀즈는 정말, 위대한 게 맞아요. 언제 들어도 나의 상황에 맞춰주는(?) 유일한 그룹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01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099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306
170 초등학생 수준의 두근거림. [2] 부기우기 2011.07.13 1235
169 요즘 읽은 소설들과 파리 5구의 여인 칼리토 2013.05.09 1235
168 [바낭] 쪽쪽쪽 [2] calmaria 2012.07.10 1234
167 트루 그릿(스포 없음)/떠나는 사람들/토요일 아침의 바낭 [1] 양자고양이 2011.02.05 1233
166 바낭] 중년의 재교육을 위한 인프라 [1] 칼리토 2013.07.01 1232
165 곧 컴백할 걸스데이를 기다리며 한번만 안아줘 유라 직캠 [5] 루아™ 2012.04.16 1231
164 꼴데는 희망고문 중 [3] chobo 2012.04.14 1229
163 나는 왜 하고 나서 후회하는지... [2] ACl 2012.03.29 1226
162 [눈 오네요] 눈오는 기념으로 연애 바낭 [4] 단추 2012.01.31 1223
161 동적평형 독서모임 2월 첫모임 후기 [4] 칼리토 2015.02.07 1223
160 PCI 타입 무선랜 카드(ipTime G054P), 외장 안테나 연결 안해도 사용가능할까요? [5] chobo 2011.03.16 1221
159 잡담, 해리 포터 보신 분 계세요? 스포 없는 질문글이에요 :D [4] 마나 2011.07.15 1221
158 [트레일러] 수어사이드 스쿼드 / 유년기의 끝 [7] walktall 2015.07.14 1217
157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의 추억 (글: MBC 김소영 기자) 김원철 2011.09.14 1216
156 <청춘에게 딴짓을 권한다> 저자 강연에 초대합니다. 참세상 2011.09.03 1215
155 영화일기 6 : 만덜레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호빗 다섯 군대의 전투, 쿼바디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7] 비밀의 청춘 2015.06.24 1207
154 겨울산 [3] 가끔영화 2011.07.30 1205
153 이선희 엘비스 노래 부르기 [1] 가끔영화 2012.01.23 1203
152 (이제서야 PVP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디아블로3 이야기) PVP 좋아하십니까? [6] chobo 2013.01.14 1203
» [이것은정치바낭] 비틀즈는 위대하네요. 음악은 살아남을 수 밖에 없죠. [4] 허걱 2012.12.21 120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