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월요일에 달리기 이야기

2012.09.03 22:27

미루나무 조회 수:1989

제목은 실은 페이크고 지난 토요일에 사천노을마라톤에 다녀왔습니다. ㅎ,ㅎ


부모님이 사천에 사셔서 집에서 가깝고 해서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구요. 이번에 하프코스로 처음 뛰었습니다. 


실은 상반기에 10km 대회 두번 나가본 게 다인 완전 초보인데 겁도 없이 하프 신청을 하고 열심히 연습중이다가 5월에 그만 뜻하지 않게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는 바람에. ㅠ_ㅠ 


2달을 맹탕 놀고 8월은 덥다고 놀고 정신 차려 보니 대회 1주일전이어서 큰일났다 싶어서 15km까지 한번 뛰어봤습니다. 


15km를 넘으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마침 그 주에 태풍도 2개나 와서 취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배짱으로 뛰어보자 해서 내려갔습니다. 


사천노을마라톤은 전국에서 낙조가 가장 아름다운 9대해안이라고 사천시가 선전하는 실안낙조와 함께 하는 대회라고 광고하더군요.  


그래서 특이하게 토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밤까지 달리는 코스입니다. 


풀코스가 5시 반, 하프와 10km, 5km가 6시에 출발하니 해지는 풍경을 보면서 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 유일의 대회인 것 같습니다. 


5시쯤에 대회장인 사천의 초전공원으로 가니 인근의 아파트주민들까지 가세하여 사람들이 득시글.^^;;;



  



하늘을 이렇고.



  


공원 안은 대충 이런 분위기였어요. 사진을 몇장 찍었는데 얼굴이나 개인정보가 잘 노출되지 않는 사진을 찾기가 힘드네요. 이것도 괜찮으려나 모르겠어요.


이 대회가 먹을 걸 꽤 잘 주는 편이라고 들었는데 과연 시작도 전에 이미 두부김치랑 막걸리에 수박화채, 뻥튀기, 국수 등을 나눠주는 부스가 줄줄이 들어서 있었어요. 


잔디공원이다 보니 가족들끼리 나들이를 나와 김밥을 나눠먹거나 풍선 든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구요.


거기다 무대에서는 트로트가수를 초빙하여 열창중.^^;;;;  아주 신나는 분위기였어요. 



아무튼 5시 반에 풀마라톤 출발하고 45분쯤에는 하프주자들이 스타트라인에 모였습니다.  


스타트라인에 다 모이면 사회자가 출발전 준비운동 삼아 신나는 음악 틀어주며 다들 안마도 시키고 펄쩍펄쩍 점프도 시키고 하는데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들이 다들 신나게 따라하는 모습을 보면 늘 키득키득 웃음이 나와요. 


물론 저도 시키는 대로 앞에 선 아주머니 어깨를 팍팍 주물러드렸지만. 


시작은 딱 6시에 하더군요. 그리고 나서 달리기 시작하자 인정사정 없이 제 앞을 쓱쓱 지나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ㅠ_ㅠ  


10km였다면 저도 저 속도로 뛰어봤겠지만 15km밖에 못 뛰는 주제에 속도는 무슨... 하면서 천천히 뛰다 보니 뒤에 사람들이 거의 안 남게 되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꼴찌라도 좋으니 완주를! 하고 왔지만 뒤에 아무도 없을까 봐 두려워서 뒤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코스는 정말 신났어요.


초전공원 인근이 요즘 민영화로 시끄러운 한국항공우주산업(KAI)도 있고 SPP조선소도 있는 지역으로 KAI를 뺑 둘러가서 해안가로 난 길을 따라서 조선소를 지나 쭉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코스인데 (풀코스는 사천대교를 건너갔다 오는데 하프는 거기까지는 안 가고 도중에 돌아오구요) 건물들 이름만 들으면 공장지대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 건물들 빼고 나머지는 정말 모두 시골이에요.


도로 한쪽에는 깨랑 여러가지 작물이 자라는 밭이고 반대편에는 하천이 흐르고 풀냄새가 물씬 풍기고 바람도 시원하고 불어서 기분이 좋았어요.  


사천노을마라톤이 자랑하는 낙조는 구름이 좀 있었던 관계로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붉게 물든 해가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달리는 건 참 좋더군요.  


중간에 멈춰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는데 저는 페이스조절에 급급해서 거기까지는 무리였어요.ㅠ_ㅠ 


거기다 제 뒤로 구급차가 와서는 저를 앞질러서 천천히 가는 바람에 좀 패닉이 되었습니다.  


원래 하프코스는 2시간 30분으로 제한시간이 있는데 제 실력으로 과연 그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었던 터라 구급차가 따라오니까 마음이 더 급해지더군요.  


그렇다고 여기서 속도를 냈다가는 10km를 넘은 후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속도를 내기도 그랬구요. 


그 와중에 대충 4km 정도 넘어가니 뒤늦게 출발한 10km 주자들이 씽씽 엄청난 속도로 저를 앞질러 지나가버리고. 


앞에서 달리시던 두 분이 원래 10km가 엄청 빨리 속도를 내서 지나가니까, 이런 식으로 수다를 떨면서 가신 덕분에 겨우 좀 안심했어요. 


5km지점을 넘으니 이번에는 5km 주자들이 중간에 합류했는데 이쪽은 달리는 페이스가 영 엉망이라서 -어린 아가들이랑 엄마, 아빠가 같이 달리는 팀도 있고 걷다가 뛰다가 다들 몸은 주체가 안 되는데 신나서 어설프게 뛰는 분위기였어요-  뒤섞여서 뛰다 보니 그 분위기가 좀 힘들었어요. 


구간이 짧다 보니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는 다들 반환점이 나타나서 금방 사라져버렸지만요. 


그러고 나서는 계속 하프주자들만 뛰는 조용한 분위기가 또 이어졌습니다. 



오른쪽엔 조선소, 왼쪽에 바다를 두고 달리고 있으니 해가 지면서 맞은 편 해안가에서 불이 하나씩 밝혀지고 저 멀리서 해안을 가르지르는 사천대교의 화려한 가로등 불빛도 보이더군요.


  페이스조절에 급급해서 사진을 못 찍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쉽네요.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는데.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어느새 8km, 9km가 금방이더군요. 


길도 어느새 만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바닷길이 끊기고 산길로 바뀌었습니다.  


좋아, 이제 반환점만 돌면 된다! 하면서 격려했는데 10km를 지나고 11km를 지나도 반환점이 안 나오는 겁니다. ㅠ_ㅠ   10km 지점에서 반환점이 곧인 줄 알고 기념사진도 찍었건만. ㅠ_ㅠ  



 


피곤해서 영 제정신이 아니라 사진이 다 흔들렸네요.^^;;;; 


실은 저는 코스 사전답사 따위는 안 하고 그냥 남들 따라가면 다 길이지, 하는 성격이어서 이 코스 반환점이 10km가 아니라는 걸 몰랐어요. ㅠ_ㅠ  


가면 갈수록 저 너머엔 산등성이 어두운 그림자만 보이고 사방엔 풀벌레 소리만 가득한데 가로등도 없이 어두운 지방국도변을 계속 달리고 있더라구요. 


맞은 편에서는 벌써 반환점을 돌아온 사람들이 '화이팅'하고 응원해줬건만.  대체 어디가 반환점인 거냐고! 울고 싶은 심정으로 뛰다 보니 어느새 14km. 다행히 14km를 지나니 반환점이 보이더군요. 


반환점을 돌고 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짧게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주위는 완전히 깜깜해졌는데 가로등이 없는 대신에 국도변 양옆으로 발치에 라이트를 밝혀서 환상적인 분위기였어요.  



  


문득 달리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 옆에 바다랑 섬이 쭉 이어지고 있더군요.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만 이런 느낌의 풍경들이었어요. 반환점부터는 남은 거리를 표시해주었는데 7km에서 점점 줄어드는 걸 보자니 완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사실 이때부터 피곤해서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걷기 시작하니 다시 뛰는 게 더 힘들더군요. 그래도 주변에서 뛰는 걸 의지삼아 뛰었는데 마지막 500m 남기고는 상당히 속력을 내면서 들어왔어요. 생각보다 힘이 남았다 싶어서 걸은 게 새삼 후회가 되더군요. 



 


완주후 결승선에서 찍은 사진인데  잘 안 보이시겠지만 붉은 불빛이 결승선이에요. 



그런데 결승선에 들어오니 같이 와서 기다려준 동생이 축하해주면서 저를 패닉에 빠뜨린 말을 남겼으니... 동네 주민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음식이 부족하다는 겁니다.ㅠ_ㅠ


뛰고 나니 곧장 뭔가를 먹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촌국수를 준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ㅠ_ㅠ  


국수도 없고 땀이 완전히 말라붙어서 온몸이 소금기투성이라 그냥 빨리 집에 가서 자야 겠다 싶어서 바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는데 그 와중에도 하프 다 뛰고 와서 노래자랑 -경기종료후 노래자랑을 하더군요-에 참여하고 노래하고 플룻 부시던 분들. 진짜 존경스러웠어요.  



대회는 토요일에 끝났어도 저는 오늘까지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참 즐거운 대회였어요. 내년에는 더 좋은 기록으로 또 뛰었으면 좋겠구나, 사진도 많이 찍어야지 하는 다짐을 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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