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뜬금 없는 시 한 편

2012.11.02 15:18

로이배티 조회 수:1497

반 학생의 작품입니다.

대단히 훌륭하진 않지만 그래도 재밌어서.

그리고 뭔가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진심이 느껴지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서 잉여로운 금요일 오후에 살짝 올려 봅니다.


- 추억 -


어두운 방 안엔

밝은 모니터가 켜지고,

 

다크 서클이 진 소녀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캐릭터의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방으로

엄마가 분노와 함께 들어오시었다.

 

아, 엄마가 보여주셨던

그 엄청난 분노.

 

나는 한 마리 어린 폐인

분노에 찬 엄마의 화난 옷자락을 잡고

다 죽어가는 캐릭터를 말 없이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통수를 엄마 손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내 캐릭터와의 마지막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는

그 때의 나처럼 게임에 빠져버렸다.

 

옛 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새로운 던젼에는

다시 방어력 다 떨어진 캐릭터가 죽어가는데

 

서러운 열 여섯살, 나의 머리에

불현듯 엄마의 분노의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그 밤에 화를 내던 엄마 모습이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박혀 흐르는 까닭일까.



읽으면서 이미 눈치채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이 작품의 패러디입니다.


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都市)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72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26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445
115 녹은 치즈 먹어도 될까요 [4] 노루잠 2012.08.03 2186
114 싸이의의 노래가 미국에서 인기가 있건 말건 [5] chobo 2012.08.04 4844
113 강원도에 다녀왔어요 {음식 + 동물 사진 有} [10] miho 2012.08.13 3221
112 (야구이야기) 무소식이 희소식(응?!) [11] chobo 2012.08.16 1742
111 R2B후기-본격 밀리터리 게이 로맨스(약 스포) [11] Shybug 2012.08.18 4496
110 박지성이 2012-13 시즌 QPR의 정식 주장으로 결정되었군요 [5] 알랭 2012.08.18 2408
109 아노말리사 날다람쥐 2012.08.23 992
108 아이폰 메모장에 다른 사람의 메모가.. 있을 수 있을까요? [8] 유음료 2012.09.03 3467
107 동성애자분들에게 고백합니다 15금이려나요...(원하지 않는 분은 읽지마세요) [14] 연금술사 2012.09.05 6795
106 오랜만에 쌍둥이 남매 이야기, 아들과 함께 하는 건프라, 안철수 [24] 에이왁스 2012.09.27 2861
105 오늘은 25주년 기념일 [2] 가라 2012.09.28 1936
104 호텔 뷔페(in 서울) 추천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5] chobo 2012.10.08 3031
103 (바낭)야구 이야기 [11] 피로 2012.10.08 2247
102 송호창 의원은 안철수 캠프로 가고, 이종범은 [8] 닥터슬럼프 2012.10.09 4034
101 [뻘글]문재인 탈당해서 안철수랑 무소속 단일화 해 버렸음 좋겠네요. [12] 파리마리 2012.10.11 2218
100 OST에 이제 그만 좀 쓰였으면 싶은 곡들 [6] 쥬디 2012.10.14 3046
99 만화는 아동포르노가 될 수 있는가. [13] catgotmy 2012.10.16 3531
98 [바낭] 담쟁이펀드 [4] 여름숲 2012.10.23 1646
» [바낭] 뜬금 없는 시 한 편 [8] 로이배티 2012.11.02 1497
96 강풀의 '26년' 이 드디어 개봉하려나 봅니다. [6] soboo 2012.11.08 267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