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묵동기담 墨東綺譚 1992

2012.02.26 20:50

Le Rhig 조회 수:2234

나가이 가후

부르주아 지식인인 가후는 일본제국 시대의 문인입니다. 섹스와 여성에 관한 현실 도피적인 소설을 써오던 그는 화류계에서 일하는 오유키를 만나게 되고, 일본은 중일전쟁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게 됩니다.

사건 위주의 영화에 대한 리뷰를 써온 저로서는 묵동기담의 내러티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큰 사건이랄 게 벌어지지 않거든요. 앞서 적은 줄거리 요약의 사건들이 정말로 내러티브에서 보이는 사건의 전부에요. 그래도 리뷰를 쓰려면 내러티브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미칠 노릇이죠.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닌 캐릭터와 시대입니다.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전체주의 시대에서 부르주아 지식인이 홀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먹고 살기 나쁘지 않으니까 죽지 못해서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성욕구와 창작욕구가 있을 얘기지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욕구는 점점 사라져가고, 가후에게 남겨지는 건 시대에 대한 원망과 문인으로서의 죄의식뿐입니다. 묵동기담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묵동기담의 주제는, 그거에요. 그리고 그건 영화를 좋은 반전 영화로 기능하게 합니다.

영화에서 캐릭터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시대의 피해자이고, 하나는 시대의 피의자입니다. 가후는 이 둘 모두에 속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가 부르주아 지식인인 때문입니다. 그는 시대에서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을 만큼 여유 있고, 시대에서 자신을 떼어놓을 만큼 똑똑해요. 그럴 여유가 없거나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이 시대의 피해자가 되고 시대의 피의자가 되는 거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피해자와 피의자로 나뉘는 기준이 캐릭터의 성이라는 겁니다. 여성은 피해자로 그려지고 남성은 피의자로 그려져요. 원작자의 자의식이나 각색가이자 감독인 신도 가네토의 자의식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가후라는 캐릭터의 자의식 때문인 게 맞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신도 가네토나 원작자를 가후라는 캐릭터와 분리하여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이니, 그냥, 그들의 자의식 때문인 거죠.

영화의 내러티브는 캐릭터 코미디로 시작합니다. 그냥 홍상수 레퍼토리에요. 학식도 있고 명성도 있는 부르주아 지식인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보여주는 거지요. 깨알 같은 재미가 있어요. 가후가 나이를 먹게 되고, 또, 오유키를 만나게 되고부터 내러티브는 드라마가 됩니다. 그전까지 그저 바닥 깊숙이 숨어있던 인물의 드라마가 수면으로 떠오르는 거지요. 자연스러운 변형이기에 대비가 생길 것까지는 아닙니다. 인물의 드라마는 영화 시작에서부터 있던 거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내러티브의 변형은 주제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입니다.

내러티브에 힘이 충분하기 때문에 영화에서 플롯의 역할은 제한적입니다. 언급할 만한 게 있다면, 좋은 날씨와 밝은 낮 장면들로 이뤄진 캐릭터 코미디를 하는 전반부가 드라마를 하는 후반부를 향해 가면서 나쁜 날씨와 어두운 밤 장면들로 바뀐다는 것 정도겠죠. 회고하는 듯한 가후의 내레이션에 대해서도 언급할 만합니다만, 그리 도드라지는 플롯은 아니에요.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건 세트와 의상입니다. 도쿄와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서양의 문물과 일본의 전통이 혼재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세트와 의상의 비중이 크고, 그리하여 독립 영화가 아닌 스튜디오 영화로 만들어졌어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토호 영화사 로고가 뜨더군요. 세트에 대해서 한 마디 더 하자면, 만들어진 세트는 앞서 이야기한 내러티브의 변형 과정을 따라가면서 음침해지고 허름해지고 이내 불탑니다. 젊은 여성의 나체가 많이 등장하는 영화지만, 영화의 스펙터클은 그러한 세트의 변형에 있는 것 같아요.

영화의 촬영은 영화의 성격과 잘 맞습니다. 관조하는 듯하고, 회고하는 듯하지요. 그래도 유난히 튀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가후가 오유키를 만나기 전 어느 게이샤와 정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세트고 조명이고 구도고 뭐고 간에 그냥 딴 영화 같아요. 심지어 편집도 그러하지요. 캐릭터 코미디가 끝나는 지점이라 일종의 절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아무 이유 없이 끼어드는 장면은 아닙니다. 이 장면 덕분에 후반부 드라마와 대비가 생기기도 하고요. 게다가 꽤 재미있는 장면이라서 굳이 일관성이니 뭐니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영화의 배우와 연기는 보통의 경우 배우의 이미지만 사용됩니다. 예외로는 가후 역의 츠가와 마사히코와 오유키 역의 스미다 유키 정도가 있는데, 이 중 가후 역의 츠가와 마사히코의 캐릭터 코미디 연기가 언급할 만합니다. 능글맞더군요.

묵동기담은, 잘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작품만으로 볼 때에는 크게 중요한 가치를 가진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신도 가네토의 영화사를 통해 볼 때에나 크게 중요한 가치를 가진 영화라고 볼 수 있죠. 이 작품을 좋아하게 될 것 같진 않습니다. 물론, 이번 특별전을 통해 신도 가네토를 좋아하게 되었으므로 이 작품을 잊게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2012.2.26
르 뤼그


가지가지.
오니바바의 히로인이자 신도 가네토의 아내인 오토와 노부코가 오유키의 가게 주인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캐스팅을 이용한 농담은 너무 교활해요! 비록 가후 이야기의 결말은 허탈하지만, 그나저나, 이들 이야기의 결말은 참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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