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적기를

2012.08.21 00:39

lonegunman 조회 수:3964




이렇다 저렇다해도

최근 나온 온갖 '천재'소리 듣는 아이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괴물같은 한 사람을 꼽자면 로라 말링입니다

그녀의 첫 앨범이 나왔을 무렵에 듀게에도 한 번 클립을 하나 소개한 적이 있었을 거예요

사실 그때만 해도 포크씬에 굉장한 아이가 하나 나왔다 싶은 정도였지만..

굉장히 노숙한 취향을 가진 아가씨죠, 잭 존슨을 건너 제이슨 므라즈에 정착한 대한민국 포크씬에서 듣기엔 더더욱 그럴 겁니다

음악 교사의 가정에서 기타로 돌잡이를 하다시피 태어나, 부모의 취향을 고대로 물려받으며 자란 탓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그녀는

자신의 음악과 현대 포크씬과의 괴리를 '축복이자 저주'라고 말하더군요

사실 그냥 같이 듣자는 포스팅으로 걸어놓고 나가려 했는데 두 곡 중에 고민하다가 고르길 실패하고 배경 설명 들어가는 겁니다

사랑하던 사내가 전장에 끌려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와선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여인에게로 떠났는데 노년에 조강지처를 찾아 돌아온다는

이 노래를 쓰고 부른 게 열 여덟살 소녀라니 아무래도 배경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를 용서하세요, 헤라 여신이여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가 제 혀를 잘라갔고

이제 제게 남은 거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 오, 맙소사

그는 절 버렸는 걸요

잘도 제 죄를 비웃겠지요

그의 품에 머물러야 한다 하겠지요


그가 편지에 쓰기를,

'나는 파산했소, 부디 날 받아주오'

나도 망가지긴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대답했죠

'날 시험하려 들지 말아요'


그 여인은 피부가 참 곱기도 했죠

난 햇빛 한 줌 마냥 부실했는데

그래서 당신 주관하시는 일엔 성스런 빛이 넘치는가 보죠

난 그에게 물었어요,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변하셨나요

어찌 금단의 과일을 손에 넣으려 하나요

당신의 순수한 이름을 위해 바쳐진 희생양은 잊으셨나요

그러나 가지 말라 매달리는 나를 뿌리치고

그는 떠났더랬죠


그렇게 날 홀로 버려두고 한 줄기 빛조차 거두어 갔어요

저는 그대로 무너져 캄캄한 앞날을 두고 울었습니다

제게 머무르는 것이 그에겐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면

당신께선 그를 이해하시겠지요

내 곁에 있는 게 그에게 그토록 괴로운 일이었다면

당신께 감히 제 손을 잡아달라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적었어요

'이렇게 엎드려 비오, 그만 날 받아주오'

하지만 나는요, 나도 고통받았어요

답신을 보냈습니다

'날 유혹하려 들지 말아요'


당신이 태어나던 날 바쳐친 희생양의 피는 헛된 것인가요?

나도 그에게 떠나질 말라고 매달렸었어요

그도 그런 날 버렸다고요


마른 나무처럼 차갑게 갈라져 터진 손으로 그를 붙잡았어요

뱃전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있는 힘껏 그에게 매달렸어요

필사적으로 그에게 대항했어요, 빛과 여명에 대항했어요

그러나 밀려오는 파도가 그를 앗아갔지요

전장으로 그를 떠밀어보냈지요


그가 적기를,

'나는 망가졌소, 이런 날 부디 받아주오'

하지만 나는요, 나도 망가졌어요

할 말은 이것 뿐이에요

'나에게 이러지 말아요'


용서하세요, 결혼의 신 헤라여

전 서약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가 제 세 치 혀마저 잘라가

이제 더는 할 말도 남아있지가 않습니다


사랑이라고요? 맙소사

사랑한다면서 날 버리나요

이제와 내 죄를 그가 비웃던가요

그의 품에 머물러야 한다 말하나요


우린 편지를 쓰죠

그거면 됐어요

그의 체취가 그립네요


답신으로나마

우린 서로 대화를 나누니

그거면 나는 됐어요

거기까지가 우리에게 적당해요


그거면 나는 됐어요





//



그러니까, 영국 포크씬의 가장 노숙한 취향 중 하나이면서도 포크씬의 가장 힙한 온갖 이름들이 그녀를 통해 있으니 무서운 겁니다

노아 앤 더 웨일의 초기 멤버였다는 건 잘 알려진 일화죠. 

노아 앤 더 웨일의 프론트맨과 연애가 끝나고 각자의 길로 갔다지만 그거야 그들의 개인사고, 재밌는 건 노아앤더웨일은 가장 현대적인 포크 밴드라는 거죠.

음악적으로 그녀와 그 밴드 사이의 거리감을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예요. (팬들에겐 죄송하지만, 노아 앤 더 웨일은 첫 번째 앨범이 가장 좋기도 하고요)

그 후 멈포드 (네, 멈포드 앤 썬즈의 그 멈포드)와의 연애, 미국으로 건너가 안티포크씬의 대부 애덤 그린과의 협연 등등

아무튼 21세기의 중요한 포크 뮤지션들은 그녀의 이름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죠.

뭐, 팬덤도 없는 포크씬의 가쉽이나 늘어놓자는 건 아니고 두 번째 곡 얘길 하려는 겁니다

콘서트 클립이나 애비로드 라이브같은 영상을 보면 무대를 아주 휘어잡고 씹어먹는 그녀가 공중파 방송 줄스 홀랜드에서 보여준 모습은 꽤 의외였죠

긴장했다기보단 불만스럽다는 것에 가까운, 어색하다기보단 적응하고 싶지 않다는 편에 가까운.

이때 처음으로 그녀가 위태롭다고 느꼈는데 다른 분들껜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이 곡에서 그녀는 '라이언 아담스'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곧 그와 협연을 하게 되죠. 와, 그녀가 이름만 부르면 누구든지 달려오는 무시무시함.

제가 뭐랬습니까, 포크씬 전체가 그녀를 통하고 있다니까요.












알아, 너에게 사랑한다고 했었지

생각해보니 내가 틀렸던 것 같아

이건 처음으로 인정하는 것 같은데, 그래 내가 아직 어리잖아

너에게 상처주려던 건 아니었어

널 위해 열 곡의 사랑 노래를 만들었던 것까지도


처음엔 절대 가질 수 없는 남자 같았지

자기애에 흠뻑 도취된 완벽한 여자 친구와 소문난 커플이었으니까

그런 네가 날 위해 그녀를 버렸는데

이제와서 이러는 건 진짜 못됐다는 거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내 마음이 날 엿먹이는 건

어떤 남자도 미처 다 모를만큼 아주 흔한 일이거든


어쩌면 이쯤에서 포기하는 것조차 포기할까

날씬한 몸매를 버리고

우리 엄마처럼 되면 좀 나을까

아, 엄마 사랑해


미안하지만 어쩌겠어, 내 암울한 분위기를 목도하거나

내 터벅대는 고독한 걸음걸이를 마주친 남자들은 알아서들 조심해

나 다시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거거든

왜냐면 사랑과 고통은 손을 잡고 오니까

그런 거 하고싶지 않아

다시는


어느날은 밤을 세워 대화하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었지

하지만 도무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에게 이해시킬 수가 없었어

어쨌든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는 알고 있는 듯 했어, 라이언 아담스 티셔츠를 입고 왔거든

그걸 보면 내 마음이 약해질 거라 생각했나봐, 사실 더 확고해질 뿐이었는데


사실 내 친구 중에 목소리가 라이언 아담스랑 비슷한 애가 있는데

내가 갈아타려는 애가 걔거든, 널 좋아하는 것처럼 그를 내가 아껴

그 라이언 아담스 비슷한 그 친구가 문득 내게 그러더군

'내 기분을 말해줄까, 

신께서 내게 완벽한 여자를 만들어주셨는데-여기서 완벽한 여자는 너야-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아무한테도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 같은 기분이야'

하루 하루 지날수록 점점 더 모르겠어

이 새로운 낭만의 방식을


난 언제까지나 너의 첫사랑일 거고

넌 영원히 나의 첫사랑일 거야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내 암울한 분위기에 취한 사내들이여

나의 고독한 걸음걸이에 압도된 사내들이여, 조심해

나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더이상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건 싫으니까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더이상 상처를 주고싶지 않으니까

적어도 이 새로운 낭만의 방식으로는.





//



말이 많았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이런 밤 로라 말링의 목소리만한 게 있을까요

비오는 밤, 같이 듣자는 포스팅입니다






what he wrote

new romantic

all songs from laura marling

translated by lonegun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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